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 JASPER


캐나다 에드먼튼 페어몬트 호텔에서 재스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2025년 ‘고미디어 캐나다(GoMedia Canada)’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고미디어 캐나다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 기자, 여행 작가, 여행 크리에이터 등 여행 관련 미디어 종사자들과 캐나다 각 지역 관광청, DMO, 여행사가 만나는 행사다. 2025년 고미디어 캐나다 개최지인 재스퍼는 캐네디언 로키 한가운데 자리한 소규모 산악 마을로, 캐네디언 로키를 여행할 때 밴프와 함께 베이스 타운이 되는 곳이다. 2024년 7월에 재스퍼에 난 산불은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산악지대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집어삼켰다. 2025년 고미디어의 주제는 ‘회복력(Resilience)’이었다. 거주지의 30%가 타버린 재스퍼에서 고미디어가 열린다는 건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이른 아침 출발한 버스에서 눈을 붙였다가 사람들의 함성 소리에 눈을 떴다. 차창 밖 만년설 쌓인 산봉우리와 울창한 침엽수림이 로키 산자락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과 에메랄드빛 호수가 시야를 지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미디어가 열리는 재스퍼 페어몬트 파크롯지의 입구에 들어선다. 재스퍼 국립공원의 중심부, 보베르 호수와 웅장한 로키산맥의 울창한 침엽수림에 폭 안긴 이곳은 위치로나 시설 면에서나 로키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약 283만2800㎡에 달하는 청정한 야생에 전통 양식으로 지은 통나무 캐빈과 현대적으로 정비된 삼나무 빌리지가 공존해 리조트 자체가 하나의 마을 같다. 클래식한 분위기의 로비에 들어서서 체크인을 기다리며 수영장이 내려다보이는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로키산맥과 호수를 앞에 둔 수영장 물이 햇살을 받아 윤슬처럼 반짝였다. 방에 들어가 짐을 풀자마자 미팅 시간까지 잠시 짬이 나서 책 한 권 들고 온수풀로 향했다. 대형 온수 야외 수영장은 이른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운영해 리조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이다. 오두막 형태의 객실은 벽난로가 있는 거실과 커다란 침대가 있는 침실로 분리되어 가족 여행객이 머물기에 손색이 없다. 작은 롯지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위치해 프라이빗한 휴양을 즐기기에도 완벽하다. 재스퍼 페어몬트 파크롯지에서 가장 좋은 건 객실에서 로비까지 향하는 산책로다. 이른 아침부터 햇살이 내리 쬐는 오후까지 청록빛 호수에 거대한 산맥의 반영이 투명하게 비쳤다. 자연이 만들어낸 완벽한 데칼코마니였다.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엘크, 사슴, 때때로 곰 같은 야생동물도 만날 수 있다.

캐네디언 로키에 위치한 캐나다 국립공원은 총 네 개다. 재스퍼, 요호, 쿠트니 그리고 밴프다. 재스퍼 국립공원이 산맥의 북쪽을 넓게 차지하고 나머지 세 개 국립공원이 남쪽에 자리한다. 한국에서 밴프가 훨씬 더 잘 알려진 건 접근성 때문이다. 밴프는 캘거리에서 1시간 20분 정도면 갈 수 있지만 재스퍼는 에드먼튼에서 차로 4시간 걸리기 때문이다. 고미디어에서 만난 재스퍼 관광청의 메러디스 매클레넌(Meredith McLennan)에게 재스퍼가 밴프와 다른 매력을 묻자, 그녀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바로 야생이죠.” 재스퍼 국립공원은 다양한 대형 포유류의 서식지다. 그리즐리 곰, 무스, 엘크 등이 공원 전역에 분포하며 서식 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고미디어에 참가한 미디어는 호스트인 재스퍼관광청이 제공하는 로컬 투어 프로그램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나는 ‘다운타운 푸디 투어’를 신청했다. 가이드와 함께 재스퍼 타운의 명소들을 도보로 둘러본 후, 레스토랑 네 곳에서 음식을 맛보는 투어다. 재스퍼 타운은 한갓진 시골 마을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호텔, 레스토랑, 소방서, 우체국, 은행. 주요 관공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미니어처 같았다. 걷다가 마을에 유독 벽화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벽화는 2022년부터 시작된 ‘업리프트! 재스퍼 뮤럴 페스티벌(UpLift! Jasper Mural Festival)’의 산물이다. 이 비영리 프로그램은 매년 다수의 벽화를 도심 곳곳에 남기며 마을 전체를 산악 풍경과 연결하는 캔버스로 바꿨다. 현지와 선주민, 국제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캐나다 선주민 문화, 자연 풍경, 커뮤니티 인물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중심부에 위치한 재스퍼 기차역은 로키산맥을 관통하는 철도망의 핵심 거점이다. 캐나다를 횡단하는 대표 장거리 여객 열차 ‘비아레일(VIA Rail)’과 로키를 관통하며 밴쿠버까지 가는 럭셔리 기차 ‘로키 마운티니어(Rocky Mountaineer)’ 등 주요 열차가 정차한다.


2 재스퍼 타운 구 소방서에 그려진 벽화. ‘업리프트! 재스퍼 뮤럴 페스티벌’은 매년 새로운 대형 벽화를 공공장소에 설치한다.
다운타운을 30분 정도 걸으며 돌아본 후엔 현지 미식가와 여행객들에게 모두 사랑받는 레스토랑 ‘더 레이븐 비스트로’, 재스퍼의 사랑방 같은 펍 ‘데스 도그 바&그릴’, 로키산맥의 맑은 물로 만든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재스퍼 브루잉 컴퍼니’, 해산물이 맛있는 레스토랑 ‘피들 리버’에서 대표 메뉴를 맛보았다. 신선한 캐나다산 식재료로 만든 음식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로키산맥을 바라보며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재스퍼 국립공원에서 딱 한 곳만 가야 한다면 멀린 호수가 답이다. 재스퍼 타운에서 44km 떨어진 멀린 호수는 길이 약 22km에 달하는 빙하호로 캐네디언 로키에서 가장 큰 빙하호다. ‘사악한(maligne)’이란 뜻을 갖고 있지만, 캐나다 로키산맥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꼽힌다. 짧은 시간 내에 멀린 호수의 정수를 만끽하려면 호수 한가운데 호젓이 떠 있는 스피릿 아일랜드까지 가는 크루즈 투어를 추천한다. 호수 선착장에서 크루즈에 올랐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비췻빛 호수를 따라 도열하듯 솟아 있는 만년설산이 장엄함을 뽐냈다. 배를 타고 40여 분 가면 스피릿 아일랜드에 도착한다. 눈이 쌓인 웅장한 산맥에 둘러싸인 눈부시게 푸른 호수, 비현실적인 장면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작은 섬은 피터 게일즈가 찍은 작품이 코닥의 ‘컬러라마’ 캠페인을 통해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장식하면서 수많은 사진가가 찾는 명소가 됐다. ‘행복한 순간은 바로 지금!’ 대형 옥외 광고가 전하려는 메시지와 딱 맞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스퍼에 머무는 동안 차로 이동하며 일부 산불로 그을린 나무를 발견했지만, 내가 본 대부분의 지역에선 산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산불로 인한 두려움과 상실의 시간은 재스퍼 주민들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건 바로 ‘자연의 강력한 힘’이다. 그을린 나무들 사이, 땅을 뚫고 솟아오른 푸릇푸릇한 식물과 들꽃들을 보았을 땐 가슴이 뭉클했다.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과 재스퍼 주민의 강한 연대로 재스퍼는 예전 모습으로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밴프 BANFF


하얀 눈과 검은 바위의 마블링이 기가 막힌 설산에 둘러싸인 마을에 들어서자 묘한 포근함이 들었다. 거대한 자연 속에 폭 파묻힌 듯 다정한 마을, 밴프 타운은 캐나다 밴프 국립공원의 베이스캠프인 마을이다. 런들, 캐스케이드, 슬리핑 버팔로, 설퍼까지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였다. 여행객들은 온종일 로키산맥을 탐험하거나 스키를 탄 후 밴프 타운에 들어와 여정의 피로를 푼다. 밴프 애비뉴 양쪽에는 레스토랑과 커피숍, 기념품 가게와 브랜드 숍들이 모여 있어 미식과 쇼핑을 즐기기도 좋다.
설퍼 마운틴 곤돌라는 보통 밴프 타운에 여장을 푼 사람들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다. 설퍼산 중턱에서 4인용 곤돌라를 타고 해발 2281m 높이의 전망대로 오른다. 곤돌라 창밖으로 보우(Bow)강과 터널산, 캐스케이드산의 봉우리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 아래서 반짝였다. 정상에 도착하면 사방이 만년설로 뒤덮인 로키의 장엄한 광경이 펼쳐진다. 눈 덮인 소나무 사이로 날카롭게 솟아오른 암봉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샘슨봉 꼭대기에는 노먼 샘슨이 만든 기상관측소가 있다. 그는 기상관측을 위해 샘슨봉까지 천 번 넘게 걸어서 올랐다고 한다. 관측소 내부에는 샘슨이 사용하던 가구와 집기가 보존되어 있다.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온 후엔 밴프 곤돌라 스타벅스로 향한다. 해발 1583m에 위치한 캐나다에서 가장 높은 스타벅스다. 대자연 속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만끽한다.
로키, 말 그대로 바위로 만들어진 산, 눈 덮인 바위산의 속살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밴프에서 레이크 루이스까지 이어지는 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인 1A(보우밸리 파크웨이)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존스턴 캐년을 만날 수 있다. 오랜 세월 빙하와 강물의 침식작용으로 생성된 협곡 아래로 크고 작은 폭포와 원시적인 침엽수림이 어우러진 이곳은 밴프 국립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하이킹 트레일이다. 하이킹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트레일을 올라갔다. “캐나다 서부는 뉴질랜드 남서부와 형성된 시기가 비슷합니다. 바다 밑이었다 지각운동으로 융기한 땅으로 2700만 년 전에 형성됐죠.” 걷다가 마주한 암벽에 새겨진 조개 화석을 보니, 이곳이 먼 옛날 바다였다는 게 실감이 난다. 주요 포인트는 로어 폭포와 어퍼 폭포, 정상의 잉크폿이다. 걷는 동안 운이 좋으면 곰이나 엘크, 여우 등 야생동물도 만날 수 있다.

다음 날은 특별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헬리콥터를 타고 로키산맥을 둘러보는 투어다. 알파인 헬리콥터는 1961년부터 운영해온 전문 업체로 캔모어에 위치한다. 비행 전 영상을 보며 안전 교육을 받은 후 헬리콥터에 올랐다. 헬리콥터는 캔모어의 상징인 세 자매봉을 통과해 캐네디언 로키의 마터호른으로 향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로키산맥의 맨 얼굴이 드러난다. 날카로운 석회암 봉우리, 수직으로 접힌 지층, 수천 년 동안 바람에 깎인 빙하 계곡까지 근접하면 지구 속을 들여다본 듯 전율이 인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스펙터클하게 넘나들다 보면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로키를 정복한 기분이 든다.
밴프를 찾는 여행객들이 머물지 못하더라도 한 번쯤 가는 곳이 페어몬트 밴프 스프링스 호텔이다. 이곳은 캐나다 태평양 철도의 역사와 함께한다. 1885년 철도가 완공되면서 로키산맥 부근의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형 호텔 체인을 건설했고, 마침내 1888년 6월, 스코틀랜드 귀족풍을 모방한 밴프 스프링스 호텔이 문을 열었다. 객실 250개와 원형 홀을 갖춘, 당시로는 세계 최대 호텔이었다. 우아함의 정점을 찍으려면 2층 카페에서 애프터눈 티를 즐겨보자. 하얀 테이블보, 반짝거리는 은 쟁반과 커틀러리, 티 우려내는 시간을 측정하는 모래시계까지, 완벽한 티타임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로키의 전망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니 18세기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