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품는 기대는 딱 한 가지다. 이곳은 어떤 맛을 품고 있을까. 멕시코의 심장 멕시코시티엔 여러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 고대 아즈텍 문명이 피어난 호수 위의 수도, 스페인의 정복과 독립, 혁명의 흔적들이 겹겹이 쌓아 올려진 공간 등이다. 역사와 문화가 중첩될수록 맛도 흥미롭고 다양해지는 법. 비행기 창 너머 대지 위에 바둑판처럼 끝없이 펼쳐진 낮은 건물들을 내려다보면서 군침을 삼키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하며 혼자 피식 웃어본다.


2 메데인 시장에서 만나는 멕시코시티의 일상.
역사 지구에선 타코를
서울에 온 외국인들이 한국적인 분위기를 찾아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광화문 일대를 방문하는 것처럼, 멕시코시티에 온 이들은 부나방처럼 역사 지구(Historic Center)의 소칼로(Zócalo) 광장에 자연스럽게 모인다. 메트로폴리탄 대성당과 대통령궁을 마주한 널찍한 광장에 서 있으면 묘한 공간감에 압도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신전과 성이 있던 자리는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무너졌고, 건물의 파편들은 광장의 기반석이 됐다. 광장을 중심으로 스페인이 이식됐고, 19세기 멕시코의 독립 또한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광장의 기둥 위에 펄럭이는 거대한 멕시코 국기는 이곳이 역사의 증인이자 역사를 만든 공간임을 나지막이 외친다.
광장에서 역사의 기운을 느꼈다면 이제 무언가 먹어야 할 시간이다. 소칼로 광장의 서쪽으로 걸으면 마치 우리나라의 명동 거리 같은 번화가가 나온다. 즐비한 글로벌 브랜드 쇼핑몰들 사이사이와 거리 뒤편에선 멕시코시티가 자랑하는 음식 유산을 만날 수 있다. 멕시코 근현대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들이 즐겨 찾던 레스토랑과 카페를 찾는 것도 좋지만 멕시코 하면 역시 타코. 과거 아즈텍인들이 재배하던 옥수수와 콩, 칠레 고추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전한 향신료, 가축, 조리법이 더해져 식민지 시대만의 독특한 혼종 음식이 탄생했는데 대표적인 게 바로 타코다. 지역마다 자랑하는 타코가 있는데 멕시코시티에서는 유난히 알 파스토르 타코(taco al pastor)가 사랑받는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중동의 케밥이 멕시코식으로 변형된 음식이다. 중동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쌓아 올린 후 천천히 구워 만든 알 파스토르 타코는 여러 문화가 혼합된 멕시코를 닮았다. 아즈텍의 유산이자 멕시코인들의 쌀밥과도 같은 옥수수 토르티야에 중동식으로 구운 고기, 파인애플, 양파, 그리고 새콤 매콤한 살사 소스를 곁들이면 간편한 간식이자 끼니가 된다. 어느 도시마다 수많은 도시인의 배를 채워주는 음식이 있다. 고기는 언제나 가진 자의 몫이지만 내장을 비롯한 각종 부산물은 고단한 노동자와 서민의 몫이다. 음식의 세계에서 결핍은 대개 창의적인 결과물로 이어진다. 소 내장으로 만든 타코 데 트리파(tacos de tripa)와 소 혀를 삶아 만드는 타코 데 렝과(tacos de lengua), 돼지 귀로 만든 타코 데 오레아(tacos de oreja), 돼지 코와 주둥이를 이용한 타코 데 트롬파(tacos de trompa), 돼지 내장을 쓰는 타코 데 부체(tacos de buche) 등 부속 부위를 삶거나 튀기는 방식으로 조리해 다채로운 식감과 맛을 낸 길거리 타코를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것도 멕시코시티 역사 지구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재미 중 하나다.


2 넷플릭스 <셰프의 테이블>에 소개된 ‘마살라 이 마이스(Masala y Maíz)’의 홍합 요리.
모던 멕시코의 맛이 궁금하다면, 로마 지구
소칼로 광장에서 택시를 타고 서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역사 지구의 고풍스러운 건물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양식으로 지은 옛 저택들 사이로 화려한 벽화와 녹색의 싱그러운 식물, 멕시코만의 원색적인 색감을 보여주는 벽과 개성 넘치는 대문이 이방인을 반긴다.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의 역사 지구가 멕시코시티의 옛 정취를 보여준다고 하면 로마 지구는 멕시코시티의 현대적이면서 세련된 면모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시끌벅적한 관광지라기보다는 여유 있는 멕시코 중산층이 시간을 보내는 멋스러운 쉼표가 있는 공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풍 저택이 들어서며 부티크 거리로 발전했고, 근래에는 예술가·디자이너·스타트업 종사자 등이 몰려들어 힙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거리 곳곳에 카페·갤러리·바가 뒤섞인 풍경, 젊고 역동적인 요리를 선보이는 모던한 레스토랑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아침을 기분 좋게 열고 싶다면 끝내주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알마네그라 카페(Almanegra Café)나 부나(Buna)와 같은 스페셜티 커피 카페를, 커피와 빵을 함께 즐기려면 멕시코 스타일의 모던한 빵을 만드는 파나데리아 로제타(Panadería Rosetta)를 찾는 것이 좋은 선택지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멕시코시티지만 바닷가 못지않은 해산물 요리로도 빠지지 않는다.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은 가브리엘 카마 셰프의 콘트라마르(Contramar)에서 잘 정돈된 모던 멕시칸 시푸드를 맛볼 수도 있고, 좀 더 캐주얼하고 힙한 분위기인 미 콤파 차바 마리스케리아(Mi Compa Chava Marisquería)에서 감각적인 해산물 요리에 시원한 맥주와 칵테일을 곁들일 수도 있다. 부른 배를 토닥거리며 로마 지구 곳곳에 있는 식물로 가득한 작은 공원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하다 보면 금세 또 배가 꺼지며 맛있어 보이는 곳이 눈에 들어온다. 로마 지구에서 조금만 걷거나 택시를 타고 멕시코 공원(Parque México)을 지나면 요즘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핫한 식당인 몰리노 엘 푸홀(Molino el Pujol)과 마이차호(Maizajo)를 만나볼 수도 있다. 몰리노 엘 푸홀은 미슐랭 별 세 개를 받은 명실공히 멕시코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푸홀(Pujol)의 캐주얼 자매 레스토랑이며, 마이차호는 길거리 타코를 단지 외형뿐 아니라 분위기까지 가장 성공적으로 모던하게 풀어낸 젊은 식당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처 방문하지 못한 로마 지구의 멋스러운 공간들은 멕시코시티를 다시 한번 방문하게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듯하다.


2 프리다 칼로의 생가이자 박물관 내부. 푸른 페인트로 칠해 ‘파란 집’이란 뜻의 카사 아줄이라고도 부른다.
도심 속 도시, 코요아칸의 맛
역사 지구와 로마 지구에서 눈과 배를 충분히 호강시켰다면 코요아칸으로 발걸음을 옮길 차례다. 멕시코의 영원한 뮤즈, 프리다 칼로의 생가로 유명한 동네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불편한 몸으로 예술혼을 펼치던 프리다 칼로의 흔적을 그가 살던 ‘파란 집(La Casa Azul)’에서 엿볼 수 있어 대개 프리다 칼로 박물관에 잠깐 들르고 마는 코스지만, 코요아칸은 그러기엔 아쉬울 정도로 꽤 많은 매력을 품은 동네다. 로마 지구에서 택시로 20분가량 걸리는,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지만 마치 굉장히 먼 곳에 위치한 지역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경이 색다르다. 호젓하면서 따뜻한 20세기 초 멕시코 풍경을 간직한 코요아칸은 아즈텍의 나우아틀(náhuatl)어로 ‘코요테가 사는 땅’이란 뜻. 길을 걷다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코요테 형상의 조각이나 벽화를 종종 마주치게 된다. 작은 광장 겸 공원, 나지막하면서 원색적인 벽 색깔, 언뜻 보면 스페인의 어느 시골 마을처럼 아기자기하면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 꽃이 만발한 가정집과 작은 카페, 상점들은 이방인을 지치지 않게 하면서도 흥밋거리를 던져준다. 이달고(Hidalgo) 광장과 하르딘 센테나리오(Jardín Centenario) 인근에선 멋지고 세련된 식당들을 만날 수 있는가 하면, 광장 뒷골목에선 타코와 길거리 음식을 파는 정겨운 작은 식당들과 조우할 수 있다. 맛있는 선택지가 아주 많지만 코요아칸 시장(Mercado de Coyoacán)은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이다. 중앙에 마련된 식당가에 앉아서 즉석 타코나 바삭한 토스타다(tostada), 타말레(tamale)에 오르차타 음료나 과일 주스를 곁들이며 현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보면 멕시코가 주는 특별한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달고 광장이 마주 보이는, 1918년에 문을 연 라 푸에르타 델 솔(La Puerta del Sol)의 노상 의자에 앉아 메스칼 한잔을 홀짝이며 상상해본다. 거대한 멕시코시티를 작은 한 마을로 축소시킨다면 어떤 모습일까. 주말마다 광장에서는 예술가들이 공연과 전시를 열고, 평일에는 조용히 작은 마을을 온전히 느끼며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곳. 너무 조용해 심심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번잡스럽지 않은 쉼과 볼거리, 그리고 먹거리가 고루 균형을 이루고 있는 코요아칸 아닐까. 남몰래 내 영혼을 한 조각 두고 와야 한다면, 아마도 코요아칸에 두고 올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