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런던 매덕스 갤러리(Maddox Gallery)에는 초록의 생명력이 넘실대는 캔버스 여섯 점이 걸렸다. 여행에서 받은 영감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캔버스에 켜켜이 쌓아 올린 김물길의 작품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청명한 색감과 환상적인 표현으로 담아낸 독특한 화풍은 런던의 관람객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당시 작품들은 완판됐어요. 그때 저를 잘 봐주신 덕분에 오는 5월, 같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죠. 스물여섯 점 정도가 걸릴 예정이고, 지금 한창 막바지 작업 중이에요.”
김포에 자리한 김물길의 작업실 문을 열자, 그림과 작가 그리고 공간이 하나의 결로 포개졌다. 억지로 끼워 맞춘 구석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조화로움 속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김물길의 세계가 오롯이 읽히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처럼 5월 열릴 첫 해외 개인전을 앞두고 작업실 공간은 신작으로 가득했다. 런던 중심에서 한 달간 펼쳐질 이번 전시는 작가에게도 남다른 도전이다. 지난 1년간 쉬지 않고 그려낸 26~27점의 신작에는 그가 일상과 여행지에서 채집한 영감의 조각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전시의 주제는 ‘초록의 멜로디, 파랑의 시’. 지금까지의 전시와는 달리 특정 여행지에 국한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표현한 작품들이다.
“푸른 여름으로 표현한 커튼을 걷으니 붉은 가을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기도 하죠. 보이지 않아도 나무 안에 수많은 생명이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어 나무를 상자처럼 표현해 상자가 열리며 하얀 새가 날아오르는 그림도 있고요. 눈 덮인 겨울이 가고 푸릇한 초록을 맞는 사람들의 모습을 왕관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스물넷에 떠난 컬러풀한 세계 일주
김물길의 예술적 여정은 스물네 살에 떠난 673일간의 세계 일주, 일명 ‘아트로드’ 프로젝트에서 시작됐다. 경희대학교 회화과 재학 시절, 입시 미술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그리고 싶다는 갈증이 그를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2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2500만원으로 5대륙 46개국을 돌았다. 히치하이킹과 카우치서핑을 전전하며 하루 1만원으로 버틸 만큼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의 손에는 늘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도움을 준 현지인에겐 감사의 표현으로 돈 대신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했다. 그렇게 그린 초상화만 약 100점이 넘는다.
1년 10개월의 유랑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손에는 400여 장의 그림이 남았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4년 넘는 공백기탓에 학교에서는 제적당했고, 화가로서의 입지도 불투명했다. 하지만 길 위에서 그린 그림과 작가의 이야기가 출판사의 눈에 띄어 첫 책 〈아트로드 : 스물넷에 떠난 컬러풀한 세계 일주〉가 세상에 나왔고, 대관 전시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며 작업의 동력을 얻었다. 이후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냐”는 아버지의 권유로 재입학해 스물아홉 살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이후 점차 화가로서 입지를 다져가며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김물길의 작품이 자연으로 선명하게 기울기 시작한 건 장기 여행 중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거치면서부터다. 도시보다 자연 속에 있을 때의 편안함과 즐거움이 화가의 내면을 먼저 흔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라는 단절의 시간은 제 화풍이 뿌리내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은 작업실에 갇혀 보낼 수밖에 없던 나날, 그 안에서 간절히 상상하고 그리워했던 대자연의 생명력을 캔버스에 쏟아냈죠. 그때 비로소 저만의 색채 언어인 ‘초록’과 ‘파랑’이 완성됐어요. 초록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그 익숙하면서도 편안한 색채 위에 상상력을 덧입히는 것이 제 작업의 시작이었죠.”


프리다 칼로를 사랑하는 화가
김물길의 여행 가방 속에는 항상 파우치 하나에 쏙 들어가는 작은 스케치북과 수채화 도구, 색연필이 담겨 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을 옮기는 것이 아니다. 먼저 풍경을 보며 떠오른 상상을 글로 적는다. ‘저 나무가 사실은 누군가가 환생한 것은 아닐까’ 혹은 ‘나무들이 선물 상자처럼 생명을 품고 있지 않을까’ 같은 동화적인 상상이 확장된 뒤에 비로소 붓을 든다. 화가의 캔버스는 상상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인 후에야 시작되는 셈이다.
김물길은 인생에서 가장 멋진 영감을 선사한 여행지를 묻자 주저 없이 멕시코의 툴룸(Tulum)과 여름의 아이슬란드를 꼽았다.
“카리브해의 자유로운 공기가 흐르는 툴룸은 현지인 친구가 있어서 자주 가는 편이에요. 지하 연못인 세노테(Cenote)를 돌아다니고 정글을 여행하며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시간은 제게 큰 리프레시가 되죠. 또 온 세상이 꽃밭으로 변하는 아이슬란드 여름의 백야는 디즈니 만화 속 한 장면처럼 생경한 아름다움을 선사해요. 국내에서는 단양 도담삼봉, 영월 등을 즐겨 찾으며 자연이 만들어낸 섬과 바위의 모습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곤 하죠.”
김물길의 버킷 리스트는 15년 전부터 품어온 남극행이다. “초록과 나무를 너무 사랑하는 제가, 하얀 얼음 세상인 남극에선 어떤 영감을 얻어 작품을 그릴지 너무 궁금해요.”
그가 좋아하는 프리다 칼로처럼 ‘그림을 보면 작가가 생각나고, 작가를 보면 그림이 떠오르는’ 일체감 있는 삶을 꿈꾸는 김물길. 김포 작업실 문을 열었을 때 마주했던, 작가와 작품이 경계 없이 섞여들던 기분 좋은 조화로움은 그가 지향하는 예술적 지점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탄생할 자연의 멜로디를 향해 화가의 여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