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괌에 도착한 첫날. 투몬 베이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호텔에 짐을 풀고 더운 바람에 굳은 몸을 풀 겸 이파오 해변 공원을 가볍게 걸었다. 장판처럼 미동 없는 해수면, 느리게 움직이거나 멈춰 있는 사람들, 자극 없는 모래와 바람과 파도 소리. 감각을 거스르는 그 어떤 요소도 없었던 그 순간에, 이런 생각을 했다. 지구에서 가장 온순한 자연이 있는 곳이라면 괌이 아닐까? 정확히 나흘 후 섬 북쪽에서 이 섣부른 판단을 후회했다. 괌을 만만하게 본 내게 패것 케이브 트레킹의 고행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여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가파른 경사면에서 밧줄 타기. 밧줄이 없는 곳에선 손도 다리로 쓰기. 성질 고약한 파도가 마귀 손아귀처럼 나타나는 절벽 가장자리 걷기. 가파른 카르스트 동굴의 날카로운 표면을 엉덩이로 훑으며 내려가기…. 그날 입었던 바지와 양말, 운동화에 짙게 남은 대자연의 흔적은 초강력 파워 물살 세탁으로도 지워지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버렸다.
괌은 아드레날린의 섬이다. 섬사람들이 그렇게 산다. 매주 2회 소방관으로 일하는 친구와 섬 곳곳에서 하이킹을 즐기는 디자이너이자 <The Best Tracks on Guam>의 공동 저자 애비 크레인의 얘기를 들어보자. “무역풍이 부는 계절엔 남부의 서던 마운틴 트레일을 즐겨 가요. 그늘 한 점 없는 붉은 흙길이죠. 뜨거운 볕 아래에서 8시간 정도 걷는 코스인데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산, 바다, 숲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매력적이에요.” 물속의 명상으로 알려진 프리다이빙을 즐긴다는 남자를 찾아 호수 같은 괌 바다의 매력을 들으려 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작살 낚시’였다. 그는 언뜻 얕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산호초 지대 가장자리의 물살이 갑자기 물놀이 중인 사람을 휘감아갈 수도 있는 리티디안 비치를 좋아하는 낚시 포인트로 콕 짚어줬다. 좀 더 대중적인 근거가 필요한 이들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자.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시야에 들어오는 형체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정체는 러너다. 괌에 머문 11월 마지막 주, 추수감사절 당일 새벽 5시에 나는 괌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러닝 클럽, GRC(Guam Running Club)의 크루들을 만나기 위해 데데도 마을의 집결지로 향했다. 많아야 서른 명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대충 세어도 수백 명은 족히 넘는 인파 속엔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유모차 안 아이부터 80대가 분명해 보이는 백발의 노인까지 거의 모든 세대가 있었다. 그날 우리는 6.28km 코스를 2등으로 들어온 샤크 폰 루모어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곧 섬 둘레를 전부 달리는 100마일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할 계획이라는 얘길 들었다. 귀국 후 나는 괌의 지역 신문 12월 11일자 뉴스에 샤크가 30시간 내내 달리는 이 말도 안 되는 도전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읽었고, 그의 나이가 올해 64세라는 충격적인 정보까지 획득했다. 물론 16만 괌 인구가 모두 도파민에 취한 운동광은 아닐 것이다. 우연인지 확률인지 알 수 없지만 카페에서 만난 젊은 로컬은 주짓수 선수, 혹은 야구 코치였다. 가만히 있어도 칼로리 소모량이 높은 이 열대 섬에서 다들 왜 그렇게 아침 댓바람, 출근길, 쉬는 날 구분 없이 땀을 내며 끊임없이 운동하고 움직일까? 머무는 내내 가졌던 물음표에 대한 답을 ‘100마일의 사나이’ 샤크의 인터뷰 녹취록을 풀다가 찾았다. “괌은 결코 뛰기 좋은 곳(운동하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살았던 플로리다도 덥긴 했지만 괌이 훨씬 힘들어요. 무더위뿐 아니라 자연환경도 쉽지 않거든요. 하지만 그 덕분에 체력과 실력이 확 늘었어요. 몸도 정신도 더 강해졌죠.”
괌의 자연은 실제로도 녹록지 않다. 북부엔 가파른 석회암 절벽이 태평양과 마주하는 카르스트 고원이, 남부엔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험준한 산악 지형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여행자가 머무는 중부를 벗어나면 이 ‘손 타지 않은 야생의 대자연’ 속에서 조깅, 사이클, 하이킹, 협곡 트레킹, 트레일 러닝 같은 액티비티를 즐기는 로컬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접근하기 쉬운 거친 자연이 사람들을 바깥으로 끌어내고, 움직이고, 운동하게 만든다는 얘기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그 온순하게 흐르는 괌 중부의 바다에 한 번도 몸을 못 적셨다. 대신 남과 북을 종횡무진하며 활기찬 삶을 사는 로컬들을 만나고, 그들의 일상을 경험했다. 섬사람이 쉬고 싶을 때 혹은 땀 흘리고 싶을 때 찾는 자연을 찾아 나섰고, 뜨겁게 태운 에너지를 보충하고 싶을 때 동력원이 되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추천받아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사춘기 소년처럼 먹었다. 아름다운 곳에서 많이 움직이고, 이른 밤부터 달게 자고, 잘 먹은 나날의 기록을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