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천사의 위스키를 찾아서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ING&PHOTOGRAPHY BY woo jikyung

스코틀랜드 천사의 위스키를 찾아서

A Whisky Journey Across Scotland

스페이사이드(Speyside)는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의 절반가량이 모여 있는 위스키 산지다. 역사와 철학으로 무장한 증류소들이 모여 있는 그곳엔 나쁜 위스키는 없다. 좋은 위스키와 더 좋은 위스키 그리고 행복한 천사가 살고 있을 뿐.
  • WRITING&PHOTOGRAPHY BY woo jikyung
2026년 03월 09일

행복한 천사가 사는 곳, 크레이겔라키
싱글 몰트 위스키를 좋아한다. 싱글 몰트는 몰팅한 보리를 원료로 하여 ‘단일’ 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로 생산지(로랜드, 하이랜드, 스페이사이드, 아일라, 캠벨타운)에 따라 다른 향과 맛을 선사한다. 그중에서도 스페이사이드 싱글 몰트 위스키는 꽃과 과일 향이 은은하게 감돈다. 어떻게 증류하기에 이토록 향기로울까? 그 호기심이 나를 스페이사이드의 관문, 인버네스로 이끌었다. 여름인데도 인버네스 공항 밖 공기는 마치 냉동실에 넣었다 꺼낸 위스키처럼 차가웠다. 어서 빨리 위스키 여행의 첫 베이스캠프로 예약해둔 더 크레이겔라키 호텔(The Craigellachie Hotel)에 체크인해 위스키를 맛보고 싶었다. 내일은 호텔 맞은편, 주인장이 일본인인 하일랜더 인의 위스키 바에서 새로운 위스키를 맛보아야지.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덜컹. 부푼 마음을 안고 호텔로 운전해 가던 중 렌터카가 갑자기 인도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한국과 위치가 다른 운전석에 적응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덜덜덜. 바퀴에서 나는 소리가 불길했지만 멈출 수도 없는 노릇. 느린 속도로 호텔에 도착해보니 펑크 난 타이어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호텔 데스크에 도움을 청하고,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 피시앤칩스와 맥주를 주문했지만 영 입맛이 없었다. 오늘 타이어를 못 고치면 어쩌지. 내일도 못 고치면? 문득 스코틀랜드 속담이 떠올랐다. “술을 마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우유를 마신다고 나아지는 건 없다.” 맥주를 두 잔 비울 때쯤 ‘24시간 이동식 수리 서비스’라고 쓰인 차가 나타났다. 타이어 2개를 갈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호텔 위스키 바가 문을 닫기 5분 전. 급하게 위스키로 축배를 들었다.

위스키 숙성을 위해 만든 카두의 저장고.
하일랜더 인의 위스키 바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한밤의 구세주처럼 나타난 정비사 덕에 새 타이어로 심폐 소생한 렌터카를 타고 스페이사이드에 있는 카두(Cardhu)와 맥켈란(Macallan) 증류소를 둘러봤다. 카두 증류소에선 매시툰과 워시백, 증류기, 숙성 창고를 차례로 둘러볼 수 있었다. 1811년 창립 당시 옛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숙성 창고에 들어선 순간 바깥과는 다른 공기가 감돌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는데 증류소 투어를 맡은 알리샤가 말했다. “천사의 몫(Angel’s Share) 향이 느껴지나요? 이곳에 스페이사이드에서 가장 행복한 천사가 살고 있어요.” 위스키는 오크 통에 오랜 시간 숙성하여 만드는 술이다. 매년 오크 통에 담긴 위스키의 2%는 증발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사라지는 2%의 위스키를 ‘천사의 몫’이라 부른다. 천사가 홀짝홀짝 마시고 오크 통 속에 남은 위스키는 숙성되며 색과 향이 짙어지는데, 그 과정 중 공기와 만나는 산화작용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맥켈란 증류소는 카두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주차장에서 입구를 향해 걷자 스코틀랜드의 구릉 지형을 형상화한 건물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나무조각을 이어 붙인 지붕과 그 위를 덮은 잔디가 이루는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증류소가 아니라 위스키를 테마로 한 리조트가 펼쳐지는 듯했다.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전시장과 숍을 둘러본 후 2층 맥켈란 바에 앉아 위스키와 칵테일을 맛보았다. 유리창 너머 풍경과 함께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맛이었다. 스페이사이드에서 가장 행복한 천사가 된 기분이었다.

아벨라워 기차역 앞에서 반려견과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스페이강을 따라 증류소 산책, 아벨라워
위스키 브랜드명으로만 알았던 아벨라워(Aberlour)는 게일어로 ‘재잘거리는 개천의 입구’라는 의미를 품은 마을 이름이었다. 스페이사이드라는 지역명의 어원이 된 스페이강과 합류하는 라우라 천이 흐르는 천변에 자리한 아담한 마을 아벨라워. 마침 매시툰(Mash Tune)이라는 위스키 호텔이 있어 이곳에 묵기로 했다. 매시툰이란 이름처럼 보리를 싹 틔워 말린 맥아를 뜨거운 물과 함께 넣는 거대한 당화조 모양의 건물로, 객실을 글렌리벳, 맥켈란, 글렌피딕 등 스페이사이드 지역 증류소 테마로 꾸며 놓아 머무는 내내 위스키에 빠져 지내는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위스키 호텔답게 매시툰에는 1963년에 문을 연 위스키 바가 있는데, 스페이사이드에서 가장 오래된 위스키 바로 알려져 있다. 비록 아침이면 조식당으로 변하긴 해도 매일 저녁 바텐더의 추천을 받아 위스키를 맛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위스키를 맛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바 한쪽에 쓰여 있던 문구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Today’s rain is Tomorrow’s whiskey.” 오늘의 비가 내일의 위스키가 된다고? 사계절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는 날씨 탓을 하지 않고, 빗물이 땅에 스며들어 위스키가 된다니, 오랜 기다림 끝에 위스키를 만들어내는 스코틀랜드 사람다운 마인드 아닌가.
매시툰 호텔 앞은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오솔길로 이어져 산책을 나서기에 좋았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폭신한 잔디밭과 천변이 펼쳐졌다. 졸졸 흐르는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니 왜 아벨라워가 게일어로 재잘거리는 개천의 입구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개천 입구에서 아벨라워 증류소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비록 증류소는 공사 중이라 둘러볼 수 없었지만 방문자 센터에서 위스키 시음은 즐길 수 있었다.

아벨라워 증류소를 둘러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은 인근 글렌알라키 증류소에서 달래기로 했다. 글렌알라키는 50년 경력의 몰트 마스터 디스틸러 빌리 워커가 이끌며 급부상한 증류소다. 빌리 워커는 2017년 글렌알라키를 인수해 2018년 첫 위스키를 출시하기까지 위스키 개발을 위해 16개 창고 안 5만 개가 넘는 캐스크를 샘플링했다고 한다. 글렌알라키 증류소 투어를 맡은 마리아는 증류소의 역사와 위스키 제조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분쇄(Milling), 당화(Mashing), 발효(Fermentation), 증류(Distillation), 숙성(Maturation) 5단계 프로세스를 거쳐 제조하는 틀은 카두 증류소에서 본 것과 같았지만, 조금씩 다른 면모를 살펴볼 수 있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투어이다 보니 몰팅이니 매싱이니 하는 용어가 헷갈리기도 했지만, 워시백(Washback)이라는 커다란 통에서 발효 중인 맥아즙의 냄새를 맡아보고 거대한 주전자 모양 증류기를 보다 보면 어느새 그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맛볼 수 있는 귀한 경험 아닐까. 증류소를 구석구석 둘러본 후 글렌알라키 8년·12년·15년산을 비교 시음했다. 지금까지 마셔본 스페이사이드 위스키와는 또 다른 캐릭터의 위스키 맛이 혀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견과류 향과 캐러멜 향이 코끝을 맴돌면서도 단맛과 짠맛의 조화가 매력적이었다. 새삼 ‘한 업계에서 기술과 경험을 축적한 장인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렌알라키 15년산에 흠뻑 반한 나는 내친김에 한 병 사 들고 증류소를 나섰다. 글렌알라키가 고유한 캐릭터의 위스키를 선보이는 증류소로 오래가길 바라며.

다양한 크기의 캐스크에서 숙성 중인 글렌피딕 위스키.

위스키 라인 옆 더프타운
“기차로 증류소 투어를 해보면 어떨까?” 키스 & 더프타운(The Keith & Dufftown) 역을 지나는 ‘더 위스키 라인(The Whisky Line)’을 발견했을 때 잠시 낭만적인 상상에 빠졌다. 더 위스키 라인은 1862년에 시작해 1991년 이후에 운행을 중단했다가 2000년에 다시 운행을 시작한 관광열차다. 아쉽게도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만 운행하는 탓에 기차로 증류소 투어를 할 순 없었지만, 글렌피딕(Glenfidich) 증류소에 가기 전 기차역에 들러 구경할 순 있었다. 세월이 묻어나는 빈티지 기차가 반가워서 기웃거리는 내게 오렌지색 옷을 입은 기관사가 다가와 “안에 들어가보라”라고 말했다. 열차에 오르자 이번에는 미소 띤 얼굴로 기념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했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다음에 오면 꼭 타겠다고 말하며 발길을 돌렸고 그는 언제 와도 환영이라고 했다.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기관사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위스키 라인 기차역 근처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만드는 글렌피딕 증류소가 있다. 그 비결은 전통적인 방식을 완고하게 지켜가는 고집에 있었다. 글렌피딕 증류소는 1886년 윌리엄 그랜트(William Grant)가 더프타운에 창립한 이래 위스키 제조 공정 중 맥아 제조를 제외한 분쇄, 당화, 발효, 증류, 숙성 과정에서 동일한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초대형 매시툰에서 만든 맥아즙의 물기를 제거한 후 냉각시켜 워시백이라는 발효조에서 발효하는데, 글렌피딕은 위스키의 풍미를 위해 나무로 만든 워시백을 사용한다. 당화 작업자는 각각의 워시백 안에 들어 있는 맥아즙의 온도와 부피, 설탕의 농도를 측정해 일일이 칠판에 기록한다. 이렇게 전통을 이어나가는 고집과 성실한 노고가 시너지를 일으켜 최상의 위스키 풍미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글렌피딕의 증류소에선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워시 스틸과 스피릿 스틸이 한 쌍을 이루는 다른 증류소와 달리 워시 스틸 하나에 스피릿 스틸 둘을 매칭해 증류기 3대가 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위스키 제조의 하이라이트가 증류라면, 증류소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테이스팅이다. 증류소마다 다른 캐릭터의 위스키가 혀에 살포시 내려앉을 때의 황홀함이란.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맛보는 것도 흥겨웠다. 그러니 시간이 준 선물 같은 위스키를 한 잔 한 잔 천천히 음미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이 마시는 수밖에. 시음하면 할수록 스코틀랜드 속담이 떠오르며 좋아지는 위스키가 늘어만 갔다. “나쁜 위스키는 없다. 좋은 위스키와 더 좋은 위스키만 있을 뿐.”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발베니 위스키 증류소 전경.
워시백이라는 커다란 통에서 발효 중인 맥아즙의 냄새를 맡아볼 수 있다.

Travel guide

크레이겔라키
이동 방법
인천에서 인버네스 공항까지는 직항이 없어 런던 히스로 공항을 경유해야 한다. 인버네스 공항에서 크레이겔라키까지는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로 렌터카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머물 곳
위스키 호텔로 이름난 더 크레이겔라키 호텔이나 맞은편 하일랜더 인에 묵으면 증류소 투어 동선을 짜기 편리하다. 주변에 에어비앤비도 많은 편이다.
먹을 곳
아벨라워 하이 스트리트의 피시앤칩스 테이크아웃 전문점, 샌드위치를 파는 카페 등 로컬 가게에서 간단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액티비티
인근 위스키 증류소를 연결하는 위스키 테마 루트,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트레일을 걷거나 달리며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아벨라워
이동 방법
크레이겔라키에서 아벨라워까지는 자동차로 5분 거리다. 버스를 이용해도 12분 만에 도착한다.
머물 곳
맥아와 물을 혼합하는 당화조 형태의 위스키 호텔 매시툰에 묵어보길 추천한다. 숙소 앞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스페이강과 아벨라워 기차역에 닿을 수 있다. 아벨라워 증류소도 도보로 이동 가능하다.
먹을 곳
아벨라워에는 유명한 스코틀랜드 과자 워커스 쇼트브레드(Walker’s Shortbread) 방문자 센터가 있어, 역사를 살펴보면서 제품 시식도 할 수 있다.

더프타운
이동 방법
아벨라워에서 더프타운까지는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버스 이용 시 약 20분이면 도착한다.
머물 곳
한때 몰트 위스키의 수도라 불리던 더프타운에는 영국식 숙소 B&B(Bed & Breakfast)와 에어비앤비가 다수 포진해 있다. B&B에 묵는다면 베이컨, 소시지, 달걀에 해기스(스코틀랜드식 순대)를 곁들인 스코티시 브렉퍼스트를 즐겨보자.
먹을 곳
더프타운에는 인도식 커리 전문점이나 차이니스 레스토랑이 있다. 럭셔리한 카페에서 느긋한 오후를 보내고 싶다면 글렌피딕 증류소 내 카페에서 애프터눈 티로 스콘과 함께 크림 티나 홍차를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