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걷기’만큼 좋은 묘약은 없다. 수많은 현자와 철학자들은 걷기의 효용을 역설했다. <걷기 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고 말했고,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걷기를 즐기는 여행자가 아니다. ‘트레일 종주’ 같은 건 꿈도 꿔본 적도 없을뿐더러 등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질 체력의 소유자다. 그러다 겨우 시작한 것이 ‘제주 올레 걷기’다. 올레는 나에게 처음으로 걷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었다. ‘올레’는 제주어로 ‘큰길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말한다. 해안, 숲, 마을, 시장의 골목을 자분자분 즐기며 느긋하게 걷는 게 바로 올레의 매력이다. 제주에서 시작한 나의 걷기(도전)는 일본 규슈로 이어졌다. 산을 오르고, 마을을 지나고, 그곳에서 난 재료로 만든 음식들로 배를 채운다. 마을의 작은 가게에서는 사람들이 건네는 이야기를 듣고, 조용한 사찰에 들러 종교와 상관없이 늘 비슷한 소원을 하나쯤 빈다. 흙냄새, 풀냄새를 맡으며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 숨이 가빠졌다가도 어느새 머리가 맑아진다. 높고 낮은 산과 바다, 호수, 논밭, 작은 마을을 걸으며 만난 다정한 풍경은 인증샷 만 찍기 위해 잠깐 방문한 곳과 달리, 삶의 액자처럼 남아 있다.
치유와 상생의 길, 미야기 올레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 발발 후 일본 관광산업의 타격은 컸다. 남쪽 규슈 지방에서 한국인의 발길을 되돌리기 위해 찾아 낸 대책이 바로 올레 수입. 그렇게 제주 올레의 자매길 ‘규슈 올레’가 탄생했고, 현재까지 18개 코스가 운영되면서 ‘규슈 올레’는 걷는 여행자에게 하나의 성공한 여행 코스이자 브랜드가 되었다. 이어서 ‘미야기 올레’ ‘몽골 올레’까지 오픈하면서 올레는 심신이 지친 이들을 ‘하나’로 이어왔다. 그중에서도 2018년 처음 개장한 미야기 올레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 미야기현은 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후쿠시마와 멀지 않고, 대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사망자가 1만여 명이 넘었고, 실종자 1 천214명은 지금도 수색 중이다. 먼저 손을 내민 건 미야기현이다. 자연도 산업도 생의 터전도 무너진, 상처로 얼룩진 이곳에 길을 내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안은주 제주올레 대표는 말한다. “여러 우려가 있었지만 미야기 올레를 오픈하기로 최종 결정한 이유는 아픔과 상처가 있는 곳에 길을 내어 서로 치유하고 상생하는 것이 올레가 추구하는 가치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미야기 올레가 개장한 후 누적 완주자는 5만 명을 기록했다. 규슈 올레가 아기자기한 감성적인 매력을 가졌다면 미야기 올레는 장엄함으로 가슴을 파고드는게 매력이다.
2023년 11월 11일, 미야기 올레의 5번째 코스인 ‘무라타 코스’가 개장했다. 무라타 시로야마 공원에서 열린 개장식에는 해외와 일본 각지에서 온 미디어와 올레꾼 900여 명이 모였다. 개장식을 마친 후 저마다의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전체 13.5km 길이의 무라타 코스는 4~5시간 정도 소요되는 중급 난이도의 올레길이 다. 미치노에키 무라타에서 시작해 기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다. 무라타는 에도시대부터 쇼와시대 초기(17세기 초~20세기 초)에 걸쳐 잇꽃(홍화) 거래가 활발했던 지역이다. 시종점인 미치노에키 무라타에서는 지역에서 갓 수확한 채소를 비롯해 다양한 로컬 식재료와 특산품을 판매한다. 출발도 하기 전, 완주 후에 사야 할 아이템부터 눈도장을 찍는다. 개장식이 열린 시로야마 공원은 센다이번을 만든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의 7번째 아들인 다테타카가 조성한 무라타 성터로 봄에는 벚꽃과 매화, 가을에는 단풍 등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수놓는다. 완만한 내리막길로 시작해 조용한 마을을 지나가면 첫 번째 포인트인 류토인에 닿는다. 류토인은 다테 가문의 보리사(한 집안에서 대대로 장례를 지내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개인 소유의
절)로 알려진 사찰로, 다타마사무네의 7번째 아들 다마무네공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자연의 지형을 절묘하게 이용해 만든 치센(연못) 감상 정원은 미야기의 관광 명소 100선에 뽑힌 명소다. 잘 가꿔진 일본식 정원을 잠시 거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
5분 정도 걸으면 또 하나의 절이 나타난다. 시라토리 신사다. 한 눈에 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이곳은 서기 123년에 세워졌다. 족히 1천 살은 되어 보이는 삼나무와 등나무 거목들이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기에 기운이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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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의 상징인 조랑말 모양의 ‘간세’와 방향을 알려주는 청색과 다홍색 리본은 낯선 길을 묵묵히 안내해주는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걸으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다. 늘어선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언덕 위에 다다른다. 언덕 너머로 웅대한 자오연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번 개장식에는 외국인 올레꾼도 눈에 많이 띄었다. 미국, 카자흐스탄, 몽골, 대만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올레길을 걷기 위해 미야기현까지 왔다. 올레길 난이도는 ‘중’이지만 가파른 언덕이나 산길이 없는 편이라 걷기에 좋다. 사뿐사뿐 걷기 좋았던 데에는 ‘톱밥길’도 한 몫했다. 이런 무라타 코스는 사단법인 제주올레 검수를 받으며 미야기현이 3년을 공들인 결과물이다. 길을 찾는 탐사팀 운영만 1년 남짓 걸렸다. “1년 만에 왔는데, 길이 너무 예뻐졌어요. 길도 사람처럼, 사랑받으면 예뻐지나 봐요.” 안은주 제주올레 대표의 말에 일행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군데군데 바닥에 쓰러진 삼나무, 참나무 칩을 깔아 푹신푹신하게 만든 톱밥길 덕에 발걸음은 시간이 지날 수록 가벼워졌다. 쭉쭉 하늘로 높이 뻗은 편백나무 숲길에서는 사슴과 마주쳤다. 천연기념물인 사슴은 한 무리의 등산객과 마주쳤는데도 피하지 않고, 아주 가까이까지 와서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제 갈 길을 간다. 숲길을 지나 간만부동존에 도착했다. 녹음이 우거진 숲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경내에 흐르는 계곡이 작은 폭포를 이루었는데, 폭포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작은 불상이 있다. 숲속에서 보물이라도 찾은 듯 반갑다. 여느 때처럼 작은 소원을 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미야기현에서 자라난 식재료로 만든 도시락으로 배를 채운다. 소박한 도시락이지만 웬만한 정 찬 못지않게 맛깔나다. 무라타 코스를 걷다가 배가 고프면 미야기현의 특산물인 메밀을 내놓는 국숫집에 들러 요기를 해도 좋다. 코스의 중반인 우바가후토코로 지구에는 메밀국수를 내어 주는 식당과 사적이 함께 있다. ‘민화 전승관, 후루사토 오토기 엔’에서는 무라타마치 지정문화재인 민가를 살펴볼 수 있다. 이후 종점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이 계속된다. 다음 포인트인 간쇼지 까지는 4km 남짓이다. 간쇼지 역시 무라타마치 지정문화재 사적으로 무라타성의 오테몬을 옮겨 왔다. 정갈한 분위기와 달리 이 곳에는 신분이 달라, 연애 끝에 동반자살한 연인의 비석이 간직되어 있다.
3 우바가후토코로 지구에는 메밀을 내어주는 식당과 사적이 함께 있다.
4 올레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5 미야기현의 사케는 맛있기로 유명하다.
마을 중심부로 돌아오면 미야기현의 ‘작은 교토’라 불리는 거리 가 올레꾼을 맞이한다. 무라타 코스의 마지막 코스이면서 무라타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동네다. 에도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풍스러운 거리인 무라노마치는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선정된 곳이다. 각각의 창고 가게마다 다른 특징을 간직하고 있어 산책하며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작은 상점들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을 마주하니 마음에 온기가 퍼진다. 마을의 여러 거상 중 한 명이었고 국가중요문화재로 선정된 야마쇼의 저택은 ‘무라타 상인 야마쇼 기념관’으로서 창고와 저택을 견학할 수 있다. 장사에 필요한 도구와 홍화 상인의 자료 등을 전시해놓아 흥미롭다. 창고 안내소 ‘무라타마치 야마니 저택’은 관광 안내소이면서 특색 있는 기념품도 판매한다.
미야기현은 ‘에도의 부엌’으로 불릴 정도로 풍부한 식자재로 유명했다. 그중 우설(소의 혀)은 한국에선 먹기 어려운 센다이의 별 미로 일본말로 ‘규탄’이라 하는데 ‘규’는 소라는 뜻이고 탄은 혀를 의미하는 영어 ‘tongue’에서 따온 말이다. 소머리 부위 가운데 질감이 가장 독특한 부위인 우설은 간장 양념 외에 별다른 양념 없이 숯불에 구워 먹는다. 센다이 곳곳에 우설 전문점이 위치한다. 또한 미야기는 쌀이 맛있는 지역으로 손꼽힌다. 쌀과 물이 좋은 곳은 자연스레 사케도 맛있다. 우라카스미, 스미노에, 카츠야마, 켄콘이치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명주가 많다. 식료품점에 들러 사케 한 병과 미야기의 특산물 중 하나인 가마보코를 샀다. 종점에 돌아오면 지역 특산품인 잠두콩으로 만든 아이스크림과 우동이 기다린다. 이날은 아시안 구루메 축제가 열려 마을 주민까지 모여 북새통을 이루었다. 미야기현 무라타 코스의 기념 우표도 선보였다. 무라타 코스는 바다나 웅장한 대자연은 없지만 크고 작은 강과 걷기 좋은 길, 사람 냄새가 나는 마을을 품고 있다. 에도시대 창고 마을의 화려한 역사의 잔향이 물들어 있는 무라타마치는 그 자체로 여행지로서 매력이 풍부하다. 센다이역에서 버스로 이동이 가능해 접근성이 좋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삶은 계속된다
2 코스 중간중간 피에로 복장을 한 행사요원이 올레꾼을 반긴다.
동일본대지진 후 12년이 지났지만 미야기현에는 당시 참상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한 공간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1천 109명이 사망한 히가시마츠시마의 노비루 구역사는 현재 ‘동일본대지 진부흥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역사 벽면에는 3.7m 높이에 선이 그어져 있는데, 지진 당시 침수됐던 구간을 표시한 것이다. 멈춰진 시계, 부숴진 승차권 발매기가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게 한다. 기차가 다닌 선로 옆에는 피해자의 이름이 새겨진 대지진 부흥기념비가 있다. 유가족이 이름을 남기길 원치 않아 뒤집힌 명패도 있다. JR 시즈가와역 근처 ‘미나미산리쿠 311기념관’은 주민들의 증언과 사진, 영상 등 지진 피해 재해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을 보존하는 공간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의 대피를 위해 방송을 했던 방제대책본부 엔도 미키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주변에는 메모리얼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방재대책청사의 잔해도 그대로 남아 있다.
무라타 코스를 걸은 후 일정의 마지막 날 미나미 산리쿠 칸요 호텔에 묵었다. 객실의 통창에 드넓은 태평양이 한가득 찼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쓰나미가 덮쳤을 때 피신소로 이용됐던 곳이다. 호텔에선 재해의 기억을 잊기 위해 ‘이야기 버스’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버스를 타고, 피해 지역을 돌며 3 .11 동일본대 지진이 남긴 상흔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재해의 흔적을 남길 것인가, 남기지 않을 것인가. 애도와 치유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덮고 잊는 것이 아닌 방식을 선택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2019년에 개봉한 <봄은 온다>는 ‘동일본대지진 그 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봄은 온다>의 일본어 제목은 ‘일양래복(一 陽來福)’으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의미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엔 상실감이 가득하지만, 영화는 상실감만 담은 게 아니라 그 이후에 여전히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봄은 온다>의 영어 제목은 ‘Life goeson(삶은 계속된다).’ 풍경은 변해도 삶은 여전히 소중하다. 생을 가꾸어가는 사람들, 사람들이 걸으면서 완성된 길이 품 은 생명력은 왠지 닮아 있다. 미야기 올레가 왜 치유의 길인지, 걷고난 후에 알 수 있었다.
- 무라타 코스 가는 법(기점까지)
철도·버스
JR 센다이역(도호쿠 혼센/35분) → JR 오가와라역 → 미야기 교통버스(무라타, 가와사키행) 승차(약 25분) → 미치노에키 무라타
고속버스
센다이 시내에서 센다이역 니시구치구 사쿠라노 백화점 앞 33번 승차장 → 센다이 자오마치센(무라타정사무소 및 새틀라이트 미야기) → 미치노에키 무라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