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준 선물, 웨일스 골프 건축 여행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oh sangjun
  • ILLUSTRATION BY JOE SUNGHEUM

자연이 준 선물, 웨일스 골프 건축 여행

Pure Links Pure Wales

골프 코스도 여행지가 될 수 있을까? 영국 웨일스의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만들어진 골프장에는 영국 링크스 코스만이 줄 수 있는 평화가 충만했다. 건축가 오상준의 웨일스 골프 미식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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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LLUSTRATION BY JOE SUNGHEUM
2025년 11월 10일

1년 만에 영국으로 날아가 링크스 코스를 밟았다. 링크스 코스는 영국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만들어진 골프장을 부를 때 쓰는 용어. 스코틀랜드 유학 시절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아일랜드는 모두 가봤는데, 웨일스만 가보지 못했다. 후회로 남았던 그곳을 난생처음 가봤다.
웨일스는 영국(The United Kingdom) 내에서도 독립된 왕국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신세다. 영국의 국기인 유니언잭을 구성하는 세 개의 십자가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조합이다. 웨일스의 상징인 붉은 용은 영국 국기에 없다. 웨일스는 대대로 영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웨일스를 5일간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들은 놀랄 만큼 친절했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웨일스에 대해, 자신들의 골프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다. 내게 먼저 인사하고 질문을 퍼부었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사랑하고 그걸 알리고 싶어 하는 열정이 있었다.
웨일스에서 처음 간 곳은 ‘로열 포스콜 골프 클럽’. 올해 여름 AIG 위민스 오픈이 개최된 곳이다. 포스콜 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1891년 설립되어 지난 100년간 영국의 세계적인 코스 설계자들의 손을 거쳐간 웨일스 최고 골프장이다.
이곳에서 캐디 잭과 한나절을 보냈다. 인근 카디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잭은 기성용의 팬이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 대한 질문을 이것저것 하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한다. 그와 함께 포스콜의 굽이치는 페어웨이를 걸으며 한국의 골프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유를 느꼈다. 이리도 여유롭고 편안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영국의 링크스 코스만이 줄 수 있는 평화가 자연을 품은 코스 속에 가득했다.
브리스틀해협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이 여행의 첫날을 평화롭게 열어주었다. 작고 아늑하지만 깊은 역사성을 보여준 클럽하우스의 백미는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테라스. 라운드 후에 거품이 적당히 올라온 기네스 한 잔을 마시며 오랜만에 코스에서 회복의 시간을 보냈다.
2005년 에든버러대학에서 코스 설계 석사 과정을 공부할 때, 영국의 세계적인 설계자 도널드 스틸이 쓴 라는 책을 탐닉했었다.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영국 내 세계 100대 코스뿐 아니라 로컬들만 알고 즐기는 동네 코스 중에 그의 탁월한 안목으로 고른 링크스 코스가 실려 있다. 그중 한 곳이 웨일스의 ‘페나드 골프 클럽’이다. 여행 둘째 날 클럽하우스 옆에 붙어 있는 1번 홀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서는 순간, 기막힌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페어웨이 오른쪽 러프에 커다란 소들이 더없이 편안한 포즈로 풀을 뜯고 있었다. 집채만 한 소가 초원에서 잔디 뜯어 먹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말 그대로 ‘우적우적’이란 의성어가 내 귓가에 꽂혔다. 참으로 열심히도 먹는구나 너희들은. 고맙다, 러프 관리를 해줘서. 왠지 특별한 하루가 될 것 같다는 기분 좋은 흥분감이 온몸을 감쌌다.
어제의 로열 포스콜이 토너먼트형 코스였다면, 페나드는 고저 차가 심한 자연 지형이 날것 그대로 살아 있는 생동감 넘치는 공간이다.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의 ‘크루든 베이 골프 클럽’에 필적하는 예측 불가한 롤러코스터의 질주 같은 골프가 나를 반겼다. 서프라이즈! 이곳에선 골프에 대한 선입견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니크한 골프 공간이 있다. 미국 ‘메리온 골프 클럽’의 마지막 홀,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의 아멘 코너, ‘턴베리 골프 클럽’ 에일사 코스의 등대를 향해 가는 크레센도 같은 홀이 그런 유일무이한 공간이다. 그런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페나드에서 그런 대체 불가한 공간을 발견했다. 7번 홀부터 10번 홀에 이르는 네 개 홀은 시각적으로나 플레이적으로 소름을 돋게 하는 숭고함을 지니고 있다. 거대한 모래언덕 사이를 채운 바다 풍경은 감동을 극대화한다. 특히 7번 홀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페어웨이 오른쪽엔 800년이 넘은 성곽, 왼쪽으로는 그보다 더 오래된 교회의 잔재가 남아 있고, 그 사이로 가파른 내리막으로 시작해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연결된 페어웨이가 그린에 닿아 있다. 아일랜드의 명문 코스 ‘밸리버니언’의 한 조각을 떼어다 놓은 듯한 다이내믹한 지형은 자연의 손길이 만든 아름다운 조형물 같은 공간에 이르러 완성된다. 16번 홀에서는 뉴질랜드의 ‘케이프 키드내퍼스’보다 더 아름다운 깎아지른 절벽 위의 그린이 나를 반긴다. 스완지시티에서 30분 거리에 이렇듯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는 코스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골프 코스를 평가하는 기준을 미식 관점에서 비교해보자. 미슐랭 3스타는 반박하기 힘들다.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검증된 메뉴를 비싼 값을 치르고 산 경험이라는 팩트가 큰 몫을 한다. 하지만 진정 미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나만 아는 숨은 맛집 리스트가 있어야 한다. 그게 안목이고 취향이고 개성이다. 페나드는 그런 안목을 갖추고 싶은 골퍼라면 지체 없이 와봐야 하는 곳이다. 5코스 디너는 아니지만, 영혼까지 치유할 수 있는 곰탕과 깍두기 하나로 승부하는 그런 곳이다. 영국 링크스 코스의 묘미는 다양성에 있다. 사흘간 반경 1시간 거리의 코스 세 개에서 플레이했지만 서로 너무도 다른 특색이 인상적이었다. 셋 중 어떤 코스가 더 좋으냐는 질문은, 마치 스테이크와 돼지갈비와 치킨 파르메산 중 뭘 먹고 싶냐고 묻는 것과 같다. 내 대답은 물론, 미디엄 레어로 잘 구워진 두툼한 채끝 스테이크지만, 때로는 돼지갈비와 치킨 파르메산이 당길 때도 있지 않은가? 매일매일 스테이크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리고 그날의 알코올 초이스에 따라서도 메뉴는 달라질 수 있으니까.

이보다 더 고소할 수 없는 웨일스 소고기
페나드 17번 홀에서 마주친 웨일스의 소 두 마리는 꽤나 삶을 즐기는 축에 속한 것 같았다. 1번 홀 러프에 누워 있던 무리에서 벗어나, 좌에서 우로 가파르게 기울어 있는 페어웨이 상단을 천천히 조심스레 걸어 바닷바람이 신선하고 햇볕이 따사로운 16번 홀 절벽 위로 풀을 뜯으러 왔다. 망중한을 즐길 줄 아는 예사롭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맛나게 뜯고 있던 야생 풀 속에 웨일스 소고기의 풍미를 내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웨일스에서 스테이크를 두 번 먹었다. 스완지시티의 ‘엘 페스카도르’와 셀틱 매너 리조트의 ‘스테이크 온 식스’에서. 두 번 모두 고소하고 달콤한 향과 육즙을 가득 머금은 두툼한 스테이크는 절제된 마블링과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평소 투플 등심의 마블링이 가득한 소고기를 선호하지 않는데, 웨일스의 경우는 A부터 Z까지 내가 좋아하는 디테일이 모두 살아 있었다. 마치 이곳의 링크스 코스가 조작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맛을 품고 있는 것처럼.
선선하고 습한 기후의 목초지에서 여유롭게 자란 소들은 축사에 갇혀 유전자 변형 옥수수 사료를 먹고 급성장한 비만우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목초지에 함께 번성한 클로버 잎이 웨일스 소고기의 독특한 풍미를 만드는 일등공신이라는 비밀. 세상은 넓고 알수록 재미나는 일이 참 많다. 더 이상 다른 곳에서 스테이크를 시키지 못할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들었다.

스완지시티 호텔과 맛집

모건스 호텔(Morgans Hotel)
끝내주는 아침 식사가 있다. 잉글리시 블랙 푸딩과 스코티시 해기스를 대체하는 웨일스만의 고유한 재료, 콕클 & 라버브레드(Cockles & Laverbread). 콕클은 웨일스 서남 해안에서 나는 바지락류의 조개로 버터나 베이컨과 함께 살짝 볶아 식초와 소금 간을 해서 먹는다. 특히 스완지의 콕클이 유명하다. 라버브레드는 빵이 아닌 한국의 김과 같은 해조류인데, 이를 뭉근히 끓인 후 으깨서 페이스트 형태로 만들어 콕클과 함께 곁들인다.

엘 페스카도르 레스토랑 & 바
스완지 마린 타임 쿼터로 불리는 선착장 근처에 위치한 스페인 음식점. 반투명 비닐 주머니에 가득 담긴 해산물찜이 접시에 쏟아져 나오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새우, 꽃게, 랑구스틴, 홍합, 바지락, 옥수수를 넣은 술찜이라 보면 된다. 하지만 이곳의 주인공은 뭐니 뭐니 해도 웨일스 스테이크다. 이곳의 스테이크를 맛보면 고기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글을 쓴 오상준은 골프의 공간과 문화를 새롭게 설계하는 건축가다. (주)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골프 너머의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탐구하는 골프 인문학을 주제로 강의·전시·저술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