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바닷길 산책
신구-아이노시마 코스





제주 올레길을 여러 번 걸었지만 올레의 뜻을 찾아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큰길에서 집 대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 제주도에서 2007년에 시작된, 집과 밖을 잇는 올레의 매력을 알아본 규슈에선 2012년부터 규슈 올레라는 이름의 트레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가현에서 시작된 규슈 올레는 구마모토, 오이타, 나가사키, 가고시마, 미야자키, 그리고 후쿠오카에 총 18개의 길을 냈다. 약 2년간의 준비, 개발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신구-아이노시마 코스는 가장 최근(2025년 9월)에 문 연 싱싱한 길.
해송 숲과 고운 모래를 품은 신구 해안을 지나 페리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 가이드가 섬에 대해 짧고 굵게 톺는다. “페리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섬에 쉬이 닿습니다. 아이노시마는 어량이 풍부해 낚시로 인기 많은 섬이었는데 몇 년 전 CNN에서 ‘세계 6대 고양이 섬’으로 꼽은 후엔 고양이를 만나러 가는 섬이 됐어요.”
해풍을 온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작은 페리에선 항해 내내 아이노시마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고양이 무리가 능청스럽게 다가와 배를 뒤집으며 방문객을 격하게 반긴다. 눈 두는 곳마다 고양이가 득시글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건 아이노시마에 실제로 고양이가 사람보다 많기 때문이다. 2024년 현에서 실시한 ‘길고양이 중성화 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약 230마리의 고양이가 아이노시마에서 살고 있으며, 2025년 후쿠오카현 신구정 주민 기본대장에 기록된 섬 거주민의 수는 224명이다. 온갖 교태로 사람을 홀리는 요물를 만지려고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가 정신 차리고 길을 나선다. 코스에 이름이 적힌 ‘와카미야 신사’, ‘초소 터’ 같은 장소를 지나 섬 바깥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이노우라 포구 길로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바다가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야트막한 비탈 위로 원시림이 펼쳐진다. 인적 드문 조용한 숲 안에서 젖은 흙의 짙은 비린내, 뒤엉킨 뿌리를 드러낸 나무, 이름 모를 새소리가 후각과 시각, 청각을 사정없이 자극한다. 이 길을 따라 약 5km가량 걸어 나가면 섬의 또다른 마스코트가 나타난다. 일본어론 메가네이와(めがね岩), 우리말로는 안경바위로 통하는 이 해식 아치는 화산활동으로 분출한 용암이 빠르게 냉각하며 형성된 절리로 파도와 바람이 낸 구멍이 안경을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무려 4~7세기에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돌무지 무덤, 적석총고분군을 지나 드디어 펄베이가 한눈에 펼쳐지는 구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노시마의 펄베이는 일본에서 보기 드문 외해 양식장으로 일본 진주 브랜드 ‘미키모토’에서 애지중지하는 산지다. 장판처럼 잔잔한 파도와 진주처럼 떠 있는 부표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서정적인 장면을 만든다. 섬의 초입으로 돌아와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운 후 포구 뒤 마을 골목을 길고양이처럼 어슬렁거렸다. 나가는 배 시간 때문에 아이노시마산 생선과 조개로 만든 상차림을 맛볼 수 있는 마루야마 식당, 120년 된 고택에서 제철 생선으로 파스타나 피자를 선보이는 ‘양식당 우미’ 같은 곳을 기웃대지 못해 아쉬웠지만 페리 선착장 앞, 옛날 일본 영화에 나올 법한 매점 ‘키친 소라토우미’에서 할아버지가 만들어주는 말차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다음에 오면 포구마다 줄지어 앉아 있는 낚시꾼들처럼 이 한적하고 게으른 섬에서 시간을 낚는 호사를 누려야지. 하루 6명만 받는다는 스시 사카나노 싯포의 오마카세도 꼭 먹어봐야지. 걸을 생각 대신 먹을 생각이나 하며 페리 위에 몸을 실었다.
소도시의 일상이 펼쳐지는 길
신구-다치바나 코스





일본 후쿠오카현 가스야군 신구정. 코스 정보를 찾다 신구의 행정 구역 단위가 궁금해 검색창에 질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정(町) 혹은 마치는 우리의 읍, 면 단위로 소도시라는 단어와 더없이 어울리는 목적지. 신구 마치는 후쿠오카 중심부의 텐진, 하카타역에서 전철로 약 40분 거리에 자리한 근교 도시로 일상의 여유를 찾고 싶은 후쿠오카 사람들의 베드 타운, 혹은 주말 나들이지로 인기 높다. 이 작은 동네에서 누릴 수 있는 자연은 의외로 장대하다. ‘깊고 거친 북쪽 바다’라는 뜻의 겐카이나다(현계탄, 玄界灘)를 동네 앞바다로 둔 신구에선 고양이 섬 아이노시마를 비롯해 해안도로 드라이브로 유명한 시카시마, 해식 절벽과 등대로 유명한 겐카이지마 등을 손쉽게 누릴 수 있다. 일본에서 신목으로 여겨지는 녹나무를 비롯해 삼나무, 대나무가 성성하게 군락을 이룬 곳이자 신구 마치 주민들의 동네 뒷산, 다치바나산도 후쿠오카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자연의 품이다. 신구에 대한 장황한 설명으로 서두를 여는 까닭은 신구-다치바나 코스의 매력이 이 동네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규슈 올레에 속했던 후쿠오카-신구 코스를 다듬고 확장해 8.8km 거리에 걸쳐 새롭게 짠 다치바나 코스에선 소도시의 잔잔한 일상을 감상할 수 있다. 코스는 신구 중심지로 연결되는 니시테츠신구역에서 시작된다. 이정표를 따라 약 800m가량 걸으면 나타나는 신구 해안에선 해변 낚시를 즐기는 낚시꾼들의 모습이, 2km 거리에 펼쳐진 해송 숲엔 달리기와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이 시시때때로 나타난다. 고대와 중세의 규슈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 ‘시오오레 신구’와 소박한 정원을 갖춘 단아한 주택 사이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지나면 천황에게 바치는 귤로 유명한 미캉 농장과 다치바나산을 만난다. 여기서부턴 제법 산행다운 여정이 펼쳐진다. 가파른 계단과 비탈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높이 367m의 산을 훑어야 하기 때문이다. 삼나무가 뿜어내는 짙은 풀 내음, 땅과 하늘을 기둥처럼 잇는 대나무 숲의 신비로운 풍경에 취해 걷기와 오르기에 한껏 집중하다 보면 정상에 닿는다. 시가지와 시카노시마섬이 한눈에 펼쳐지는 정상에서 숨을 돌리고 내려오면 사당이 한 채 보인다. 일본 무사들이 전장에 나가기 전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참배했던 곳으로 알려진 로쿠쇼 신사다. 남의 나라 역사에 별 관심이 없다면 신사 안에 있는 고목에 눈을 돌려보자. ‘쇼와 35년 후쿠오카현 지정 천연기념물’로 알려진 녹나무 두 그루가 기세 좋게 뻗어 있다. 참고로 일본에서 녹나무는 불멸, 장수를 상징하는 신목이다. 이정표를 따라 다시 길을 나선다. 논과 밭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코스의 종점, ‘고민가 미칸’이 모습을 드러낸다. 1900년에 지어진 옛 고택을 여행자의 쉼터로 개조한 공간으로 등산객, 마을 사람, 올레꾼들이 즐겨 찾는 사랑방이다. 코스 완주 스탬프를 찍은 후 신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툇마루에 앉아 잎을 다 떨군 나무들이 고즈넉하게 서 있는 작은 정원을 바라보며 올레꾼 동지들에게 간식으로 얻은 과자와 미캉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규슈 올레길에 오르기 전 친구에게 부루퉁한 얼굴로 “후쿠오카에서 명란이랑 곱창 맛집 갔다가 돈키호테에서 쇼핑이나 하면 좋겠다”라고 말한 기억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올레길을 걸으며 ‘이틀짜리 관광지’에 불과했던 낯선 도시가 친근하고 다정한 옆동네처럼 느껴졌다. 그게 바로 ‘큰길로 이어지는 좁은 길’, 올레를 걷는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