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하는 사람들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RYU JIN
  • PHOTOGRAPHY BY CHO SooMIN

이웃하는 사람들

Becoming Neighbors

지역색이 강한 낯선 섬에 뿌리내리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각자의 꿈을 품고 제주로 내려와 모임과 이웃, 친구를 만든 이들에게 지속 가능한 제주살이에 대해 들었다.
  • written by RYU JIN
  • PHOTOGRAPHY BY CHO SooMIN
2025년 09월 01일

산보와 사진

(왼쪽부터) 김명연, 구태은, 박성욱, 이유수. 두 부부 모두 아내는 글을 쓰고 남편은 사진을 찍는다.

제주살이의 계기, 시작이 궁금해요.
구태은 변화가 필요했던 시점에 이주를 결심했어요. 남편(박성욱)과 저 모두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답답함을 느꼈고, 막연하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퇴사한 후 발리에 두 달간 머물다가 제주로 왔죠. 그게 2019년의 일이에요.
김명연 저희 부부는 2017년부터 1년에 한 번씩 로드 트립을 다녔는데요. 2021년 코로나19가 터지고 해외에 나갈 수 없게 되면서 제주 한 달 살기를 했어요. 그때 곽지해수욕장에 반해 ‘매일 여기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3개월 만에 서울 집을 정리하고 내려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죠.

제주 이주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섬살이 2년 차에 길이 갈린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살던 데로 돌아가는 사람, 그리고 계속해서 사는 사람. 네 분은 모두 이곳에서의 삶을 지속하고 있잖아요. 이유가 있을까요?
구태은 제주도에서 경험하게 되는 생활의 변화를 ‘여유 있다’고 느끼면 여기가 자신한테 잘 맞는 거고, ‘지루해 못 견디겠다’ 하면 떠나는 것 같아요. 저는 전자예요. 가끔 서울에 가면 제주가 금방 그리워지더라고요. 섬의 심심함과 잘 맞는 거죠.

내려올 때 기대했던 삶이 있잖아요. 지금 그 삶을 살고 있나요?
이유수 처음 2년 동안은 거의 매일 바다로, 산으로 돌아다녔어요. 지금은 처음만큼 자주 나가진 않지만 원할 때 언제든 나가면 자연이 있다는 사실에 기대며 살죠.
김명연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제주도는 15분 생활권이다.” 섬 어디에 살더라도 숲, 바다, 산 같은 대자연이 15분 거리에 있다는 얘기예요. 저희는 지금도 그걸 십분 누리고 있어요.
박성욱 맞아요.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데 즐기지 않으면 아깝잖아요. 그래서 현상소 문을 열기 전 아침 일찍 바다에 나가 수영을 하고 돌아와서 출근 준비를 하기도 해요. 쉬는 날 좀 피곤하더라도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 둘도 좋지만 같이 즐길 사람을 찾자, 해서 ‘산보와 사진’이라는 모임을 만든 거죠.

모임에 관한 얘기를 더 해주세요. 어떻게 만들게 됐고, 참여하게 됐나요?
구태은 2023년 가을에 처음 시작했어요. 취미를 공유하는 또래를 모아 접촉점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모여서 하는 활동은 간단해요. 한 달에 한 번 필름 한 롤이라는 제한을 두고 따로 또 같이 산보를 하며 사진을 찍어요. 그리고 스틸 네거티브 클럽으로 돌아와 바로 현상한 후 각자에게 전달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공유하고요. 그렇게 모은 기록을 콜링북스라는 서점의 소식지에 연재하고, 얼마 전엔 진(zine)으로 발행하기도 했어요.
김명연 남편의 사진가 후배가 소개해 스틸 네거티브 클럽을 알게 됐어요. 우리 부부가 제주도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죠. 이곳에서 진행하는 산보와 사진은 사진 좋아하는 사람들이 카메라 하나 들고 산책하다 가끔 툭 한마디 나누는 분위기가 편안하게 느껴져서 참여하고 있어요. 계속 만나는 이들도 있고, 한 번 보고 안녕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가볍고 산뜻한 관계가 부담 없어 좋아요.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일로 얻게 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김명연 혼자 산책을 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장면도 다른 사람이 멈춰서 보면 나도 보게 되잖아요. 같은 지점에서 다른 것을 바라보고 사진에 정성스럽게 담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롭고요. 함께 하는 산책에 그런 매력이 있더라고요.
구태은 산보와 사진은 굉장히 느슨한 연대의 모임으로 시작했어요.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함께 걷는다는 것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경험하고 있죠. 결과물의 공감대가 높은 것도 유대감을 만들어주고요. 저는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 늘 ‘치인다’고 느꼈는데, 소통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아주 중요한 경험이에요. 서울에선 혼자를 더 좋아했는데 제주에서 함께하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about
‘산보와 사진’은 현상소와 커뮤니티 공간을 겸하는 스틸 네거티브 클럽에서 만든 모임이다. 카메라에 필름 한 롤을 채워 넣은 후 사진 찍기 좋은 곳을 골라 함께 출사를 나가 제주의 자연, 새 친구와의 유대를 즐긴다.

선데이 포틀럭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솔린, 김규리, 가이야드 에르베, 강미승, 리비에르 호망, 김레오나. 에르베와 미승은 세계 여행가, 규리와 호망은 파리에서 제주로 이주한 셰프다.

언제, 누가, 왜 이런 모임을 만들었어요?
강미승 시작은 에르베예요. 2년 전 어느 날, 이런 얘길 하더라고요. “프랑스에선 일요일마다 늘 가족들이 모여 파티를 했어. 여기에서도 그걸 이어가고 싶어.” 그러곤 섬 구석구석을 뒤져 찾아낸 프랑스 친구들을 매월 둘째·넷째 주 일요일에 우리 집으로 초대하기 시작한 거죠.
김규리 소문이 금세 퍼져 모임이 생각보다 빠르게 커졌어요. 에르베와 미승이 직접 초대해서 온 이들도 있지만 SNS에 올라온 모임 사진을 보고 연락해서 오는 사람, 소개에 소개를 거쳐 찾아온 사람들도 있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커뮤니티가 된 거죠.

모이면 뭐 하며 시간 보내요?
김규리 말 그대로 포틀럭 파티예요. 각자 이런저런 음식을 가져와서 먹고 마시죠. 제주살이에 필요한 정보도 나누고, 모국어로 타지살이의 고단함을 토로하며 위안을 받기도 하고요.
강미승 연고가 없는 곳에 정착해 사는 것이 사실 힘든 일이잖아요. 제주도는 특히 친구가 있다고 해도 가까이 사는 경우가 드물고, 이동이 쉽지 않아 왕래가 뜸해요. 저처럼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다 같이 모여서 먹고 놀고 마시는 일’에 대한 갈증이 좀 있죠. 또래와의 대화, 왁자지껄한 수다에 대한 허기를 채우는 시간을 보내요.

선데이 포틀럭 파티로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리비에르 호망 가족이요. 여기에서 만난 친구들은 이제 내 가족이에요. 어떤 대화든 나눌 수 있는 에르베는 아버지 같은 존재고요. 파리에 살 때 제 사교 생활은 같이 일하는 동료 요리사들과 일 마치고 술 한잔 하는 게 전부였어요. 그런데 여기에선 프랑스였다면 만날 수 없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친구가 돼요. 덕분에 낯선 곳에서 오히려 더 다채로운 소셜 라이프를 즐기고 있죠.
가이야드 에르베 도시에선 누군가를 만나는 일, 대화를 나누는 일이 아주 쉽지만 나고 자란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한 이주민에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일상이 아니거든요. 그런 삶을 되찾게 해줬죠.

에르베는 제주살이 6년, 호망은 3년 차라고 들었어요. 살며 발견한 이 섬의 매력은 뭐예요?
가이야드 에르베 미승이 서울에서 살자고 했을 때 완강히 반대했어요. 바다 냄새를 맡으며 살고 싶었거든요. 나는 제주도의 냄새가 좋아요. 집 앞 포구에 나가면 소금기 가득한 짠 내, 물고기의 싱싱하고 비릿한 몸내, 오름과 숲의 흙·풀·돌 냄새가 뒤섞여 바람에 실려오는데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실 때 살아 있는 기분이에요.
리비에르 호망 제주도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정말 재미있어요. 쉬는 날 모터바이크를 타고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1100도로를 달리는 걸 좋아하는데요. 출발할 땐 분명히 날씨가 아주 맑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다가 다시 쨍쨍한 하늘을 만나는 일이 부지기수죠.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도 집에 돌아갈 때쯤엔 다 말라 있어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연의 그 변화무쌍함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어요.

이 섬에서 얻게 된 삶에 만족하나요? 보통 여유를 찾고 싶어 내려오잖아요.
강미승 저는 어디에 살든 좀 바쁘게, 극성맞게 움직이는 스타일이에요. 서울에서도 그랬고, 여기 제주에서도 늘 할 일을 찾아 나서는 편이죠. 그래서 제주 생활을 ‘여유롭다’고 표현하고 싶진 않아요. 그런데 확실히 마음의 상태는 달라요. 서울에선 막 분주하게 뭘 하고, 누굴 만나고, 부지런히 쏘다녀도 ‘나 뭐 했지?’ 싶은 순간이 많은데 여기에선 달라요. 내가 뭘 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분명하게 알아차리며 살죠.

about
제주도에 사는 프랑스 사람과 그 가족들로 구성된 커뮤니티. 동호, 친목의 목적보다는 가족을 만나는 마음으로 서로를 찾는다. 매월 둘째·넷째 주 일요일마다 먹을 것을 하나씩 들고 모임을 주최하는 미승&에르베 부부의 집에서 꾸준히 만나고 있다.

제주 러닝 크루

(왼쪽부터) 이종해, 이규호, 박동훈, 양동주. 제주 러닝 크루를 통해 섬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 청년들이다.

몇 년 차 도민인가요?
이규호 10년 전 제주도에 왔어요. 해외에서 군 생활을 하다가 제대한 후 호주로 넘어가 워홀러로 지내면서 자연 속에서 마음껏 운동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주도를 선택했어요.
이종해 저는 6년 차예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퇴사를 고민하던 시점에 동생(이규호)이 제주도에 와서 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고 바로 내려왔어요. 여기 동주, 동훈 님은 제주도 출신이고요.

제주 러닝 크루라는 모임을 만든 계기는요?
이규호 2019년부터 시작했어요. 육지에선 러닝 크루라는 문화가 꽤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 제주도엔 드물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같이 뛰는 것 이상의 모임, 전문성을 갖추되 재미있게 달릴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해보자, 해서 만들게 됐습니다.

언제 어떻게 모이고 달려요?
이규호 매주 목요일 저녁에 하는 정규런이 가장 기본적인 모임이에요. 제가 하고 있는 일들, 트레일 러닝 교육이나 아웃도어 브랜드 컨설팅, 선수 활동 등을 통해 얻은 인사이트를 활용해 다양한 이벤트, 행사, 대회 등을 열기도 하고요. 매주 평균 70~80명 정도의 도민이 모임에 참석하고, 여행자나 서울에서 온 게스트 러너들이 합류할 땐 100명이 훌쩍 넘어요.

제주 출신이라고 얘기해주신 두 분은 어떻게 제주 러닝 크루가 됐어요?
양동주 SNS에서 러닝 크루 문화를 우연히 접하고 제주도에도 있는지 찾아보다가 제주 러닝 크루를 발견했어요. 제주의 다른 러닝 클럽에도 다 참여해봤는데, 여기가 저와 잘 맞더라고요. 친목보다는 달리기와 기록에 좀 더 집중하고 싶었거든요.
박동훈 저도 비슷한 동기, 과정으로 여길 알게 됐어요. 체계가 잘 잡힌 러닝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어서 그냥 묵묵히 나오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뛰는 것 말곤 뭐 해요?
이규호 달린 후 코스 주변의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 소외된 분들을 위한 연탄 봉사 같은 행사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진행해요.
이종해 ‘프로 선수들이 즐기는 걸 일반 러너들도 즐겨보면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얻은 답들이 있어요. 규호와 제가 만든 구보(Goobo)라는 회사를 통해 그런 기획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패션, 스포츠, 미식, 아웃도어 브랜드 등과 다양하게 협업해 러너들과 연결하는 일이죠.
박동훈 여름이면 서핑, 수영 등 제주 바다에서 십분 즐길 수 있는 다른 운동도 함께 하며 재미있게 놀기도 해요.

‘그냥 달리는 모임’ 이상의 무엇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이규호 제주도가 여행지로선 즐거운 곳이지만 젊은 사람들이 살기엔 사실 할 일이, 재미가 별로 없거든요. 그러면 서울이나 다른 큰 도시에서 즐기는 것, 누리는 걸 우리가 제주도로 가져오자, 그래서 도민도 즐기고 육지에서도 찾아오게 하자, 하는 생각으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판을 짜고 있어요. 그리고 제주 러닝 크루 회원 중 반은 이주한 사람들, 반은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인데요. 서로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으며 여기에서 지속적으로 살 수 있는 재미나 즐거움을 얻고 있기도 하고요.

제일 궁금한 건 사실 이거예요. 나만 알고 싶은, 달리기 좋은 제주의 자연은 어디인가요?
양동주 송악산. 3.5km 정도 되는 코스인데, 개인적으론 가장 제주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제주도민은 사실 바다 풍경에 별 감흥이 없는데, 여기에선 ‘아, 이게 제주구나’ 하고 새삼 감탄하게 되는 곳이에요.
이규호 트레일 러닝에 관심이 있다면 윗새오름도 추천해요. 웅장함이 압도적이거든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한 장면에 들어선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

about
러닝 선수로 활동하며 스포츠 브랜드 컨설턴트, 디지털 매거진 에디터로 일하는 이규호가 2016년에 만든 달리기 모임. 제주시를 중심으로 도민과 여행자의 섬 달리기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월 4회 ‘정규런’과 달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번개런’, 브랜드와 함께 다양한 달리기 대회와 행사를 주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