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이유는 그저 이 나라 저 나라 여행하듯 세계 각국의 맥주를 맛보고 싶어서. 수업을 꼬박꼬박 챙겨 들으며, 나라별 시음 맥주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그러다 우연히 “맥주는 양조장 굴뚝 아래서 마실 때가 제일 맛있다”라는 독일 속담을 알게 됐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양조장 굴뚝 아래서 마시는 맥주는 어떤 맛일까. 가보지도 않은 양조장이 그리웠다. 맥주학교 수료증을 받던 날, 출장 의뢰 전화를 받았다. 체코였다. 그것도 플젠의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을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1842년 10월 5일 플젠 시민들이 독일의 양조장인 요세프 그롤을 초빙해 만든 맥주가 필스너 우르켈입니다. 필스너 우르켈을 제외한 맥주는 필스너 스타일일 뿐이죠.” 다니엘 슈페일 매니저가 공기 반 자부심 반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맞아줬다. 그는 공장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시설은 현대화됐지만 제조 공정은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한다고 강조했다. “놀랄 준비됐나요? 곧 아주 특별한 시음을 하게 될 거예요.” 그를 따라 내려간 지하 8m 깊이의 공간에는 커다란 오크통이 도열해 있었다.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저온에서 효모 발효를 위해 고안한 저장고였다. 오크통 안에는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맥주가 효모와 함께 익어가는 중이었다. 45년 넘게 양조장에서 일한 브루어의 손이 기울이는 섬세한 각도에 따라 황금빛 액체가 튤립 모양 잔에 담겼다. 갓 내린 눈처럼 순수한 거품이 덮인 호박색 맥주를 눈으로 먼저 음미한 후 경건하게 한 모금을 넘겼다. 이 감격스러운 맛을 어떻게 표현할까? 홉과 몰트가 조화를 이룬 맛은 쌉싸래하면서도 구수했다. “맥주는 양조장 굴뚝 아래서 마셔야 제맛”이라는 말의 뜻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때 맹렬히 다짐했다. 앞으로 기회가 있는 한, 양조장 굴뚝 아래에서 맥주를 마시겠노라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찾아간 곳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다. 이곳은 1759년, 아서 기네스가 9천 년 임대계약을 맺은 세인트제임스 게이트 양조장 내에 자리한 체험 공간이다. 한층 한층 오르며 기네스를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기네스는 싹을 틔우지 않은 원두처럼 강하게 볶은 보리를 몰트에 섞어 커피처럼 풍미가 고소하며, 처음 잔에 따를 때는 ‘딥 루비 레드’ 빛깔을 띠다가 서서히 초콜릿색으로 변한다는 걸 알게 됐다. 기네스 아카데미에선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기네스 따르는 법’도 배웠다. 45도 각도로 따른 후 질소가 충분히 섞이게 2분간 가만히 두는 것이 핵심이다. 보드라운 거품이 촘촘하게 채운 기네스 한 모금을 들이켜자 “캬!” 소리가 절로 났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기네스를 마시는 여행자였다.
덴마크 코펜하겐에 갔을 때다. 물거품이 되어도 좋다는 인어공주보다 맥주의 뽀얀 거품에 가슴이 더 뛰는 나는 칼스버그 양조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양조장 마당에서 코펜하겐의 명물, 인어공주 동상을 영접했다. 칼스버그 창립자의 아들 카를 야콥센이 어릴 때부터 안데르센의 동화를 사랑해 인어공주 동상을 코펜하겐 항구에 세웠단다. 코펜하겐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맥주는 미켈러다. 고정된 양조장이 없는 ‘집시 브루어리(Gypsy Brewery)’로 실험적인 맥주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미켈러 러닝 클럽’이라는 신선한 음주 문화도 만들었다. 오래오래 맥주를 즐기기 위해 달리기를 한 후 함께 미켈러를 마시는 모임이다. 미켈러 바에 앉아서 맥주를 마셔도 맛있는데, 뛰고 난 뒤 마시면 그 맛이 어떨지 상상만 해도 상쾌했다.
국토 면적 3만278㎡의 작은 땅에 200여 개의 양조장이 있다는 벨기에를 여행할 때도 어김없이 양조장 굴뚝 아래에서 맥주를 마시려고 애썼다. 중세 모습이 오롯한 소도시 메르헨에서는 1471년에 문을 연 앙커 양조장을 찾았다. 대표 맥주의 이름은 구덴 카롤루스인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가 사랑한 맥주로 유명하다. 양조장 비스트로에 앉아 메뉴에 어울리는 맥주를 매칭해주는 세 코스 요리를 즐기다 보니 황제가 부럽지 않았다. 벨기에 맥주 중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스텔라 아르투아 양조장에도 들렀다. 워낙 진하고 보디감 있는 맥주를 맛보다 보니 상대적으로 밍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여름의 더위를 날리기엔 이만한 맛이 없구나 싶었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는 양조장 대신 펍 트램에 올랐다. 헬싱키 펍 트램은 시네브리코프 양조장에서 만드는 맥주 브랜드 코프에서 운영하는 빨간 트램이다. 뒷문으로 타서 입장료를 낸 후 맥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미콘 거리에서 출발한 펍 트램은 아테네움, 원로원 광장, 캄피, 칼리오 등 헬싱키의 명소를 쭉 돌았다. 트램이 레일 위를 달리는 덕에 차창 밖 행인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때 맥주잔을 들고 있는 기분이란! 이런 게 여행자의 특권이 아닐까 생각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역시 세상은 넓고, 경험할 일은 많으며, 맛볼 맥주는 더 넘친다. 맥주 여행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알고 마시면 더 맛있는 유럽 맥주
구덴 카롤루스 Gouden Carolus
1471년부터 앙커 브루어리에서 만들어온 구덴 카롤루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가 즐겨 마시던 에일 맥주다. 세 번 발효해 알코올 도수가 높다. 맛과 향이 깊은 골든 페일 에일, 구덴 카롤루스 트리플 등 벨기에 스타일 에일 맥주의 다양한 변주를 즐길 수 있다.
스텔라 아르투아 Stella Artois
벨기에 루벤에서 만들기 시작한 필스너 맥주. 스텔라 아르투아란 이름은 양조장 설립자 세바스티안 아르투아의 성과 라틴어 ‘스텔라’의 합성어로, 크리스마스에 양조를 시작해 이름에 별을 뜻하는 ‘스텔라’를 넣었다. 향긋하고 청량한 맛만큼이나 맥주를 돋보이게 하는 시그너처 잔도 인기다.
코프 Koff
1819년부터 핀란드 시네브리코프 양조장에서 만들어온 맥주다. 러시아 점령기에 헬싱키의 수오멘린나섬에서 만들기 시작해, 술고래로 유명한 러시아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육지로 진출했다고. 코프 오리지널, 오리지널보다 조금 더 가벼운 코프3, 깊고 진한 코프 포터를 맛볼 수 있다.
칼스버그 Carlsberg
필스너 우르켈이 나온 지 64년 후 밝은색 라거를 선보인 덴마크 맥주다. 1883년 세계 최초로 라거(하면발효) 효모의 배양균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타 양조장에 무료로 공유해 라거 맥주 발전에 기여했다. 칼스버그 필스너의 경우 필스너 우르켈에 비해 가볍고 탄산이 섬세하다.
미켈러 Mikkeller
홈 브루잉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맥주 브랜드로 성장한 미켈러는 종류가 다양해 마실수록 호기심이 증폭되는 크래프트 맥주다. 지금까지 출시한 맥주가 2천여 종이 넘는데 겹치는 맛이 없다. 라거는 물론 IPA, 스타우트, 사우어 비어, 야생 효모로 발효시킨 후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스폰탄 등 실험적인 맥주를 선보인다.
필스너 우르켈 Pilsner Urquell
1842년부터 체코 플젠에서 만들어온 라거 맥주다. 필스너 우르켈의 인기로 목 넘김이 부드러운 황금빛 라거를 ‘필스너 스타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필스너 우르켈 등장 전, 몰트를 주원료로 한 상면발효 에일 맥주와 달리 효모를 가라앉혀 발효하는 하면발효 방식에 홉 함량을 높여 풍미를 더했다.
기네스 Guinness
18세기부터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만들기 시작한 스타우트(상면발효 에일 흑맥주)다. 몰트와 볶은 보리를 사용해 커피 맛이 나며 블랙에 가까운 짙은 색과 벨벳처럼 부드러운 순백의 거품이 매력적이다. 기네스는 매년 세계 최고 기록을 모아 발행하는 기네스북의 후원자기도 하다.
글을 쓴 우지경은 여행지에서는 늘 그 지역 술을 마시는 로컬 맥주 탐험가. 낯선 나라를 여행하며 익숙한 메뉴와 공간이 늘어나는 게 즐겁다. 즐거운 일을 오래오래 하기 위해 매일 수영하고 글을 쓴다. <리얼 포르투갈>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스톱오버 헬싱키> <배틀트립>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