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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ffrey Bawa
‘모던’ 스리랑카의 정체성
갈레의 해안가에 면한 제트윙 라이트하우스(Jetwing Lighthouse)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 이곳이 ‘트로피컬 모더니즘’ 건축의 대부, 제프리 바와의 역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지만 아름다운 건축물을 둘러보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새벽부터 얄라국립공원에서 뒤집어쓴 흙먼지와 인중에 밴 야생 짐승 냄새를 빨리 털어내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열쇠를 받아 들고 객실 안으로 들어서니 야자수 한 그루와 드넓은 인도양을 완벽하게 담은 창이 단박에 눈을 낚아챈다. 욕조에 물을 받으며 홀린 듯이 창가 앞으로 가 앉았다. 이런 황홀한 풍경 앞에선 본능적으로 ‘다시는 누리기 힘든 호사’라는 걸 알아차린다. 반신욕 중에도, 젖은 머리를 말리며 맥주로 목을 축일 때도, 엉망진창이 된 트렁크를 정리하면서도 내 시선은 끊임없이 창으로 향했다. ‘방’이라고 불리 는 실내에서 망망한 바다 앞 포말이 부서지는 암벽 위에 선 기분,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는 기분을 느끼는 경험이 바로 제프리 바와 건축 철학의 핵심이라는 것은, 실은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게된 사실이다.
건축계에선 이런 공간과 경험을 ‘트로피컬 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스리랑카의 전통 양식에 서구 모더니즘이 더해져 조화를 이룬 건축’이 이 사조의 정의지만 제프리 바와가 창조한 공간들의 진가는 이 지루하고 평범한 단어들의 나열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가 하와이안 건축 양식의 정체성을 만든 블라디미르 오시포프(Vladimir Ossipoff)를 비롯해 전 세계의 수많은 건축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까닭은 건축과 자연을 연결하는 독창적인 방식 때문이다. 제프리 바와, 프랭크 게리에게 사사한 미국의 건축가 게르하르트 W. 메이어(Gerhard W. Mayer)는 2023년 8월 한 매체에 기고한 칼럼에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바와는 나무, 바위, 수로 그리고 풍광과 같은 자연 요소를 건축의 형태에 고스란히 반영시켰습니다.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동시에 자연을 확장하는 디자인이었죠. 그는 훌륭한 주변 환경과 부지 등의 조건을 갖춘 대지를 그저 점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건축을 통해 그 장소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건축가가 통상적으로 ‘장애물’로 여기는 요소인 경사진 땅, 바위, 고목 같은 것을 자신이 만든 디자인의 방점으로 삼은 바와의 건축물은 스리랑카 전역, 이방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퍼져 있다. 갈레의 제트윙 라이트하우스, 담불라의 칸달라마 호텔(Kandalama Hotel)은 각각 바다, 열대숲이라는 자연과 경계 없이 어우러진 바와 건축의 백미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다. 공간 어디에서나 해와 달의 빛이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길과 벽, 복도 사이엔 (길게는) 수백 년 전부터 뿌리를 내린 거대한 나무가 마치 가구나 오브제처럼 천연덕스럽게 자리하고 있으며 안과 밖이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바와의 건축은 웅장함과 우아함, 그리고 단순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어떤 건축물이든 자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죠. 바와가 만든 공간 안에 있으면 늘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1980년대에 그의 건축 사무소에서 동료로 함께 일한 메이어의 말이다. 바와의 세계를 논할 때 많은 자료에서 그가 38 세에 건축가가 되기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읊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제프리 바와가 남긴 건축 유산에서 어김없이 만나는 예술작품과 수집품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공간에 로컬 아티스트와 공예가의 작품을 늘 포함시켰다. 스리랑카의 역사를 역동적으로 표현한 조각품, 장인이 만든 바틱과 전통 도자기, 지역 화가들의 다채로운 회화는 바와의 공간에 스리랑카의 정체성을 더 깊고 진하게 입힌다. 단순하며 고전적이고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바와의 취향은 그의 주말 별장이었던 ‘루누강가(Lunuganga)’와 지금은 박물관이 된 ‘제프리 바와 레지던스(Geoffrey Bawa Residence)’, 그리고 사무실로 사용했던 ‘더 갤러리 카페(The Gallery Café)’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제프리 바와의 유산을 만나고 싶다면
제트윙 라이트하우스
남부의 항구도시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갈레에 자리한 호텔. 입구에 들어서면 바와의 친구이자 조각가 라키 세나나야케(Laki Senanayake)가 17세기 스리랑카를 침략한 포르투갈 함대와 싱할라 군대의 전투를 표현한 거대한 조각품이 시선을 압도한다. 암벽이 만든 경사 지대를 고스란히 살려 지은 독특한 조형미, 연청색 물빛을 가진 바다, 거친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파도의 냄새와 소리를 지척에서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창과 발코니가 백미다.
주소 433 A, Dadella, Galle
웹사이트 www.jetwinghotels.com/jetwinglighthouse
루누강가
제프리 바와의 첫 작품이자 건축 실험실. 벤토타 외곽 지역의 고무농장 부지에 건축물을 여러 채 짓고 50여 년에 걸쳐 가꾼 공간이다. 흑과 백, 토속적인 예술작품, 정원 등 바와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집약된 곳. 하루 세 차례 진행하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 안쪽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으며 일부 공간은 숙박 시설로 운영된다.
주소 Dedduwa, Bentota 80500
웹사이트 geoffreybawa.com/lunuganga
더 갤러리 카페
1961년부터 1989년까지 제프리 바와가 건축 사무소로 쓰던 곳. 지금은 스리랑카의 예술가이자 파라다이스 로드 그룹의 회장 샨스 페르난도(Shanth Fernando)가 바와의 유산을 지키며 갤러리, 아트숍, 레스토랑과 카페로 운영 중이다. 수많은 도면이 탄생한 바와의 작업 책상, 안뜰의 도자기와 조각, 이끼로 뒤덮인 고목과 콘크리트 벽 등 건축가가 머물던 시절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주소 2 AlfredHouseRd, Colombo
웹사이트 www.paradiseroad.lk
제프리 바와 레지던스
1958년 바와가 바가텔 33번가 길 끝자락에 있는 네 채의 집 중 세 번째 집을 구입한 것이 이 집이 가진 역사의 시작이다. 그는 거실, 침실, 부엌 등이 있는 작은 아파트로 개조했고, 훗날 네 채의 집을 모두 사서 식당, 거실, 집무실 등 필요한 공간을 증축하며 현재의 구조로 만들었다. 직접 디자인한 조명, 가구, 수집품, 생전 아꼈던 빈 티지 자동차 등이 원래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개의 침실을 갖춘 스위트룸은 숙박을 원하는 투숙객에게 열려 있다.
주소 11, 33rd Lane, Bagatalle Rd, Colombo
웹사이트 geoffreybawa.com/stay (숙박 예약 및 안내)
Buddhism
나라를 지키는 힘, 불교
스리랑카 취재 마지막 날. 숙소 근처에서 로컬 차 브랜드 도매 상점을 찾아냈다. 바쁜 시간을 쪼개 겨우 갔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차 가게가 있는 거대한 쇼핑몰이 통째로 말이다. “오늘 일요일이잖아요.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이죠?” 가이드에게 항변하자 돌아온 대답. “아, 오늘 포야 데이(Poya Day)라서 그래요.” 스리랑카에선 포야 데이, 즉 보름달 뜨는 날에 일상이 멈춘다. 관공서, 대기업, 학교부터 가게까지 전부 문을 닫는다. ‘불교’를 제목으로 쓰고 뜬금없이 보름달 운운하는 까닭을 이제 밝히겠다. 인구의 70%에 육박하는 스리랑카 불교인에게 포야 데이는 상서로운 날, 그래서 절에 가는 날이다. 살생, 간음, 도둑질, 거짓말, 음주 등을 금하는 불교의 계율 ‘판 실(Pan Sil)’을 지키며(지키려고 노력하며) 사는 스리랑카 사람들은 포야 데이엔 더 엄격하게 절제하며 하루를 보낸다. “가무를 즐기지 않고, 먹는 것을 절제하며 높은 자리에 앉거나 눕지 않는다”는 내 용의 계율 ‘아타실(Ata Sil)’을 수행하기 위해서. 스리랑칸의 이런 삶은 사실 포야 데이가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흰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무리, 연꽃을 손에 들고 맨발로 절 안에 들어가는 모습,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법문, 불상과 불탑 앞에 몰린 머리 위로 합장한 손들, 절 곳곳에서 천천히 걷거나 가만히 앉아 명상하는 사람들. 포야 데이를 설명하는 글에서 “한 달에 한 번, 모든 일상을 제쳐 두고 육체의 욕구를 거스르며 부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자아성찰을 한다”는 내용을 봤을 때 ‘옛날에나 그랬겠지’ 했던 나의 냉소를 참회했다.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개인의 삶을 이끄는 지향이자 기준을 넘어 국가의 정체성 그 자체다. 이 나라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 무수한 근거가 있다. 인도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드라가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한 기원전 3세기부터 영국의 침략으로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약 2천300여 년 동안 불교사는 곧 왕조의 역사였다. 국가 창건부터 식민지 시대를 지나 오늘날까지 스리랑카는 18번의 전쟁과 카스트, 민족, 종교로 인한 갈 등, 천재지변 등으로 무수한 위기를 겪었다. 그때마다 승려들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변화를 주도했다.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는 불교부흥운동, 근대부터 현재까지 지방을 중심으로 복지, 난민, 인권, 여성, 경 제 개발 등의 분야에서 스리랑카의 정신과 경제를 재건하는 운동인 사르보다야(Sarvodaya 산스크리트어로 ‘모두의 일어남’이라는 뜻) 평화운동 등이 기복 신앙 이상으로 자리 잡은 불교의 힘과 영향력을 보여준다. 사르보다야가 정의하는 ‘개발’은 경제적 부흥보단 ‘인간이 정신적으로 깨우쳐 나가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빈곤도, 풍요도 없는 사회. 그 이념의 구체적인 실천은 예를 들면 이런 모습이다. 깨끗한 물과 소박한 식사, 평상복 두 벌과 외출복을 포함한 6벌의 의복, 간소한 주거 공간과 청결한 수건, 탁상보 등을 갖추고 생활의 규율을 바르게 하는 삶. 불교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품은 이 지향은 이 나라 사람들이 닿고자 하는 삶을 관통한다. 스리랑카가 어떤 나라인지 알고 싶다면 절에 가자. 누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지, 어떤 것을 이뤘는지 일절 드러나지 않는 새하얀 옷, 사원 앞 에서 소박한 꽃다발을 사 들고 겸허한 맨발로 부처상 사이를 배회하는 이들의 얼굴에 답이 있다.
부처의 평안에 머물고 싶다면
스리마하 보디 사원 Jaya Sri Maha Bodhi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나무, 인도 보드 가야 보리수의 가지를 심어 자란 ‘스리마하 보리수’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붓다’로 여겨진다. 이 나무 아래 서있고 싶다면 스리랑카 불교의 발원지 아누라다푸라로 향 하자. 수령 2천여 년에 육박하는 신성한 나무의 기운을 듬뿍 받은 후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불탑, 루완웰리세야 대탑의 거대한 위용을 느껴볼 것. 높이 103m, 둘레 290m에 달하는 규모로 스리랑카 사람들에겐 일생에 한 번쯤 가고 싶은 성지다.
주소 Maha Viharaya, BomaluwaTemple, Anuradhapura
웹사이트 www.srimahabodhi.lk
담불라 황금 사원 Golden Temple of Dambulla
불교도의 성지 순례지로 이름 높은 스리랑카에서 담불라 황금 사원은 빼놓을 수 없는 목적지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은 암벽의 속을 파내 만든 석굴. 안으로 들어서면 157개의 불 상과 신상 그리고 넓이 2100㎡에 이르는 면적에 붓다의 삶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시선을 압도한다. 담불라 황금 사원이 위치한 마탈레 지역의 승원, 사리탑, 보리수 사원과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인 마을도 함께 방문해보자.
주소 Dambulla Rajama Viharaya, Dambulla
Ayurveda
스리랑칸 웰니스
아유르베다의 본진은 인도, 그중에서도 허브와 향신료의 산지, 케랄라가 유명하다. 몇 년 전 그곳에서 아유르베다 첫 경험을 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야외 욕탕에 멀뚱히 서 있으면 테라피스트가 와서 몸을 구석구석 씻겨준다. 이후 침대에 누우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좋은 향이 나는’ 기름을 도포한다. 두피의 진피까지 깊숙이 스며든 그 기름기가 다 사라지기까지 약 한 달 정도 걸린 기억이 난다. 스리랑카에 가기 전, 이것(굉장히 난감하고 특이한 마사지)이 내가 아는 아유르베다의 전부였다. 아유르베다는 삶을 뜻하는 ‘아유르(Aryu)’와 과학을 의미하는 ‘베다(Veda)’를 합친 말이다. ‘건강한 삶을 사는 과학, 삶의 지식’으로 통용된다. 디지털 중독과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현대인이 구원으로 여기는 웰니스의 핵심이 바로 고대 의학인 아유르베다에 있다. 스리랑카와 인도에선 그 흐름을 영민하게 캐치해 ‘전통 치료법’ 대신 ‘일상과 삶을 건강하게 가꾸는 라이프스타일’로 접근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에선 이 변화에 ‘아유르베다 2.0’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보건부 산하에 아유 르베다부(Department of Ayurveda)까지 두고 아유르베다 의학을 장려· 규제·보존하는 정부 기관까지 만든 스리랑카에서 아유르베다 경험을 놓치지 말자. 정통을 원한다면 공식 의사면허증을 보유한 전문의인 ‘파람 파리카 웨다’가 상주하는 아유르베다 리조트를 찾아가면 된다. 이런 곳에선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무려 한 달 동안 심장, 관절, 간, 뇌, 피부 등 집중 치료가 필요한 신체 부위의 자연 치유력과 몸, 마음, 영성의 힘을 향상시키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로컬 아유르베다 브랜드는 캐주얼한 접근의 통로다. 고대 실론 왕국 왕실의 ‘웰빙 리추얼’을 표방하는 뷰티 브랜드 스파 실론(Spa Ceylon), 아유르베다 의약품과 생활용품 등을 만드는 싯달레파(Siddhalepa)가 현지인과 여행자 모두에게 인기가 높다.
아유르베다의 치유를 경험하고 싶다면
제트윙 아유르베다 파빌리온
전통적인 아유르베다 치료에 집중하는 리조트. 배출, 정화, 관장, 사혈 등을 포함하는 다섯 가지 치료 요법으로 정화·해독 트리트먼트인 판차카 르마(Panchakarma)를 비롯해 스트레스 해소, 피부와 몸의 활력을 불어넣는 푸르바카르마(Purvakarma), 치료 후 소화 및 흡수 능력을 회복시키는 아유르베딕 식단을 제공하는 파스차트카르마(Paschatkarma) 등의 코스를 갖췄다.
주소 Porutota Road, Ethukale, Negombo
웹사이트 www.jetwinghotels.com/jetwingayurvedapavili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