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웃리거 카누 동호인들의 모습.

‘악어 비치’로 불리는 판항 비치. 파도가 빚은 기암이다.

바다 수영이나 스노클링, 다이빙, 스피어 피싱을 즐긴다.

이렇게 보내는 어린 시절이 운동을 즐기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이판에 와서 알게 됐다. 이 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작 이런 것들. 1990년대에 결혼한 한국 사람 중 여력이 좀 있는 이들의 신혼여행지. 한때는 눈부신 호황기를 누렸고 지금은 ‘촌스러움’이 된 옛날식 화려함이 남아 있는 열대 휴양지를 상상하며 사이판의 읍내, 가라판(Garapan)을 가로지르는 비치 로드(Beach Road)에 들어섰다. 사이판의 센트럴파크 격인 아메리칸 메모리얼 파크(American Memorial Park)까지 이어지는 길 위에서 나는 상상과 다른 첫인상에 적잖이 당황했다. 거기엔 게으른 얼굴로 모래사장에 드러누운 사람들 대신 부지런히 움직이며 땀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드라이핏 소재의 운동복을 갖춰 입고 뛰거나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 자기 노를 들고 하나둘 모여 카누 탈 준비를 하는 무리, 낡은 테니스 코트 안에서 활기찬 함성을 지르며 피클볼을 즐기는 커플…. 사이판이 프로야구단이 사랑하는 전지훈련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는 사람들도 이렇게 운동에 열심을 내는 곳이었나? 사이판에서 45년 동안 산, 이곳에선 ‘맨발의 미스터 장’으로 불리는 전설의 맨발 러너이자 런 사이판 클럽의 회원 장창환 선생님이 내 궁금증을 풀어줬다. “사이판은 아주 작은 섬이긴 하지만 달리기, 사이클, 다이빙, 테니스, 요즘은 유럽에서 유행한다는 피클볼까지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공동체 문화를 좋아해서 동호회도 활발하게 조성되어 있죠. 운동하기 유리한 날씨는 물론이고 운동을 즐길 수 있는 자연도 가까워서 자주 나갈 수 있는 것도 장점이고요. 나 역시 20년째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뜀박질하고 수영을 해요. 동호회에 가입해 테니스 랠리도 하고 피클볼도 배우고 있고요.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신나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행복합니다.” 만남 이후 그는 내게 다음에 놀러 오거든 매주 수요일 오후 5시에 마이크로 비치에서 열리는 5km 코스의 러닝 모임에 와보라는 얘기, 거기에서 진짜 운동에 미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 겨울에 온다면 40년 넘는 세월 동안 이어진 11월 넷째 주 추수감사절 기념 ‘터키 런’과 12월의 ‘크리스마스 릴레이’도 흥미로울 거란 정보까지 알차게 채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미스터 장의 말처럼 사이판엔 아마추어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온갖 국제 대회가 열린다. 2006년에 국제 공인 대회로 승격, 연간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의 러너들이 모여드는 ‘사이판 마라톤(Saipan Marathon)’,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혹독하기로 유명한 사이클 대회 ‘헬 오브 더 마리아나(Hell of the Marianas)’를 필두로 다양한 기관과 단체가 주관하는 트라이애슬론, 크로스컨트리런, 아웃리거 카누 대회 등이 그 예. 나도 해볼 수 있는 게 있는지 궁금해 각종 운동 대회 소식, 스포츠 이벤트를 관리하는 플랫폼 ‘레이스 로스터(Race Roster)’를 뒤적거리다 어떤 공고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3월 15일, 사이판 파우 파우 비치(Pau Pau Beach)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어린이 트라이애슬론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모두가 메달을 받을 수 있어요!” 5살 미만 참가자를 위한 수영 코스까지 안내하는 그 공고를 보며 이 섬사람들의 삶에 처음으로 질투를 느꼈다. 야성을 간직한 정글과 은밀한 해변을 지척에 두고 누리는 북마리아나제도 사람들은 큰 수고와 부담스러운 비용,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자연이 주는 기쁨, 운동과 야외 활동이 주는 활력을 자기 일상으로 만들 수 있다. 비치 로드 패스웨이(Beach Road Pathway)에서 만난 아웃리거 카누 코치와의 대화에서 그런 삶의 일면을 엿봤다. “마리아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운동을 동시에 즐겨요. 저 친구는 마취과의 간호사로 일하며 패들링(아웃리거 카누)뿐 아니라 하이킹, 트레킹, 바다 수영, 사이클도 하고 있죠. 나도 다리 부상만 회복하면 바다로 돌아갈 거예요. 섬의 어떤 사람들은 바다를 등지고 살기도 한다지만 대부분은 이 바다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잘 알고 있어요. 여기 언제까지 머물러요? 부럽다는 얘기만 하지 말고 토요일 아침 6시에 이 포인트로 다시 와봐요. 사이판에 있는 3개의 카누 클럽이 경주를 벌이거든요. 누가 알겠어요? 내년엔 당신이 저 배 위에서 열심히 노질을 하고 있을지!” 안타깝게도 그 토요일 오전 4시 반에 달리기 모임 미팅이 잡혀 있어 멋진 패들러들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대신 그의 부추김에 자극을 받아 북마리아나제도 곳곳, 사이판과 로타, 티니안의 자연에서 끊임없이 걷거나 뛰거나 물장구쳤다. 하루 칼로리 소모량을 트래킹해주는 시계엔 거의 매일 700~900kcal 사이의 숫자가 찍혔다. 마리아나가 내게, 서울에선 좀처럼 이루지 못했던 ‘체중 감량’이란 선물을 줬을까? 결과가 궁금하다면 이후에 펼쳐지는 고행기를 정독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