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복직 전에 같이 여행 다녀오는 건 어때?” “아이는?” “부모님께 부탁 드려 보자. 어쩌면 단둘이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아닐까?” 긴 터널 같은 육아휴직이 끝을 보일 무렵, 아내가 여행을 제안했다. 마지막 기회라고? 괜히 솔깃했다. 동시에 별 기대가 없기도 했다. 나는 1년 동안 반복된 돌봄과 양육에 지쳐 있었고 한 달 뒤 이 상태로 출근할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육아휴직이 아닌, 진짜 휴직을 신청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다행히 양가 부모님께서 번갈아가며 아이를 맡아줄 테니 어디든 다녀오라고 하셨다. 여행지 선정은 아내에게 맡겼다. 5년째 같이 살아보니 이제 ‘현명한 남편으로 사는 법’ 정도는 안다. 아내 마음속에 분명 가고 싶은 곳 이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호주에 가보고 싶단다. 그럼 그렇지. 호주는 둘 다 첫 방문이었다. 멜버른과 시드니, 두 도시만 가기로 정했다. 멜버른에는 아이 키우는 친구네 부부가 살고 있었고, 시드니에는 본다이 비치가 있었다. 다른 명분도 있었다. 호주가 일상 스포츠 강국이라는 점. 특히 수영장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고 들었는데, 아내는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수영 관련 제품을 만드는 작은 브랜드를 시작했다. 이름은 ‘레디투킥’. 아내가 선심 쓰듯 다시 물었다. “여행지에서 꼭 해보고 싶은 거 있어?” 이 번에는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테니스!” “좋아, 그럼 수영도 하고 테니스도 치자.”
첫 목적지는 멜버른. 아내와 나는 여행 첫날부터 수영을 했고 주말에는 현지에서 만난 다른 지인들과 테니스를 쳤다. 테니스를 마친 다음, 다함께 근처 수영장으로 이동해 수영도 했다. 우연히 감도 높은 로컬 숍에 들르면, 아 내는 직접 준비한 영문 브랜드 소개서와 샘플을 건네기도 했다. 이쯤 되니 여행인지 출장인지 전지훈련인지 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 분명한 점은 시내 곳곳에 공원이 많았고, 그 안에는 테니스 코트, 수영장 등 운동 시설 이 꼭 붙어 있다는 사실. 게다가 코트나 수영장의 컨디션도 좋았다. 시드니로 이동한 다음에도 수영은 계속했다. 멜버른에서 주로 실내수영장을 경험했다면, 시드니에서는 자연 해수풀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숙소 위치가 본다이비치 바로 옆이었고, 본다이비치 남쪽 끝으로 1929년에 지어진 해수풀 본다이 아이스버그 클럽이 있었다. 원래 겨울에도 수영을 통해 체력을 단련하고자 했던 구조대원들이 설립한 곳이라 아이스버그 스위밍 클럽으로 불렸다고 한다. 길이 50m의 성인 수영장과 길이 25m의 어린이 수영장이 있는데, 두 곳 모두 물을 가열하지 않아서 입수할 때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자체적으로 온도를 높이려면 일단 몇 바퀴 왕복하며 열심히 수 영하는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쨍하게 파란 하늘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따뜻한 볕과 차가운 해수풀 사이에서 배영 자세로 수면에 뜬 채 말했다. “쇼핑이나 관광 없이 물에만 둥둥 떠다니는 여행도 좋네. 여보, 고마워.” 아내가 씩 웃으며 본심을 드러냈다. “어머, 무슨 소리야. 귀국 날도 며칠 안 남았으니 오늘 오후부터 부지런히 쇼핑해야지. 본다이비치 쪽에 괜찮은 숍이 많대. 슬슬 여기 정리하고 나가자.”
부메랑 모양의 본다이비치를 둘러싼 거리인 캠벨 퍼레이드와 안쪽 블록 에는 오감을 자극하는 매장이 많았다. 관광객의 당 충전을 책임지는 젤라토 가게가 목 좋은 곳에 있는가 하면 서퍼들의 아지트를 콘셉트로 한 크래프트 비어 가게가 보였고 골목 안쪽으로는 럭셔리 리조트 웨어를 파는 가게도 있었다.
캠벨 퍼레이드를 지나다가 익숙한 부메랑 모양의 브랜드 로고를 발견했다. 스피도(Speedo), 호주에서 시작해 현재 영국에 본사를 둔 수영 용품 브랜드다. 100여 년에 걸쳐 수영복 소재와 디자인의 혁신을 이끄는 기업으로서 영미권에서는 스피도가 경기용 수영복을 뜻할 정도로 수영 분야의 대명사가 되었다. 자세히 보니 매장에 ‘스피도 헤리티지 스토어(Speedo Heritage Store)’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벽면에는 브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이벤트로 보이는 사진이 몇 점 걸려 있었고 연혁이 쓰여 있었다. 연혁에 따르면 스피도가 처음부터 수영복을 만든 건 아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민자 알렉산더 맥레이는 1914년 시드니에 양말공장을 세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양말을 납품하다가 1928년 본다이비치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수영복 제작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게 수영복 브랜드로서 스피도의 시작이다. 캠벨 퍼레이드의 한 건물에 스피도 헤리티지 스토어를 비롯해 스피도 피트니스 클럽, 스피도 스윔 센터가 모여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지하에 위치한 스피도 스윔 센터에 들렀다. 비록 이번에는 아내와 둘이 왔지만, 나중에 아이를 데리고도 올 수 있으니 시설이 어떤지 살폈다. 안내 직원이 친절히 응대하며, 마침 36개월 미만의 영유아를 동반한 레슨이 진행되고 있으니 구경해보라고 했다. 실내의 25m레인 두 곳에서 엄마 또는 아빠와 아기들이 물과 친밀해지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 36개월 미만의 유아는 (안전 등을 이유로) 수영장 입장 불가인 경우가 많은 터라, 이런 수업의 존재 자체가 생소하면서도 부러웠다.
“수영장, 바다, 호수, 강 등 어디에서든 사람들이 수영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물속에서의 모든 순간을 더 즐겁게 만들어주는 수영복과 장비를 제공하는 것.” — 스피도의 브랜드 미션
스피도는 2015년 ‘물의 힘(Fueled by Water)’이라는 캠페인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동안 스피도가 올림픽 메달리스트 등 엘리트 선수를 위한 브랜드로 인식되었다면, 이 캠페인은 폭넓은 연령대의 수영선수, 보디서퍼, 다이버, 일반 수영 애호가 등 다양한 개인이 물에서 보내는 일상을 영상으로 담았다. 개인적으로는 91세 할아버지 위르겐 슈미트의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물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별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저 물을 밀거나 끌어당기는 데 집중할 뿐이에요.”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우버를 호출했다. 앱에 뜬 드라이버 이름은 ‘압둘’이었다. 아랍권에서 왔으려나. 그에게 이 도시는 이른 아침부터 활력 넘 치고 붐벼서 신기하다고 말했더니 본인도 처음 왔을 때 너무 놀랐다고 했다. 압둘은 머쓱한 듯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지, 요즘은 나도 이른 아침부터 조깅하기 시작했어.”
시드니에서 마주친 몇몇 풍경은 아직도 선명하다. 대부분 도시 전반에서 느껴지는 활력과 영감에 대한 장면이다. 본다이비치는 새벽 대여섯 시부터 서퍼들로 바글바글했다. 서퍼라면 바다 한가운데서 일출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걸까? 이어서 문을 여는 본다이 아이스버그 클럽에서도 수영에 진심인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거리에선 요가 스튜디오나 짐에 가는 복장의 사람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추천받아 들른 시내의 어느 카페는 오전 7시임에도 막 달리기를 마친 단체 손님들로 북적여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상의를 벗은 채 멋진 가슴 근육을 뽐내며 유아차를 미는 어느 남자를 볼 때는 도시 전체가 은은하게 건강에 미친 건 아닐까 싶었다. 일상과 직장으로 돌아온 요즘은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낸다. 서울에서 느끼는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가 유행이나 경쟁에서 뒤 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라면, 시드니에서의 포모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에게도 포모가 있다면, 아마 스포츠를 통해 일상을 건강히 살 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닐까. 새해마다 하는 뻔한 다짐이지만, 올해 는 수영장을 자주 찾아야겠다. 슈미트 할아버지처럼 별생각 없이 말이다.
글을 쓴 손현은 서울에서 태어나 건축을 공부했다.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공장을 짓다가 퍼블리, <매거진 B>를 거쳐 핀테크 회사에서 글을 짓고 있다. <글쓰기의 쓸모>,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 <요즘 사는 맛>(공저), <썬데이 파더스 클럽>(공저) 등을 썼다. 현재 두 돌을 넘긴 딸의 양육자이기도 하다. 집안일을 마치고 테니스 코트로 나가는 게 요즘 삶의 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