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에 대한 지식도 없이, 오로지 치즈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책 한 권을 채울 수 있을까? 그게 될까 싶겠지만, 된다는 걸 내가 증명해냈다.라는 책을 기어이 써냈기 때문이 다. 어떤 것에도 ‘덕질’을 한 적이 없는 내가 유일하게 덕질하는 것은 치즈다. 특히 여행을 떠나게 되면 정도가 심각해진다. 모든 치즈 가게에 들어가서 치즈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데, 그때마다 내가 먹는 것은 슬픔이다. 왜 먹고 싶은 치즈를 다 살 수 없는 걸까. 왜 궁금한 치즈는 이토록 많은 걸까. 왜 내 배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을까. 자주 이동해야만 하는 여행자에게 치즈의 세계는 한정적으로 열릴 수밖에 없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자꾸 치즈가 사고 싶고, 먹고 싶고, 기억하고 싶고, 그러니 결론은 슬픔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치즈처럼 나에게 명백한 기쁨인 음식이 또 있을까 싶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선명한 기쁨을 준 치즈는 카망베르(Camembert)다. 그리고 카망베르가 태어난 노르망디 지방의 카망베르는 치즈의 전당 맨 윗자리에 앉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물론 내 입맛 기준이다.) 하얀 외피를 자르면 보기만 해도 농밀한 치즈 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노란색 속살이 보인다. 마트에 파는 카망베르가 참치 통조림의 맛이라면, 이 치즈는 덩치 큰 참치의 뱃살을 잘 숙성시킨 맛이라고 해야 할까. 프랑스에 도착해 내가 제일 먼저 사는 건 언제나 노르망디 지방의 카망베르다. 하지만 노르망디 카망베르는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나처럼 치즈의 쿰쿰 한 맛에 발을 동동거리고, 치즈의 곰팡이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이 아니라면, 조금 많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건 콩테(Comté) 치즈이다.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한다는 치즈. 숙성 기간에 따라 치즈 맛의 강도가 달라지는데, 6개월 숙성은 너무나도 편안한 맛이라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신, 모험의 기분이 덜 들 수 있다. 조금 더 모험을 해보고 싶은 분들에겐 1년 이상 숙성한 콩테 치즈를 권한다. 물론 내가 선택하고 싶은 건 그 모든 치즈다. 콩테 치즈도 종류별로 늘어놓고 먹고 싶었고, 카망베르도, 그 외에 내가 모르는 치즈의 세상을 마음껏 탐험 하고 싶었다. 여행 때마다 치즈를 슬픔의 눈길로 바라보는 데에 나는 지쳐 버렸다.
답은 하나였다. 여행객이 아니라 잠깐이라도 살아보는 것. 올해 봄, 나는 20년 만에 퇴사를 하고 파리행 비행기표를 샀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두 달 후. 목표는 간단했다. 겁내지 말고 치즈 가게에 들어갈 것. 될 수 있는 한 많은 치즈를 먹어볼 것. 궁금한 치즈는 무조건 다 사볼 것. 혹시라도 단골 치즈 가게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최고의 훈장이 될 것이니, 용기를 낼 것. 숙소 근처엔 당연히 치즈 가게가 있었다. 토요일 오후라 치즈를 사려는 줄이 길었다. 다들 치즈로 김장이라도 할 것처럼 전투적으로 치즈를 샀다. 나는 얌전히 줄을 서면서, 열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치즈를 관찰했다. 거동이 조금 불편하신 하얀 머리 할머니가 손을 천천히 뻗어 고른 건 콩테 치즈였다. 프랑스 사람들의 콩테 치즈 사랑을 처음 내 눈으로 확인하다니! 나는 기쁨의 내적 댄스를 췄다. 그 옆에는 각종 톰므(Tomme) 치즈가 있었는데, 할머니는 쥐라(Jura) 지방의 톰므 치즈를 고르셨다. 그 다음에 줄을 선 젊은 남자는 짙은 낙엽 색깔의 껍질을 한 생 넥테르(Saint Nectaire) 치즈를 골랐고, 블루치즈도 골랐고, 염소젖 치즈도 골랐다. 손님이 치즈를 고르면 주인은 바로 그 치즈를 도마 위에 올렸다. 칼로 치즈를 자를 준비를 마치고 손님을 바라봤다. 손님이 고개를 끄덕이면 주인은 단호하게 치즈를 잘랐다. 한 젊은 여자는 아주 소량을 샀는데, 주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어려울 게 없었다. 수백 개의 치즈 중에서 우선 사람들이 사는 치즈를 나도 사보는 거다. 그리고 아주 조금만 잘라달라고 말해보는 거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점점 용기를 채웠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나의 사랑 노르망디 카망베르와 할머니가 샀던 톰므 치즈와 젊은 여자가 샀던, 이름을 읽기도 힘들었던 치즈를 샀다. 혼자 여행하는 중이고, 많은 치즈를 맛보고 싶으니 조금만 잘라달라고 주인에게 말했더니 주인이 싱긋 웃으며 카드지갑만큼 얇고 작게 잘라주었다. 얼마 안되는 돈으로 나는 갑자기 치즈 재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후로 나는 수시로 그 치즈 가게를 들락날락했다. 손님이 없는 평일 오후 에 찾아가 주인에게 지난번에 추천해준 치즈가 너무 맛있었다며 또 다른 치즈를 추천해달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기도 했다. 치즈 가게 주인은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영어 단어를 가져다가 열정적으로 나에게 강의를 해줬다. 내가 평생 듣고 싶은 수업이라면 바로 그런 수업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양젖과 염소젖을 섞어 만든 톰므 치즈와 소젖으로 만든 톰므 치즈의 차이를 배웠고, 세지 않아서 영원토록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블루치즈를 알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치즈 앞에서는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나의 치즈 사랑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이루었다. 모든 치즈를 맛보고 싶었던 그 욕심만은 못 이루었지만.(실은 그건 불가능한 욕심이란 걸 잘 안다.)
물론 치즈에 대해 말하며 이렇게 프랑스 이야기만 하고 있자니 거센 반발의 소리가 바로 들려온다. 이탈리아 모차렐라 치즈를 빼놓고 치즈를 말하겠다고? 아니, ‘치즈의 왕’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파르미자노 레지아노 치즈를 뺀다고? 스위스에서는 그뤼에르 치즈가 들고 일어나고, 네덜란드에서는 하우다(Gouda) 치즈가 들고 일어나고, 스페인에서는 만체고 치즈의 항의가 거세다. 바다 건너편 영국에서는 블루치즈의 왕, 스틸턴 치즈가 푸 른곰팡이를 탁탁 털며 싸움을 시작할 기세다. 어쩔 수 없다. 다시 가방을 싸야 한다. 프랑스가 아닌 다른 곳에 오래 머물며 또 다른 치즈 여행을 시작할 수밖에. 언제나 나의 다음 여행 목적지는 치즈가 될 수밖에. 이토록 맛있고, 이토록 다채로우며, 이토록 매번 나를 유혹하는 세계라니. 나는 영원히 그 노란색의 세계에 도착하고 싶다.
나라별 대표 치즈
(좌에서 우로 순서대로)
카망베르 Camembert
프랑스 노르망디의 페이 도주 지역에 위치한 카망베르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한 치즈다. 소젖으로 만든 연성 치즈로 식용 가능한 하얀 곰팡이가 핀껍질을 가진 둥근 모양이며, 속살이 부드러워서 빵이나 크래커에 발라 먹기 좋다.
콩테 Comté
프랑스인에게 가장 친숙한 치즈로 AOC(통제원산지 명칭) 치즈 중 생산량이 최대이다. 생우유를 써서 가열 압착해 숙성시킨 딱딱한 치즈다. 고소하고 밝은 호두 향과 짠듯하지만 다른 음식과 조화를 이루는 맛 때문에 전 세계인에게 널리 사랑받는다.
몬터레이잭 Monterey Jack
스코틀랜드인 데이비드 잭이 1880년대 미국캘리포니아주에서 처음 만든 비가열 압착치즈. 흰색에 가까운 연한 아이보리색 치즈로 가볍게 쏘는 맛과 부드럽고 밋밋한 맛을 갖고 있다.
스틸턴 Stilton
1730년대 영국 스틸턴 마을의 벨(Bell) 여관에서 팔기 시작하면서 알려진 치즈로 스틸턴이 원산지는 아니다. 소젖으로 만든 치즈로 지방 함량이 매우 높고, 맛이 강해 주로 크래커, 올드 빈티지 포트와인, 생호두, 또는 포도와 곁들여 먹는다.
모차렐라 Mozzarella
이탈리아의 캄파니아 지방에서 물소젖 또는 우유 커드로 만든 프레시 치즈. 신선한 젖내 속에 가벼운 단맛과 신맛이 나며 숙성 치즈 특유의 냄새가 없어 치즈 초심자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파르메산 Parmesan
이탈리아에서 ‘치즈의 왕’으로 불리는 치즈로 파르미자노 레지아노(Parmigiano Reggiano)로 불린다. 우유를 써서 가열 압착해 장기 숙성시킨 경성 치즈. 치즈 그대로 먹기도 하고 가루로 만들거나 얇게 켜를 내 다양한 요리에 넣어 먹는다.
에담 Edam
네덜란드에서 탈지 또는 부분탈지 우유를 압착해 숙성시킨 경성 치즈. 지방 함유율이 낮아 감칠맛이 강하지 않고 버터 같은 풍미가 나며 신맛이 뒤를 끈다. 얇게 썰어 샌드위치와 함께 아침 식사용으로 많이 먹는다.
에멘탈 Emmental
스위스 에멘탈 지방에서 생우유를 가열 압착해 숙성시킨 경성 치즈. 표면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모양으로 ‘스위스의 한 조각’이라고 불릴만큼 스위스를 대표하는 치즈다. 식감이 부드럽고 과일 향, 약간의 허브 향과 너츠 향이 돌아 샌드위치, 퐁뒤, 피자 등 다양한 요리에 쓰인다.
글을 쓴 김민철은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며 틈틈이 글을 써서 <우리 회의나 할까?> <모든 요일의 기록> <하루의 취향> 등의 책을 냈다. 치즈에 대한 깊고 깊은 애정으로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라는 에세이를 썼다. 최근에 20년간 다녔던 광고회사를 관두고, ‘파리에서 두 달 살기’라는 오랜 꿈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