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인파, 꽉 막힌 도로, 소음으로 숨 돌릴 틈 없는 도심에서 문득 떠오른 질문. ‘홍콩 사람들은 이 소란을 어떻게 견딜까?’ 케이크 위 장식처럼 알량하게 도시를 장식한 공원 몇 개로 버티는 걸까? 이 짐작이 굉장한 무지였다는 것을 알려준, 홍콩의 대자연 두 곳.
젊은 어촌, 청차우섬
센트럴 페리 터미널 5번 항구. 홍콩 사람들이 도시가 지긋지긋할 때,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찾는 섬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고 있다. 홍콩에 다섯 번이나 왔지만 이 도시에 그런 자연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 섬 이름이 ‘청차우’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홍콩 지도를 15인치 모니터 사이즈로 펼치면 보이는 지명이 홍콩섬, 구룡반도, 란타우섬, 람마섬뿐이라는 사실을 핑계로 들이대고 싶지만 사실은 지난 방문에선 홍콩 도심의 맛집, 쇼핑, 바, 호텔 같은 곳에만 관심을 뒀기 때문이란 걸 고백한다.
에어컨 같은 건 애초에 달 생각조차 안 한 게 분명한 낡은 페리가 바다 위를 약 50분 정도 달려 청차우섬 선착장에 닿았다. 부둣가를 빼곡하게 채운 어선, 알록달록한 지붕과 벽을 가진 통라우가 만드는 촌스럽긴 하지만 어딘가 이국적인 풍경을 뒤로하고 옆 부두로 가서 곧장 작은 배로 갈아탔다. 비좁고 막힌 도로가 많아 차가 다닐 수 없는 섬에서 발이 되어주는 건 마을버스처럼 바다를 누비는 작은 보트들. 그 배를 타고 10분 정도 섬의 테두리를 따라 흘러가면 홍콩에서 가장 큰 캠핑장인 ‘사이위엔 캠핑 & 어드벤처 파크(Saiyuen Camping & Adventure Park)에 닿는다. 무려 4만2천975m²(약 1만3천 평)의 녹지 위에 펼쳐진 이 캠핑장은 (놀랍게도) 촌티가 일절 없는 세련된 풍경을 자랑한다. 아프리카 사파리, 아메리카 인디언, 몽골 게르, 트리 하우스 스타일의 텐트로 꾸민 글램핑장,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액티비티 시설을 갖춘 놀이터, 초원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과 염소가 있는 목장을 차례로 지나다가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면 뉴질랜드(국토 전체가 캠핑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가 부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순식간에 내 종아리를 67방 정도 물어뜯은 섬모기만 없었다면 말이다. (모기들은 우기에만 극성을 떠니 꼭 가을에 놀러 오라고 캠핑장 직원이 귀띔해줬다.)
아까 탄 배의 선장에게 전화해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산힝 스트리트(San Hing Street)와 팍셰 스트리트(Pak She Street)를 부지런히 둘러봐야 했기 때문이다. 과일가게와 건어물포, 철물가게 같은 ‘점포’들을 지나 궉캄키(Kwok Kam Kee)로 향한다. 언뜻 평범한 옛날 빵집으로 보이는 이곳은 매년 청차우 빵축제(Cheung Chau Bun Festival)가 열리는 석가탄신일마다 섬 최고의 스타가 되는 명소다. 청왕조(1644~1911) 시절 역병이 청차우에 창궐했을 때 분노한 신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빵을 제물로 만들어 바친 것이 이 축제의 기원. 하버뷰가 펼쳐지는 센트럴의 금융가에서 일하던 창업주의 아들 마틴 궉이 가업을 물려받으며 펼친 공격적인 마케팅과 홍보로 중·장년층뿐 아니라 젊은 세대들도 찾아와 인증 사진을 찍는 ‘핫플’이 됐다. 찰진 쌀 반죽에 팥소를 넣어 빚은 후 따뜻하게 쪄낸 ‘평안 빵’을 부적처럼 사 들고 다시 길을 나선다. 노포 사이에 얌전히 들어선 카페, 디저트집, 공예점, 타투숍 같은 새 공간들을 참견하기 좋아하는 동네 통장처럼 들락날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자로는 도일서점(渡日書店), 영어론 투-데이 북스토어(to_day_bookstore)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에서 만난 쏘에게 “청차우가 이렇게 흥미로운 섬인 줄 미처 몰랐다”고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걸었더니 동감하는 웃음이 돌아온다. “저도 청차우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와 며칠 머물렀는데 지낼수록 이곳이 좋아져서 3년째 살고 있어요. 처음엔 섬의 한적함이, 지금은 따뜻한 이웃들과 예쁜 카페들이 마음에 들어요. 이곳이 그냥 평범한 어촌이었다면 금세 지루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알고 보면 심심할 틈이 없는 동네예요. 맛있는 커피와 음식, 주말이면 섬을 찾아오는 젊은 인파로 활기가 넘치거든요. 이제 청차우는 자연과 도시의 매력을 모두 갖춘 젊은 섬이 됐죠.”
청차우섬에서 당일 나들이를 즐길 계획이라면
해변에서 놀기
청차우섬은 유명한 해변부터 이름조차 없는 모래사장까지 다채로운 바다 놀이터를 갖췄다. 하루, 이틀 정도만 머물다 가는 이들은 대부분 페리 선착장이 있는 퉁완(Tung Wan) 해변과 쿤얌완(Kwun Yam Wan) 해변으로 향한다. 초승달 모양으로 펼쳐진 퉁완은 해수욕을, 윈드서핑 센터가 있는 쿤얌완은 스탠드업 패들링과 카약, 카이트 서핑 등의 액티비티를 즐기기 좋다.
하이킹 하기
쿤얌완 해변과 치마항(Chi Ma Hang) 곶 뒤로 이어지는 850m 길이의 트레일, 작은 만리장성(Mini Great Wall)은 시간이 부족한 섬 여행자들이 하이킹 기분을 만끽하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산책로. 다채로운 모양의 기암괴석, 시원하게 펼쳐지는 바다 전망, 철새 등 볼거리가 많다.
팍타이 사원 구경
청차우섬의 심장부 같은 곳으로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도교 사원이다. 사원 안도 볼거리가 많지만 진짜 추천하고 싶은 목적지는 그 앞에 펼쳐진 농구 코트. 해가 슬슬 기세를 꺾는 무렵이면 마을 아이들과 동네 개들이 나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뜀박질, 농구 등을 즐긴다. 청차우의 평화로운 일상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홍콩식 리트리트, 사이쿵
홍콩에 머무는 엿새 동안 매일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했다. “홍콩에 이런 데가 있었어요?” “홍콩에서 그런 걸 할(볼) 수 있다고요?” 사이쿵으로 향하는 길 위, 바다인 줄 알았던 장대한 면적의 하이 아일랜드 저수지(High Island Reservoir) 앞 공터에서 굉장한 냄새를 풍기는 거대한 분변 덩어리들을 봤을 땐 가이드 미셸에게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다. “이거 사람이 눈 거 아니죠? 여기 설마 야생 짐승이 있어요?” 얼마 가지 않아 그 흔적의 주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야생 들소들. 고작 소 몇 마리에 호들갑을 떠는 건 여기가 스리랑카나 아프리카가 아니라 홍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현대적인 풍경을 가진 센트럴 지구에서 택시를 타고 겨우 40여 분 달려 왔을 뿐인데. 게다가 여기서 5분만 더 달리면 1억 4천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화산암 기둥을 볼 수 있다.
홍콩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Hong Kong UNESCO Global Geopark)의 하이라이트인 하이 아일랜드 저수지 이스트 댐(East Dam)은 1978년 홍콩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물론 댐을 보자고 구룡반도 북쪽 끄트머리까지 찾아오는 건 아니다. 신이 밟은 듯 물결 모양으로 휜 주상절리, 파이프 오르간처럼 생긴 육각기둥 절벽 등의 화산 지형, 파도가 끈질기게 구멍을 뚫어 생긴 바다 동굴의 절경을 눈에 담으며 트레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대한 지질공원의 품에서 홍콩 영토에 혼자 남은 것 같은 적막을 더 누리고 싶었지만 사이쿵에 할당된 시간은 한나절뿐. 이제 그 유명한 광둥식 해산물 요리를 맛볼 시간이다.
일행에게 “자연을 좋아해서 지질공원이 너무 기대된다”고 떠들었지만 사실 가장 기대한 건 코앞의 바다를 식재료 저장고처럼 쓰는 해산물 거리의 맛집들이었다. 식탁 위에 부려지는 새우와 백고동 찜, 마늘·굴소스·고추 같은 것으로 만든 양념을 듬뿍 얹은 가리비와 키조개, 각종 딤섬과 김치처럼 늘 곁들이는 공심채 볶음을 보며 옆자리에 앉은 노부부가 혀를 내둘렀다. 그걸 세 명이서 싹싹 다 긁어 먹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해산물 거리에 위치한 식당들에선 항구 앞 수상시장에서 직접 사온 식재료도 (비용을 받고) 원하는 스타일로 요리해준다. 어부가 그날 새벽에 잡은 싱싱한 해산물에 비견할 수 있는 식재료가 또 있을까? 먹는 데 좀 더 극성을 발휘하는 미식가들은 전날 밤 아예 고기잡이 배 위에 올라 직접 수확한 각종 해물을 회로 먹고 쪄 먹고 볶아 먹는다고 한다.
먹는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겠다. 사이쿵에 온 지 3시간 정도 지났고 이제 배를 타고 해변으로 갈 차례다. ‘빅 웨이브 베이’라는 뜻의 타이롱완(Tai Long Wan)은 사이쿵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네 곳의 해변을 품고 있다. 사이완(Sai Wan), 함틴완(Ham Tin Wan), 타이완(Tai Wan), 퉁완(Tung Wan) 중 타운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완 비치를 선택했다. 바람이 센 날엔 서핑도 할 수 있다는 이곳은 해상구조대와 작은 매점, 샤워 시설 등을 갖춘 작은 해수욕장과 캠핑 사이트가 있어 가족 단위 여행자에게 인기가 높다. 모래사장에 발을 딛자마자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린 후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영복을 챙기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맨몸으로 해수욕을 즐기는 홍콩 사람들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오늘 나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안 100km에 육박하는 맥리호스 트레일(MacLehose Trail)의 일부를 걷고, 홍콩 최고의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거리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배를 타고 비밀스러운 해변으로 들어와 바다 맛을 봤다. 1시간 후엔 다시 도시로 돌아가 센트럴 지구 한복판에 자리한 국가문화유산이자 복합문화공간의 마케터를 만나 인터뷰를 해야 한다. 한국이라면 사흘은 족히 필요한 일정을 이곳에선 8시간이면 충분히 치를 수 있다. 그게 바로 홍콩이다.
사이쿵을 구석구석 경험하고 싶다면
타이롱완의 해변 호핑
정박한 배들이 없고 오직 흰 모래와 푸른 바다만 있는 해변을 찾는다면 사이완, 함틴완, 타이완, 퉁완을 품은 타이롱완을 찾을 것. 그냥 비치타월 깔고 누워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겨도 좋지만 서핑과 스탠드업 패들보딩, 카야킹 같은 액티비티도 할 수 있다. 사이완과 함틴완엔 편의시설이 있어 주말이나 한여름엔 인파가 몰리기도 한다. 한적함이 좋다면 타이완과 퉁완을 선택할 것.
임틴차이 탐방
사이쿵에서 배로 약 15분 정도 나가면 닿는 임틴차이(Yim Tin Tsai)섬은 하카족의 본거지로 염전 마을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풍경 때문에 나들이지로 인기가 높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자 역사유산
성요셉성당(St Joseph’s Chapel), 바다소금 생산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워크숍 등 관광객을 위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쏠쏠하다.
맥리호스 트레일 하이킹
홍콩 4대 트레일 중 하나인 맥리호스 트레일엔 칼로리 소모량이 꽤 높은 난도의 코스가 있다. 2구간의 샤프 피크(Sharp Peak)는 봉우리가 뱀같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해발고도는 468m로 낮은 편이지만 능선이 가파르기 때문에 등산하는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