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의 단골 - 나를 만나는 자연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RYU JIN
  • PHOTOGRAPHY BY CHO SooMIN

도민의 단골 – 나를 만나는 자연

Island Favorites - Calm

관광객이 성산일출봉을 보고 차 박물관에 들렀다가 흑돼지 식당에 갈 때 사는 사람은 어디에서 쉬고, 놀고, 먹을까? 단조로운 섬살이에 솔깃한 즐거움을 주는 도민의 단골 공간을 추렸다.
  • written by RYU JIN
  • PHOTOGRAPHY BY CHO SooMIN
2025년 09월 01일

곽지해수욕장

제주도엔 해수욕장이 12개뿐이다. ‘로컬만 아는’ ‘비밀스러운’과 같은 수식어를 붙일 만한 해수욕장을 찾기 힘들다는 얘기다. 애월읍 곽지리에 자리한 곽지해수욕장은 긴 모래사장과 ‘아이 바당’이 있어 몸을 사리며 안락하게 물놀이를 즐기고 싶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 ‘아이가 놀아도 되는 바다’를 뜻하는 아이 바당은 모래밭과 해수가 만나는 면에 형성된 크고 작은 웅덩이를 가리킨다. 자연이 빚은 욕조처럼 아늑한 이 웅덩이에 파도가 쉴 새 없이 들고 나며 새 물을 채우는 장면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간다. 세찬 물살과 파도가 버거운 사람은 여기에 발 혹은 반신을 담고 더위를 식히면 그만이다. 곽지해수욕장이 도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백사장 끝자락에 자리한 과물노천탕이다. 한라산 북서 사면에서 흘러내려 온 지하 용천수가 곽지 해안 암반층으로 솟아올라 형성된 샘으로 지금은 공공 야외 목욕탕으로 쓰인다. 해수와 섞이지 않은 이 천연 담수는 해수욕 후 소금기에 전 몸을 씻기에 제격이다. 15~17℃를 유지하는 차가운 용천수에 들어갔다 나오면 피가 돌고 뇌가 맑아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주소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엉알해안

아시아인 최초로 NASA 우주 생물학 그룹과 함께 지구를 탐사한 과학 탐험가 문경수는 엉알해안을 품은 수월봉 지질 트레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제주도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사라진다면 80억 인류가 영원히 볼 수 없는 화산 지형과 지질이 생기게 됩니다. 그게 바로 수월봉과 엉알해안의 지질 트레일이죠.” 자구내마을에서 차로 10분 안팎이면 닿는 엉알해안은 1만8000여 년 전 지하에서 상승하던 마그마가 차가운 해수와 만나 분출하며 생긴 수성 화산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곳. 이 위에서 화산탄이 쿠키 속 초콜릿처럼 콕콕 박힌 화산쇄설암층, 각기 다른 형질의 화산석이 밀푀유처럼 촘촘히 쌓인 지층, 화산 분출물이 모래 폭풍처럼 뒤엉켜 지표면 위로 빠르게 흘러가다 굳은 화쇄난류 등이 화산학 박물관처럼 펼쳐진다. 엉알해안의 또 다른 매력은 지구에 혼자 남아 망망대해와 독대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 포장된 길을 벗어나 파도가 표면을 둥글게 깎은 돌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인간의 흔적은 사라지고 흑두루미, 말똥게 같은 생명체들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주소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671-1

동너븐덕

동너븐덕은 지도 앱의 검색창에 입력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공식 지명도 아니고, 주소도 없다. 다녀왔던 이들이 남긴 블로그 글엔 “올레길 7코스의 한 구간인 외돌개에서 황우지해안 방향으로 혹은 황우지해안에서 외돌개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고 써 있지만 초행인 사람, 방향 감각이 무딘 사람에겐 수수께끼로 느껴질 수 있다. 쉽게 찾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이정표가 확실한 외돌개로 찾아가자. 파도의 기세를 누르고 장군처럼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외돌개의 기개를 마주 보다가 왼쪽으로 몸을 틀어 오솔길을 따라가면 된다. 해송 사이로 슬그머니 보였던 바다가 갑자기 시원하게 드러나고 운동장만 한 너른 언덕이 펼쳐지는데, 거기가 동너븐덕이다. 동너븐덕은 ‘동쪽의 넓은 언덕’이란 뜻. 현지인에겐 ‘폭풍의 언덕’으로 더 유명하다. 돌밭을 지나 언덕 끝자락으로 가면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곳의 절정은 해 질 녘이다. 도시에선 쉽게 볼 수 없는 농도 짙은 붉은 파장이 온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인다. 동너븐덕을 추천해준 사진가는 “세상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그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고 귀띔하며 “나만 알고 싶지만 내어주는 정보”라고 끝내 미련을 보였다.
주소 서귀포시 서홍동 791 (외돌개)

고내봉

한라산을 비롯해 온갖 쟁쟁한 오름이 포진한 제주도에서 고내봉은 여행자의 지도에 잘 나타나지 않는 이름이다. 관광 명소가 딱히 없는 애월읍 고내리에 위치한 오름으로 해발고도 약 175m, 실제 고도 135m 높이의 원추형 측화산이다. 정상까지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코스가 쉽고 짧아 애월 권역의 동네 주민 사이에선 운동 삼아 오르는 뒷동산 운동터로 사랑받는다. ‘고려·조선 시대의 봉수대가 있던 터’라는 역사적 사실엔 관심이 없겠지만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에 대해 듣는다면 들르고 싶어질 것이다. 약 15~20분의 짧은 산책으로 닿을 수 있는 꼭대기에 서면 애월항과 옥빛 바다, 한라산과 제주 서부의 전경이 파노라마로 담긴다. 해 뜰 무렵 찾으면 사슴이 종종 출현하고, 해 질 무렵엔 노을이 장관을 이룬다. 벚나무가 꽤 있어 봄철에 호젓이 꽃놀이를 즐기기에도 좋다.
주소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산3-1

소정방폭포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제주가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을 때 정방폭포 옆 소정방폭포의 인기도 하늘을 찔렀다. 이곳을 추천해준 여행 작가는 “새 명소와 어트랙션의 인기에 밀려 지금은 찾는 이가 전보다 뜸해 호젓하게 누릴 수 있는 기회”라고 귀띔한다. 정방폭포에서 동쪽으로 약 300m,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겨울 별장이라는 과거로 유명한 허니문하우스 근처에 자리한 소정방폭포는 우리나라에서 단 두 곳뿐인 ‘바다로 낙하하는 폭포’ 중 하나. 높이 7m, 폭 3m로 규모는 작지만 그래서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백 가지 곡식의 씨앗이 준비된다”는 뜻의 여름 절기, 백중날 제주도민들은 앞다퉈 소정방폭포로 모인다. 이날 소정방폭포 아래에서 차가운 물을 맞으면 1년 내내 무사 건강하다는 믿음이 전통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여벌의 옷이 있거나 금세 마르는 옷을 입었다면 차갑고 맑은 폭포수에 정수리와 어깨를 내맡겨보길 추천한다. 물아일체의 순간이 따로 없다.
주소 서귀포시 토평동

머체왓숲길

머체는 돌, 왓은 밭을 뜻한다. 그냥 돌이 아니라 마그마가 지하에서 굳어진 돌무더기다. 남원읍에 자리한 머체왓숲길 안에 들어서면 이런 이름이 붙은 까닭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화성암을 그악스럽게 거머쥔 채 자란 나무가 운집한 원시림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숲 안엔 세 개의 트레킹 코스가 있다. 2시간 30분가량 걸리는 6.7km의 머체왓숲길 트레킹 코스, 2시간 안에 둘러볼 수 있는 6.3km 소롱콧길 코스, 한나절은 족히 걸리는 서중천 트레킹 코스가 산책자의 선택을 기다린다. 셋 중 제주에 사는 작가가 ‘종종 찾는다’고 추천한 코스는 소롱콧길. 소롱콧은 제주 방언으로 ‘작은 용’을 뜻하는데, 구불구불 이어지는 숲길의 형세가 용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말을 방목하는 초원의 땡볕 구간을 조금만 걸어가면 삼나무 숲의 서늘한 그늘이 달궈진 정수리를 식혀준다.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진한 풀내를 맡으며 서중천 계곡의 물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걷다 보면 숲이 나고 내가 숲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주소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고산포구

제주도민에게 좋아하는 자연의 지명,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을 때 어떤 이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부여한 지번이 없어서. 제주시 한경면에 위치한 제주해양경찰서에서 남쪽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차귀도 방향으로 나 있는 방파제가 하나 보인다. “그걸 우리끼린 고산포구라고 불러요. 거기에 서면 차귀도와 와도가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여서 서쪽 해안 도로를 드라이브할 때 종종 들르곤 해요.” 제주 로컬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김명연 작가의 말이다. 제주시에선 요즘 고산리를 신석기시대의 석기 9만9000여 점이 출토된 ‘한국 최초의 신석기 유적 출현지’로 밀고 있지만 원래는 차귀도로 건너가는 배를 타는 항구가 있는 자구내마을로 더 유명했다. 천연기념물 제422호로 지정된 차귀도는 제주도의 무인도 중 가장 큰 섬으로 수면 아래로는 연산호류와 아열대 어종까지 포함하는 50여 종의 풍부한 어족이, 위로는 82종의 진귀한 식물이 자라 자연적 가치가 높다. 로컬들은 고산포구, 고산항 등으로 부르는 이름 없는 방파제에서 ‘물멍’과 ‘섬멍’을 즐기다가 모험심이 일면 차귀도행 잠수함이나 유람선에 몸을 실어볼 것. 늦봄부터 여름까진 마을 주민들이 빨랫줄에 화살오징어를 매다는 모습, 해풍에 춤추는 화살오징어 무리가 만드는 진풍경도 어촌의 운치를 더한다.
주소 제주시 한경면 고산1리

샛도리물

제주 사람의 다수는 바다에서 더운 몸을 식히지 않는다. 빗물이 화산암을 통과하며 정화된 맑고 깨끗한 물, 용천수로 채운 풀장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토박이들은 이를 살아 샘솟는 물, 산에서 나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산물’로 부른다. 제주시 삼양동 삼양해수욕장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샛도리물은 섬에서 가장 유명한 산물 중 하나. 재앙, 액운을 상징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새’와 ‘쫓다’라는 뜻을 가진 제주 방언 ‘도리’가 합쳐져 이름이 된 건 과거에 액운을 몰아내고 잡귀를 쫓는 굿에 이 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샛도리물엔 미네랄이 풍부한 담수에 입은 옷 그대로 풍덩 들어가는 동네 주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 맑고 깨끗한 물에서 아이들은 친구들과 다이빙을, 할망들은 혈액순환과 꿀잠을 위한 냉수욕을 즐기며 각자의 방식으로 계절을 난다. 섬 사람처럼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면 수영복을 갖춰 입는 대신 젖어도 괜찮은 옷을 입고 해 질 무렵 주변을 가볍게 뛰다가 땀을 식히러 들어가볼 것. 제주에서 러닝 클럽을 운영하는 달리기 선수가 알려준 ‘샛도리물 달콤하게 즐기는 법’이다.
주소 제주시 삼양일동 19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