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애호가를 위한 스위스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Park Chanyong

시계 애호가를 위한 스위스

The town of Time

스위스의 작은 시계 마을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
  • written by Park Chanyong
2024년 07월 08일

이 글의 목적지는 스위스의 빌/비엔이다. 중간의 슬래시(/)까지 도시의 정식 명칭이다. 이름을 이해하는 건 그 자체로 스위스를 약간은 이해하는 셈이 된다. 빌/비엔은 이 도시의 이름을 읽는 두 가지 방법이다. 빌(Biel)은 독일어, 비엔(Bienne)은 프랑스어다. 이 도시는 스위스에서 유일하게 여전히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곳이며, 이는 그 자체로 빌/비엔만의 활기찬 기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빌/비엔은 작은 도시다. 볼만한 게 없다고 해도, 경치가 좋다거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요소 역시 많지 않다고 말해도 큰 실례는 아니다. 말하자면 운전하다 잠깐 화장실에 들르고 싶어 들어간 뒤 머물지 않고 바로 나올 정도의 도시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아주 인상적인 시계 관련 장소가 몇 곳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 시계라는 요소로 도시를 보면 빌/비엔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산업으로의 스위스 손목시계가 도시 곳곳에 있다. 도시에 있는 경기장 이름도 ‘티쏘 아레나’. 백화점에서 파는 시계 브랜드 그 티쏘다. 아울러 지금 스위스 손목시계 업계 최대 브랜드 두 곳이 모두 이곳에 공장을 뒀다. 롤렉스와 오메가. 그중 오메가는 본사 건물 일부를 박물관으로 삼아 일반인에게도 공개한다. 이 대단한 박물관은 시계 애호가가 아니어도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둘이다. 건축과 역사.

오메가 박물관을 포함해 근처 오메가와 스와치 그룹의 건물은 건축가 반 시게루의 작품이다. 반 시게루는 2014년 프리츠커상을 받은 일본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다. 프리츠커의 인정을 받은 그의 특기는 자재와 구조에서 보여주는 창의성이다. 그는 현대건축 세계에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던 자연 소재를 전면적으로 사용했다. 반 시게루는 약 30년 전부터 철근이나 콘크리트가 아닌 목재, 대나무나 섬유 등의 소재를 건축 작업에 적용했다. 오늘날 이런 소재가 친환경이나 지속가능이라는 수식어를 듣기 훨씬 전부터 그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친숙하고 저렴한 소재로 건축을 만들어왔다.

흔한 소재로 만든 지속가능한 물건이라면 역시 시계다. 그러한 면에서 오메가 박물관은 반 시게루의 철학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건 박물관 안에 들어가보면 바로 보인다. 이 박물관에서 눈에 띄는 건 천장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의 흔적이다. 이건 장식이 아닌 구조체다. 첨단 건축에 목재 골조를 활용하는 건 반 시게루의 특기이자 특징 중 하나이며, 그건 이 건물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목재 골조는 100% 스위스산이며 거의 스프루스 수종이다. 대부분 스와치 그룹이 직접 관리하는 숲에서 왔다고 한다. 건축적 디테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메가 박물관 건물만 들여다봐도 반나절은 보낼 수 있을 듯하다.

스위스 현지에 오면 ‘백화점 명품관 브랜드’와는 다른 손목시계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이란 말하자면 산속에서 작은 쇳덩어리를 깎고 조립해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다. 스위스인은 오늘날의 손목시계가 고가품으로서 허영과 재투자의 대상이 되었을지라도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않는다. 그 사실은 오메가 박물관 곳곳에도 새겨져 있다.
오메가 박물관에서는 그들의 시작점과 소형 기계식 손목기계의 발전 과정, 그 결과 오메가가 이룬 성과물을 구경할 수 있다. ‘오메가’라는 이름이 붙은 첫 무브먼트(기계식 시계의 엔진 역할을 하는 구동장치), 이들이 함께한 역사적 순간들(이를테면 인류 최초로 우주 유영에 성공한 우주비행사의 손목시계), 이들의 성공적 변신을 상징하는 각종 마케팅 지표(오메가와 영화 〈007〉 시리즈가 함께한 시계들)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스위스 시계의 역사를 한 줄로 정리하면 “정밀기계 대량생산 기술로 사치품이 된 뒤 마케팅을 통해 사치품의 지위를 지속시킨다” 정도가 된다. 이 박물관이 그 흐름의 징표다.

같은 건물 2층에 있는 스와치 박물관도 재미있다. 백화점에서는 스와치가 오메가보다 저렴한 시계 브랜드지만 실제 세계에선 반대다. 사실 스위스 시계 업계는 1970년대 일본의 쿼츠 손목시계 개발로 거의 망할 뻔했다. 이들이 고통스러운 구조 조정과 체질 개선을 통해 도달한 결과가 스와치다. ‘저렴한 가격과 스위스의 신뢰도’라는 이미지 덕에 스와치는 크게 성공했고, 그때 쌓은 부로 오메가 등의 고가 브랜드까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 보면 1~2층의 두 박물관은 스위스 시계 산업의 부활을 눈으로 확인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기왕 시계에 관심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면 갈 곳은 많다. 오메가 박물관과 스와치 박물관이 있는 ‘시테 뒤 텅(Cité du Temps)’에서 차로 5분, 걸어서 20분 정도면 ‘누에스 무제움 빌(NMB)’에 도착한다. 빌 지역의 각종 문화와 역사를 정리해 전시한 박물관이다. 이곳의 상설 전시 섹션 중 시계 산업도시 빌의 면모가 전시되어 있다. 롤렉스는 공식 박물관이 없지만 이 박물관에 롤렉스의 역사와 제품이 전시돼 있다.

그 외에도 갈 곳은 많다. 빌/비엔에서 차로 40분, 기차로 1시간 10분이면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 도착한다. 라쇼드퐁에는 국제 시계 박물관이 있다. 그 옆 도시 르로클(Le locle)에도 시계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을 이루는 쥐라산맥 지역이고, 이 산속 마을 곳곳이 모두 유서 깊은 고급 정밀 시계 공업지역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다면 산맥을 넘어 차로 1시간 반쯤 거리에 있는 프랑스 브장송(Besançon)까지 가봐도 좋다. 브장송에도 대규모 시계 공장이 있었고, 그 역사가 브장송 시계 박물관 전시로 남았다.

이런 여행을 떠날 마음이 정말 있다면 마침 올해가 좋은 때다. 스위스항공이 직항 운항을 시작했다. 인천-취리히 직항편이 매주 월·수·토요일에 출발한다. 스위스 여행의 반나절 코스라면 건축과 시계를 함께 즐긴다는 면에서 빌/비엔이 갈 만한 곳이다. 취리히공항에서 내려 기차를 한 번 갈아타면 약 2시간 만에 빌/비엔에 도착한다.

만약 정통파 스위스 시계 여행(?)을 원한다면 제네바에서 출발하는 게 더 맥락에 맞다. 스위스 최대의 도시는 취리히(Zürich)지만 스위스 시계 산업의 수도 격 도시는 제네바(Geneva)다. 제네바에서 차로 쥐라산맥 위로 올라가는 길이 바로 최초의 스위스 워치메이커들이 산속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그 길이다. 대부분 소도시에는 2~3성급 호텔이 한두 개 있으며, 웬만하면 깨끗한 비즈니스 호텔급은 된다.


글을 쓴 박찬용은 잡지 에디터, 저자다. 여행잡지, 시계잡지, 남성 라이프스타일 잡지 등에서 일했다.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였다. <요즘 브랜드> <모던 키친> 등의 책을 냈다. 신문, 잡지에 기고하거나 기업과 협업해 콘텐츠를 만들고, 자신의 책을 쓴다. 현재 손목시계의 역사에 대한 책과 한국의 브랜드에 대한 책을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