그릇 안 세계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RYU JIN
  • PHOTOGRAPHY BY KIM TAEKOO

그릇 안 세계

A Journey in Vessel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역사, 생활양식, 문화와 미감, 취향이 한데 담긴 그릇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영원히 길 위를 떠돌아도 좋다는 사람. 그릇으로 ‘사는 맛’을 발견한 작가 김은령 얘기다.
  • written by RYU JIN
  • PHOTOGRAPHY BY KIM TAEKOO
2025년 11월 07일

그릇과 국경 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무모하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를 견디고 깨뜨릴 위험을 무릅쓴 채 산맥과 해협을 건너 귀한 물건을 부엌 장 안에 안착시켜야 할 막중한 임무를 완수하는 모험을 기꺼이 자처한다. 그릇 얘기로 243쪽 분량의 책 <여기, 좋은 마음만 담기로 해>를 쓴 작가 김은령은 그런 면에서 도전 정신 충만한 탐험가다.
“10년 전 일본 다카마쓰를 여행할 때였어요. 길 가다 우연히 그릇 가게를 발견해 들어갔는데 일본 전역에서 가져와 소개하는 편집숍인 거예요. 거기에서 어떤 젊은 작가의 그릇에 반해 종류별로 집어 들었어요. 스무 개 정도.”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빠르게 계산한 후 완충재를 더해 부피까지 방대해진 그 ‘소중한 것’들은 그의 마른 어깨에 붉게 팬 자국과 인상 깊은 통증을 남겼다. “그런 그릇은 지나치면 다시는 못 만나요. 그래서 보일 때 꼭 가져와야 해요.”
크리스털 잔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잔뜩 신난 표정으로 그릇에 대해 수다를 떠는 김은령은 화려한 경력의 잡지인이자 작가, 번역가다. “매거진 <행복이 가득한 집>과 <럭셔리>의 편집장, 디자인하우스의 매거진본부장과 부사장으로 일했으며, 그 사이에 세 권의 책을 내고 <설득의 심리학>을 비롯해 30여 권의 해외 도서를 번역했다”는 소개 글을 보며 ‘차갑고 뾰족한 완벽주의자’를 상상했던 나는 그의 천진함에 한 번, 꺼내고 꺼내도 계속 나오는 방대한 양의 그릇에 또 한 번, 책과 음반도 그릇만큼이나 많이 모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반전은 계속됐다. ‘집에 들이는 그릇을 선별하는 기준이 엄격할 것 같다’는 추측을 담아 건넨 질문엔 이런 답이 돌아왔다. “기준요? 없어요. 일단 사들입니다. 갖고 있던 것을 친구들과 나누거나 치우든지, 아니면 다른 물건을 정리해 새 그릇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요. 이제는 큰 그릇은 좀 참고 손바닥만 한 종지를 사는 등 신경을 좀 쓰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 그릇을 발견했을 때 그걸 사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참아요?” 그의 반문 속에서 추측되는 성향, 취향, 지향이 나의 것과 완벽하게 동기화됐기 때문에 마음을 내려놓고 이야기판을 벌였다.
어려서부터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릇을 좋아하게 됐다는 이야기, 갖고 있는 그릇을 브랜드별·크기별로 구분해 개수, 구매처까지 엑셀 프로그램으로 정리한 ‘우리 집 그릇 리스트’를 보유하고 있으며, 작성할 땐 ‘내가 이걸 왜 시작했지?’, ‘나 강박증인가?’ 잠시 흔들렸지만 다 만든 후엔 삶의 한 부분을 착실하게 정돈했다는 만족감이 밀려왔다는 얘기 등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지나갔다. 내려준 차와 꺼내준 음료를 다 마셨지만 본론은 이제부터다. “이제 여행 얘기를 해주세요. 그릇이 주인공인 여정이요.”
책에서 그는 이런 꿈을 밝혔다.

“큰 지도를 펴 들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그릇을 찾아가는 도자기 여행길을 상상하다 보니 한 번 떠나갔다가는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긴 여정이 그려졌다.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런 그릇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영원히 길 위를 떠돌아도 좋을 것 같긴 하다.”

진짜일까? 잠시 품은 의심이 무색하게 온갖 여행 이야기가 펼쳐졌다. “즐겨 찾는 그릇 여행지는 역시 일본이에요. 특히 가나자와, 교토처럼 공예가 발달한 도시는 그릇의 질과 모양새도 좋거든요. 미식이 발달한 도시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는 좋은 그릇에 자신이 만든 것을 담거든요. 저는 여행지에서 음식점을 찾을 때 사진 속에 보이는 그릇과 담음새를 선택 기준으로 삼기도 해요.”
스웨덴의 로스트란드, 덴마크의 로얄코펜하겐, 노르웨이의 피기오에서 출발해 독일의 마이센, 오스트리아의 아우가르텐을 지나 이탈리아의 지노리, 영국의 웨지우드, 러시아의 임페리얼포슬린, 헝가리의 헤렌드, 미국의 레녹스, 일본의 노리다케, 태국의 벤자롱 등 전 세계 각 나라의 ‘국가대표’ 그릇 브랜드를 술술 읊는 그의 박학함에도 반했지만 더 좋았던 건 그릇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릇은 제 삶과 일상을 윤택하게 해주는 오브제예요. 모셔놓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예술품. 남편, 친구들과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게 해주고 현재에 충실할 수 있도록 북돋워주는 매개이기도 하고요.” 각양각색의 그릇 중 마음에 닿는 것을 골라 밥 한 끼 잘 차려 먹고, 좋아하는 잔에 차나 커피를 마시는 일은 우리 몸과 마음에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그릇이 그 이로운 행위를 부추기는 고안물이라는 사실을 김은령 작가와의 대화에서 새삼 깨달았다.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자꾸만 하던 일을 멈추고 장에서 컵과 그릇을 들었다 놨다, 꺼냈다 넣었다 했다. 찍을 만한 예쁜 것을 보여주는 건가, 하고 살피면 기자와 사진가가 목을 축이고 당을 채울 음료와 과자, 과일을 담아 한쪽에 두고는 명랑한 목소리로 “먹고 하라”고 채근했다. 그때는 정신없어서 지나친 그 마음을 돌아와서 그가 쓴 책의 마지막 챕터를 보고 뒤늦게 알아차렸다.

“사는 모습과 살고 싶은 모습도 다르고, 갖고 있는 그릇의 모양이나 개수도 다르겠지만 그릇을 꺼내 쓰며 그 안에 담는 것은 비슷하다.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 오랫동안 일상을 함께해온 그릇을 꺼내 음식을 담을 때면 이런 마음을 함께 꾹꾹 눌러 담는다.”

‘다정함을 꾹꾹 눌러 담을 수 있는 것.’ 내일부터 내 집 부엌 장 안 그릇, 또 곧 거기에 입성하게 될 온 세상의 그릇들은 나의 편지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