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익숙한 엄마의 주방에서
런던브리지역에 내려 버몬지 스트리트(Bermondsey St)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이지만 이날은 오래된 지인과 목적을 두고 만나러 가기 때문인지 설렘과 긴장감이 번갈아 찾아왔다. 현관문 앞에 서자 집 안에서 새어 나오는 음식 냄새가 먼저 반긴다. 벤 베우레트(Ben Beuret, 이하 벤)이 시간을 맞추기 위해 요리를 먼저 시작한 모양이다. “찾아오는 게 어렵진 않았나요? 마지막으로 본 게 지난 크리스마스 무렵인 것 같은데, 어떻게 지냈어요?” 벤이 수줍은 얼굴, 설레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나를 맞이한다. 비프스튜가 시간이 걸리는 요리라 먼저 시작했다고 빠르게 설명을 이어나가는 그의 이마엔 이미 땀이 맺혀 있다.
영국에서 나고 자란 벤은 약 30년 경력의 영어 선생님으로 현재 온라인으로 전 세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내가 그의 플랫(아파트)이 있는 런던의 로더하이드(Rotherhithe) 근처에 살 때 그의 한국인 아내 서니(Sunny Beuret)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됐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현저히 낮았을 때 벤의 수업을 듣기도 했는데, 그는 항상 학생의 성실함을 끌어내는 자상하고 꼼꼼한 선생님이었다.
벤은 여전히 로더하이드 플랫에 살고 있고 오늘 그가 요리하는 장소는 버몬지 스트리트 뒤편에 있는 부모님, 크리스틴(Kristine)과 로저(Roger)가 2001년부터 살고 있는 집이다. 주방과 연결된 발코니 너머로 태너 스트리트 파크(Tanner Street Park)의 테니스 코트가 눈에 들어온다. 주말엔 이곳에서 빈티지 마켓이 열린다. “부모님 집에서 요리를 즐겨 합니다. 두 분이 런던으로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레스터(Leicester)의 플랫을 방문할 때부터요. 저에겐 요리가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가족에 대한 사랑, 동료나 친구에 대한 우정, 지인들에 대한 친근함과 감사의 표시로 음식을 대접하죠.”
그가 이 주방의 손님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어느 서랍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단번에 찾아냈고 오븐 다이얼의 눈금이 다 벗겨진 상태임에도 능숙하게 온도를 맞췄다. 싱크에 그릇과 주방 도구가 쌓이면 재빨리 설거지를 했다. 주방이 익숙해야 나오는 행동이다. 야채와 베이컨, 밑손질한 소고기가 적당히 익어가자 물에 녹여둔 비프 스톡을 붓고 에일맥주를 따며 말한다. “오늘은 특별히 런던에서 영국 음식을 소개하는 자리니까 런던의 대표적인 브루어리 중 하나인 풀러스(Fuller’s)의 앰버 에일을 골랐어요. 에일은 풍미와 향을 끌어내고 고기를 오래 끓여도 부드럽고 촉촉하게 만들어주죠. 맥주는 기호에 따라 넣으면 됩니다. 다만 라거는 풍미 면에서 아쉬울 수 있어요.” 이어 그는 팬의 바닥을 긁으며 디글레이즈(deglaze)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바닥에 눌어붙은 캐러멜라이징된 조각을 맥주나 비프 스톡을 녹여둔 물로 녹이는데, 이 역시 스튜에 풍미를 더하기 위함이다. “디글레이즈라는 단어는 요리할 때를 제외하곤 들어볼 기회도, 쓸 일도 없을 거예요.” 모르는 단어가 튀어나와 내가 당황할까 염려하는 영어 선생님다운 노파심과 다정함이다. 스튜 팬의 뚜껑을 닫고 한 시간쯤 뒤에 버섯과 허브를 넣으면 끝. 이제 스튜에 곁들일 매시트포테이토와 디저트를 만들 차례다.


런던의 특별한 가족
비프스튜에 넣고 남은 맥주를 마시며 애플&페어 크럼블에 들어갈 사과와 배의 껍질을 벗기고 숭덩숭덩 자른다. “디저트를 만들 때는 파란 사과인 브램리(Bramley)를 주로 사용해요. 무르고 달기보다는 산미가 강한 편이라 베이킹에 적합하죠.” 형태나 맛이 한국의 아오리 사과인데 그보다는 확실히 무르다. 영국에는 약 2500개의 사과 품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주로 생식으로 섭취하는 한국과 달리, 영국은 사과 재배에 기후가 적합해 관상용으로 집 정원에 심기도 한다. 다양한 요리에는 물론 사과 맥주인 사이더에도 널리 쓰인다. 브램리는 19세기부터 존재한 품종이다. 한편 페어라 부르는 유럽형 배는 한국산과는 완전히 다르다. 표주박 모양으로 단맛이 거의 없고 식감은 무말랭이와 흡사하다. 벤은 크럼블 반죽을 만들면서 뮤즐리를 섞었다. “뮤즐리 대신 오트나 건포도, 너츠 등을 취향에 따라 넣어도 됩니다. 사과나 배 대신에 제철 과일을 넣어도 되고요. 각자의 선호도에 따라 얼마든 변주할 수 있다는 것도 집밥의 묘미 중 하나죠.” 그러면서 반죽에 버터를 계속 섞다가 결국 한 통을 다 넣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니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다. “버터는 많이 들어갈수록 좋지 않나요? 촉촉하고 고소하고 풍미도 살아나고요.” 크럼블 반죽을 오븐에 넣고 매시트포테이토에 들어갈 감자를 깎는다. 영국에서 감자는 한국의 쌀이나 다름없다. 요리에 따라 튀기거나, 굽거나, 삶아서 으깨 사이드 디시로 낸다. 약불에 얹어 놓은 비프스튜를 확인하고 벤이 활짝 웃는다. “다 된 것 같아요.”
80대인 크리스틴과 로저의 플랫은 천고가 높고 볕이 잘 드는 공간으로 소박하고 단정한 가구들 사이로 가족의 역사와 추억이 얽힌 일상 물건이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평생 사업과 일로 바쁜 시간을 보낸 크리스틴은 요리에 마음을 붙일 여유가 없었다. 방금도 신문사에 보낼 책 리뷰 칼럼을 쓰다 나온 참이다. 아무리 벤의 집이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고 해도 20년 넘게 매주마다 요리를 만들어 오거나 만들러 온다는 것은 대단한 정성이다. 그런 벤을 두고 침 마르게 찬사를 보낼 법도 한데 크리스틴은 “전 어떤 음식이든 불평 없이 먹는 편입니다. 오늘 벤이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면 샐러드를 먹고 말았을 거예요. 벤이 뭘 만들든 맛있어요. 가끔 짜긴 하지만요”라고 담백하게 말한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믿음, 감사의 마음은 벤이 말하고 움직일 때마다 그를 쫓는 시선에서 충분히 읽힌다. 분위기를 띄운 이는 로저였다. “벤이 양손 가득 재료나 음식을 들고 집에 들어설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주 신나요.” 크리스틴과 로저는 벤의 이런 모습을 일컬어 ‘밀즈 온 휠즈(Meals on wheels)’라 부른다. 영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정부와 자선 단체들이 사회적 약자, 노인 및 장애인에게 식사를 배달해 주는 사회복지 서비스를 뜻하는데, 차로 이들의 집에 식사를 배달해 준다는 의미다.
런던에 거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월급의 절반이 렌트비로 나가고 일차선과 일방통행 위주인 도심에 통행료까지 지불하며 차를 끌고 들어가야 하는 도시는 이곳에 살아야 하는 명백한 이유가 없는 이들이나 노인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가족을 떠나 일을 쫓아 런던에 사는 대부분의 인구와 다르게, 벤은 가족 때문에 런던을 떠나지 않고 있다. 주말에는 자주 교외로 차를 몰아 나간다. “런던 근교 농장에 가서 식료품 쇼핑하는 걸 즐겨요. 가격이나 편리성 측면에서는 슈퍼마켓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소중한 이들을 위한 요리를 할 땐 가능한 좋은 재료를 쓰고 싶으니까요. 오븐 앞에 서 있는 전 세계 모든 이들이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해요.”

비프스튜 & 매시트포테이토 Beef Stew & Mashed Potatoes

비프스튜 재료
양지머리 800g, 해바라기유 50ml, 양파 큰 것 1개, 당근 2개, 셀러리 2스틱, 밀가루 20g, 베이컨(햄) 약간, 버섯 약간, 에일 맥주 300ml, 비프 스톡 400ml, 마늘 2쪽, 토마토 퓌레·월계수 잎·타임(허브) 약간씩
- 무쇠솥 혹은 큰 냄비에 해바라기유를 넣고 예열을 한다.
- 양지머리에 밑간을 한 후 냄비에 넣고 갈색빛이 나오기 시작할 때까지 볶는다.
- 양지머리를 덜어내고 양파, 당근, 베이컨, 셀러리, 월계수 잎, 타임을 넣고 약불에서 6~8분 정도 익힌다. 가끔 저어주면서 수분이 나오도록 천천히 익힌다.
- 볶은 양지머리에 밀가루를 입힌다.
- 3의 냄비를 약불에서 중강불로 올린 후 맥주를 붓고 팬을 디글레이즈하면서 바닥에 눌어붙은 조각을 녹인다.
- 물에 녹여둔 비프 스톡을 5에 붓는다. 토마토 퓌레를 넣고 뚜껑을 닫은 뒤 1시간 이상 약한 불에서 끓인다.
- 불에서 내리기 약 20분 전 버섯과 남은 타임을 넣고 약한 불에서 더 끓인다.
TIP 에일맥주는 에일과 홉의 반응으로 고기 요리의 향을 끌어 올린다. 어떤 에일 맥주도 좋다. 라거만 아니라면.
매시트포테이토 재료
감자 여러 개, 양파 작은 것 1개, 머스터드 소스·싱글 크림·버터·소금·후추 약간씩
- 원하는 양만큼 감자를 깎은 후 삶는다.
- 양파는 향과 식감을 내기 위한 것으로 원하는 만큼 넣으면 된다. 가로로 채를 썰어 약한 불에서 볶으면서 캐러멜라이즈드를 해준다
- 삶은 감자를 으깬 후 볶은 양파, 머스터드 소스, 크림, 버터, 소금 및 후추를 원하는 맛과 질감에 따라 넣고 섞는다.
TIP 잉글리시 머스터드는 한국의 노란 겨자에 가깝게 맵다. 프렌치 머스터드인 디종을 넣어줄 것.
애플&페어 크럼블 Apple & Pear Crumble with Custard

재료
브램리 사과·배 여러 개, 황설탕 작은 봉지 1팩, 밀가루 175g, 소금 약간, 차가운 버터 110g, 뮤즐리 혹은 오트 약간
- 일반 오븐 190℃, 팬이 있는 오븐은 170℃로 예열한다
- 사과와 배의 껍질을 벗기고 씨앗을 제거한 뒤 적당한 크기로 잘라 황설탕 2큰술을 넣고 버무린다. 베이킹 팬에 최대한 평평하게 눌러 담는다.
- 밀가루에 황설탕 110g, 소금 한 꼬집을 넣고 고루 섞는다. 여기에 뮤즐리나 오트를 넣는다. 취향에 따라 오븐에 넣기 직전 표면에만 뿌려도 무방하다.
- 차가운 버터를 슬라이스해서 3에 넣고 손으로 문질러가며 마치 촉촉한 빵가루처럼 보일 때까지 섞는다. 그릇을 살짝 흔들어 큰 덩어리가 올라오면 다시 손으로 잘게 부숴준다.
- 2 위에 4의 크럼블 반죽을 수북하게 올린 뒤 포크로 고르게 편다. 이때 살살 눌러가며 펴주면 크럼블이 서로 잘 붙고 겉이 바삭해지는 효과가 있다.
- 오븐에 넣어 35~40분간 굽는다. 표면이 황금빛 갈색이 나고, 사과를 찔렀을 때 부드럽게 들어가면 완성.
- 오븐에서 꺼낸 뒤 10분 정도 식힌다. 아이스크림이나 커스터드를 곁들여 낸다.
TIP 크럼블 반죽을 섞을 때 버터를 양껏 넣으면 한층 고급스러운 풍미가 난다.
홈메이드 커스터드 재료
더블 크림 200ml, 우유 700ml, 달걀노른자 4알, 옥수수가루(전분) 3큰술, 설탕 100g, 바닐라 추출액 1큰술
- 냄비에 더블 크림과 우유를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 달걀노른자, 옥수수가루, 설탕, 바닐라 추출액을 큰 볼에 넣고 섞는다.
- 1에 2를 넣고 굳지 않도록 수시로 저어 주면서 걸죽할 때까지 끓인다. 덩어리가 생기기 직전까지만 익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