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마리 토니가 수십 년간 매주 들른 카바냘 시장.
3 발렌시아 전통주인 미스텔라. 달콤한 향과 맛이 일품이다.
4 마루하에게 물려받은 그릇장, 마리 토니가 혼수로 마련한 그릇, 시어머니의 레시피로 만든 코카 데 얀다로 완성한 따뜻한 테이블.
발렌시아 할머니의 추억
지중해가 보이는 발렌시아의 바닷가 마을, 카바냘(El Cabanyal)로 향하는 길. 버스엔 파라솔을 멘 젊은 남녀와 휴가를 즐길 준비가 된, 한껏 상기된 얼굴의 여행자 무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무리에 섞여 버스에서 내린 후 혼자 반대편으로 걸었다. 알록달록한 타일로 꾸민 집들을 지나 카바냘 시장(Mercado del Cabanyal)에 다다랐다. 물결치는 짧은 금발 머리에 말끔한 흰 원피스를 입은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 이하 마리 토니)가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그와 시장 앞에서 만나기로 한 이유는 하나. 오늘 만들 음식을 위한 신선하고 좋은 식재료를 사기 위해서다. 나를 보자마자 다정하게 끌어안고 양 볼을 살갑게 맞대는 마리 토니는 스페인 내륙 지방인 알바세테(Albacete)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부모님과 발렌시아로 이주한 후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친구와 결혼해 쭉 이곳에 살고 있는 토박이다. 우리는 오늘의 주인공이 될 음식, 발렌시아식 파에야를 위한 식재료를 사기 위해 가장 먼저 정육점을 찾았다. 토끼 한 마리와 닭 한 마리를 주문하자마자 점원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고기를 내어준다. “이거 보세요. 머리까지 붙어 있죠? 아주 싱싱한 고기로 드립니다.” 과일 가게에서 붉은 기가 감도는 연노랑색 납작복숭아, 말캉한 과육을 자랑하는 살구, 진한 보랏빛 체리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제철 과일도 서너 가지 골랐다. 눈인사로 마리 토니를 반겨주는 단골 채소 가게의 주인은 근황을 나누며 레몬, 콩, 토마토와 순무를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고 값을 매긴 후 순식간에 내어준다. 커다란 꽃다발처럼 싱그럽고 알록달록한 것으로 가득 채운 장바구니를 들고 이제 집으로 향한다. 마리 토니의 집은 시장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1층엔 베이커리와 카페, 2층부턴 가정집이 있는 전형적인 스페인 아파트다. 짙은 밤색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편지가 빼곡하게 담긴 액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든다. “이건 시부모님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둔 거예요.” 마리 토니의 정다운 설명과 함께 들어선 거실엔 가족사진, 부부의 이니셜을 새긴 십자수 등 그녀의 40년 결혼 생활을 모두 품은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곳곳에 숨 쉬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면 그녀가 이 집에서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 나타난다. 10여 년 전 구옥의 낡음을 지우고 말끔하게 새단장한 부엌이다.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라 애정이 많죠. 병원에서 일하며 65세까지 쉼 없이 달리는 동안에도 가족들의 끼니를 챙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매일 퇴근 후 밤마다 남편과 아이들이 먹을 며칠 분의 식사를 미리 준비했거든요.” 시장에서 사 온 식재료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그가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때는 요리가 일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은퇴도 했고 여유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이제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보는 일이 취미가 됐어요.”
마리 토니는 요즘 15년 전에 돌아가신 그의 시어머니, 마리아 아벨리얀 후안(Maria Abellán Juan, 이하 마루하)이 만들어준 추억 속 음식을 되짚는 일이 즐겁다. “남편 호아킨과 저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 친구 사이였어요. 그와 사귀게 된 후 가족에게 초대를 받아 집에 갔고, 마루하의 요리를 그때 처음 먹었죠. 제 나이 스물두 살 때 일이에요.”
마리 토니는 그때 발렌시아 음식의 세계와 매력을 처음 만났다고 회상한다. “스페인은 지역마다 음식의 특색이 아주 다릅니다. 내륙 지역 출신인 제 어머니는 고기, 소시지, 저장육을 주재료로 하는 구이, 찜, 수프를 즐겨 만드셨죠. 반면 마루하는 해산물을 즐겨 쓰곤 했어요. 싱싱한 해산물 구이와 튀김, 파에야는 물론 오븐에 구운 쌀 요리 아로스 알 오르노(arroz al horno), 콩·감자·당근 등 온갖 채소에 오일과 소금만 넣어 데치는 에르비도(hervido) 등 전형적인 지중해 스타일의 발렌시아 음식을 내어줬죠.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마루하와 함께한 그 시절이 너무 그립네요.”
결혼 후 매주 토요일 마리 토니와 호아킨은 서로의 부모님 댁을 번갈아가며 방문해 온 가족과 함께 식사를 즐겨왔다. 그때 식탁에 오른 것 중 그의 추억에 깊이 남은 한 접시가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볼 음식이다.


마루하에게서 마리 토니에게로
레몬 향이 짙게 배어 나오는 코카 데 얀다(coca de llanda)는 마루하가 종종 만들어줬던 디저트 중 가장 쉽게 따라 할 수 있어 더 자주 만들어 먹은 음식. 발렌시아어로 코카는 케이크, 얀다는 빵을 넣어 굽는 네모난 금속 틀을 뜻한다. 마리 토니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레몬 껍질을 강판에 갈기 시작했다. 요거트 컵으로 대충 계량한 밀가루 위에 달걀, 설탕을 넣고 고루 섞은 후 반죽을 네모반듯한 틀에 부어 그 위에 계핏가루와 설탕을 뿌린 다음 오븐에 넣으면 준비 끝. 빵이 고소하게 구워지는 동안 거실로 나와 테이블 세팅을 시작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그릇장은 자수를 곱게 새긴 냅킨, 테이블보와 온갖 그릇이 가득한 마리 토니의 보물 창고다. 그중 매끈하고 묵직한 갈색과 상아색 식기를 꺼내며 그가 추억에 잠긴다. “이 그릇장 역시 마루하에게 물려받은 거예요. 여기 보이는 그릇, 찻잔 세트는 제가 혼수로 마련한 거고요.” 오랜 세월과 따뜻한 기억을 품은 기물들을 만지는 그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설탕과 계피의 달콤한 향이 공기를 타고 집 안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시장에서 사 온 잘 익은 과일, 겉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코카 데 얀다를 접시 위에 곱게 담고 리넨 냅킨을 옆에 두니 제법 근사한 식탁이 완성됐다. “발렌시아에서는 식후 증류수에 브랜디와 와인을 섞어 만든 전통주 미스텔라(Mistela)를 즐겨 마셔요.” 마리 토니가 잔을 건네며 달큰하고 톡 쏘는 술을 권한다. 상큼한 레몬 껍질을 소복하게 뿌린 발렌시아식 스펀지케이크를 한 조각 베어 입안에 넣었다. 맛이 어떤지 궁금한 눈초리를 보내는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한 조각이 혀 위에서 채 사라지기 전에 다음 조각이 생각나게 하는 맛이에요.”
스페인에서 ‘영혼의 음식’, ‘엄마의 손맛’을 이야기할 때 파에야는 빠질 수 없는 메뉴. 마리 토니가 우리에게 만들어줄 파에야는 발렌시아의 지역색이 가득 담긴 파에야 발렌시아나(Paella Valenciana)다. “파에야는 내일 교외에 사는 친구 집으로 가서 해 먹는 것 어떨까요? 그의 별장에 파에예로(paellero, 파에야 전용 화덕)가 있거든요. 발렌시아엔 마당 한쪽에 파에예로를 갖춘 집이 꽤 흔해요.” 쌀 주산지 발렌시아에는 스페인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가족이 모여 직접 만들어 먹는 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해산물, 채소, 고기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지만, 파에야 발렌시아나는 닭과 토끼, 콩, 달팽이처럼 농가에서 쉽게 구하던 재료로 만들던 방식이 오늘까지 전해진다.
다음 날, 마리 토니의 가족과 함께 그의 친구 집을 찾았다. “발렌시아산 둥근 쌀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사프란은 뜨거운 물에 띄워 노란빛을 충분히 우려낸 뒤 넣어야 하고요. 쌀은 팬 가운데 길게 부어 물의 양을 가늠한 후 고르게 펼쳐요. 마지막에 로즈메리를 얹으면 더 깊은 풍미를 낼 수 있답니다.”
올리브를 곁들여 와인을 마시며 모두가 느긋하게 음식이 익기를 기다린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드넓은 팬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노릇하게 물든 쌀 사이로 잘 익은 고기와 담백한 세 가지 콩이 어우러져 첫 술부터 감칠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마루하는 항상 식사용 나이프의 끝을 곧추세워서 파에야를 살살 긁어 잘 익었는지 확인한 후 음식을 냈어요. 쌀이 팬에 살짝 눌어붙어 소카랏(socarrat, 발렌시아어로 탄 상태를 의미한다)이 생기면 나이프 끝이 팬까지 닿지 않거든요. 바삭하고 얇은 소카랏이 느껴지면 비로소 환하게 미소를 지었죠. 저도 어느새 어머니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더라고요.” 마침, 꼬들꼬들한 소카랏의 식감과 여러 식재료가 한껏 농축된 맛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파에야로 배를 든든히 채운 후엔 달콤한 미스텔라 한 잔과 코카 데 얀다 한 조각으로 완벽한 발렌시아 가정식 한 끼를 마무리했다. 추억과 정성,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한데 모인 다정한 식탁이었다.
파에야 발렌시아나 Paella Valenciana

재료
쌀 350g, 닭고기 500g, 토끼 고기 200g, 잘 익은 큰 토마토 1개, 바호케타(bajoqueta) 150g, 로젯(rojet) 150g, 가로폰(garrofón, 리마콩) 150g, 올리브유 125ml, 피멘톤 스위트(스페인 훈제 파프리카 가루) 1티스푼, 마늘 2쪽, 사프란·로즈메리 약간, 물, 소금
1 닭고기와 토끼 고기는 냄새가 덜 나도록 껍질을 벗기고 흐르는 물에 씻은 뒤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손질해 소금을 살짝 뿌려 둔다.
2 껍질째 먹는 납작콩인 바호케타와 흰 납작콩인 로젯은 5cm 정도로 잘라 손질하고, 리마콩인 가로폰은 껍질을 벗겨 준비한다.
3 토마토는 강판에 갈아 준비하고, 마늘은 잘게 다진다.
4 파에야 팬 중간에 기름을 두르고, 가장자리 부분에는 소금을 살짝 뿌린다.
5 팬이 달궈지면 손질한 닭고기와 토끼 고기를 넣고 골고루 익도록 저어가며 볶는다.
6 고기 겉면이 갈색으로 잘 익으면 세 가지 콩, 토마토, 마늘을 넣고 볶는다.
7 6에 피멘톤 스위트를 넣고 타지 않도록 바로 팬 손잡이 볼트를 덮는 정도까지 물을 붓는다.
8 물이 끓기 시작하면 5분간 놔두었다가, 중불로 줄여 20~30분간 더 끓인다. .
9 기다리는 동안 종지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사프란을 띄워 색이 우러나게 한다.
10 노랗게 색이 우러난 사프란 물을 8에 넣고, 소금을 넣으며 간을 조절한다.
11 강불로 바꾸고, 쌀을 파에야 팬 중간에 일자로 붓는다. 쌀이 국물 위로 봉긋 올라올 정도로 채워지면 적절하다. 부족하면 물을 더 붓거나 소금을 넣어 간을 조절한다.
12 쌀이 골고루 익을 수 있게 팬에 펼친다.
13 로즈메리를 넣고, 쌀이 익을 때까지 10분간 강불로 끓이다가 약불로 줄여 10분간 더 뜸을 들인다.
TIP
발렌시아에서는 팬에 쌀이 살짝 눌러붙어 바삭한 소카랏이 생긴 파에야를 즐긴다.
코카 데 얀다 Coca de Llanda


재료
달걀 3개, 베이킹소다 15g, 내추럴 요거트 125g, 박력분 375g(요거트 3컵 분량), 설탕 125g(요거트 1컵 분량), 올리브유 또는 해바라기씨유 125g, 레몬 1개, 토핑용 계핏가루 약간
1 깨끗하게 씻은 레몬을 강판이나 채칼로 얇게 벗긴 레몬 껍질을 준비한다.
2 밀가루는 체에 걸러 준비한다.
3 설탕과 달걀을 넣고 거품기로 섞는다.
4 3에 오일과 요거트를 붓고 거품기로 섞는다.
5 4에 체로 거른 밀가루를 붓고 거품기로 섞는다.
6 5에 레몬 껍질과 베이킹소다를 넣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거품기로 섞는다.
7 베이킹 틀에 6를 붓는다.
8 토핑용으로 준비한 계핏가루와 설탕을 표면에 원하는 만큼 살짝 뿌려준다.
9 170℃로 약 20분간 예열해 둔 오븐에서 35~40분 동안 굽는다.
TIP
· 거품기 대신 블렌더를 사용해도 좋다.
· 재료는 요거트 컵으로 계량하면 만들기 쉽다.
· 베이킹 틀이 유리, 자기, 실리콘 소재일 경우 버터를 안쪽에 골고루 발라주고, 메탈 소재일 경우 종이 포일을 안쪽에 깔아 케이크가 들러붙지 않도록 한다.
· 메탈 소재 포크나 젓가락으로 중앙 부분을 찔러 반죽이 묻어나지 않으면 잘 구워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