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채집가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ING & PHOTOGRAPHY BY MELMEL CHUNG

여행 채집가

Collector of Wanders

‘채집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널리 찾아서 얻거나 캐거나 잡아 모으다. 사진가 정멜멜은 나비를 모으듯 여행의 순간을 채집한다. 그가 와인을 좋아하는 9명의 친구들과 함께 영원한 봄의 섬,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의 란사로테섬을 누빈 나날을 표본해 보내왔다.
  • WRITING & PHOTOGRAPHY BY MELMEL CHUNG
2025년 09월 01일

란사로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삶을 마친 예술가 세사르 만리케가 디자인한 테기세의 라고마르 박물관(Lagomar Museum). 한때 배우 오마르 샤리프가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누군가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대저택에 잠시 숨어든 듯한 기분으로 오후를 보냈다.

와인을 마음껏 즐기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주량이 형편없는 내가 좋아하는 술은 대체로 명확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가볍고 산뜻하거나, 달거나. 란사로테 이전에 다녀온 시칠리아 여행에서 이탈리아 식전주인 아페롤 스프리츠의 매력에 빠졌다.

어디부터가 건축이고 어디부터가 자연 지형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이 란사로테 관광지들의 가장 큰 매력이다. 6년 동안 이어진 화산 폭발로 섬 전체가 화산재에 뒤덮였지만, 란사로테 사람들은 새로운 지형에 적응하려 노력하며 오히려 자연의 선물로 여겼다고.

화산섬으로 변한 섬의 독특한 지형과 기후를 활용하여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라 헤리아(La Geria). 주변에 여러 와이너리가 있지만 유독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열대 해양성 기후의 집들을 좋아한다. 맨발에 닿는 차가운 타일. 란사로테섬이 있는 카나리아 제도 전체가 ‘영원한 봄의 섬(La Isla de la Eterna Primavera)’이라고 불린다는데, 무척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10명이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데 모두가 같은 장면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멎을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좋다.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창밖의 붉고 검은 풍경들.

EBS <세계테마기행> 란사로테 편에서 보았던 까만 반달 모양의 분화구들. 중북부에 자리한 포도밭이다. 곡물을 키우기에는 지나치게 척박한 토양이었지만, 포도나무는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여러 세대의 노력이 더해져 아주 독특한 와인 산지가 되었다. 와인에 큰 관심은 없지만,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 맞춰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끈기, 혹은 결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늘 마음이 움직인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집들. 강렬한 햇빛과 건조한 기후 때문인지 대부분의 건물이 하얀색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층 건물이 없고 하얀 벽을 가진 집들이 많은 것도 만리케가 섬의 개발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도시와 숙소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 있지만 명확하게 통일되는 조건이 있다. 수영장이 있는 숙소여야 할 것. 야이사의 숙소에 있던 우리의 수영장.

여행을 오기 며칠 전, 우연히 클라이언트분께 한 레스토랑을 추천받았다. 알고 보니 남편분께서 어린 시절부터 란사로테를 자주 찾으셨다고. 한 끼 한 끼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여행에서, 믿을 수 있는 식사 장소를 추천받는 것만큼 든든하고 기쁜 일도 없다.

검은 돌 위 치즈 고양이. 여행지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집에 있을 나의 고양이를 떠올리며 카메라를 들게 된다.

란사로테 여행 막바지 즈음 코로나에 걸려 정신없는 이틀을 보냈다. 다음 일정을 위해 회복에 전념해야 했고, 조금 나아져 산책이 가능해졌을 때 마주한 건 조용한 숙소의 풍경이었다. 여행지에서 아프게 되면, 결국 이 몸을 이끌고 어디론가 움직여왔다는 사실, 새로운 감각을 운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신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9명의 친구들과 함께 거창과 제주, 이탈리아, 파리, 스페인을 여행하며 많은 추억을 쌓았다. 저마다 너무도 다르게 흘러가는 일상을 치열하게 꾸려가면서도, 그사이 시간을 내어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기에, 모든 순간이 더욱 소중하고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