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성동 계곡 아래 자리한 아워플래닛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바위와 마주한다. 100년 전 당시 건축 기술이 부족해 제거하지 못한 바위가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자연과의 연대, 지속가능한 식탁을 지향하며 매일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내는 아워플래닛에 딱 어울리는 공간이다.
지속가능성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 ‘이타카’를 운영하던 김태윤 셰프가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일하던 장민영 대표와 처음 만난 것은 약 7년 전 ‘계절의 기억’이라는 워크숍 다이닝에서다. 당시 장민영 대표는 셰프들과 협업해 식재료에 대한 행사를 기획하거나 팝업 스토어를 여는 일을 했다. ‘계절의 기억’도 그중 하나로 장민영 대표가 식재료의 품종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김태윤 셰프는 식재료의 매력을 살려 코스를 선보였다. 이후 두 사람은 ‘계절의 기억’을 비롯해 ‘우리가 사랑한 바다’ 같은 협업을 진행하며 연을 맺었다. 음식과 자연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둘은 바다와 정글, 오지로 기꺼이 뛰어들어 식재료의 근원을 탐색했다. 식탁 위에 오르는 음식이 어디에서 나는지, 그 변화가 우리의 삶과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목격했다. 그리고 그 탐험의 결과를 아워플래닛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풀어놓았다. 지역 로컬 식재료로 미식 다이닝을 구성하는 ‘로컬 오딧세이’, 잊혀가는 식재료의 품종을 다루는 ‘계절의 기억’, 채식과 친해질 수 있는 ‘비건 다이닝’ 같은 팝업이나 워크숍 등이 그 결과물이다. 최근에는 오프라인 장터에 참여하거나 기업의 식재료 메뉴 개발 컨설팅도 진행한다.
“저희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종 다양성입니다. 품종 다양성, 지역적 다양성이 여기에 해당하죠. 생태계를 이루는 수많은 다양성에 대한 의미도 담았고요. 가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끈끈한 종 다양성의 고리는 우리 삶을 지탱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요. 사람들에게 식탁 위의 종 다양성, 즉 자연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어요.”(민영)
두 사람은 식재료의 과정을 알고 먹기만 해도 지구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 연유로 자연 속에서 식재료를 탐구하는 여행을 자주 떠났고, 그들을 사로잡은 곳이 바로 인도네시아다.
처음 만나는 익숙함
2022년 여름, 둘은 한 달간 인도네시아에 머물며 토속적이면서도 화려하고, 아는 맛이자 처음 맛보는 듯한 식탁을 수없이 만났다. 물론 시작부터 인도네시아의 맛에 빠졌던 것은 아니다. 여행 초반엔 관광객인 그들에게 여느 관광객이 먹을 법한 음식을 내어주었다.
“초등학생도 좋아할 법한 달콤하고 감칠맛 나는 맛이랄까요? 처음에는 특별한 감흥도 없고 며칠 지나지 않자 질리기까지 했어요. 그러다 문득 둘러보니 관광객인 우리에겐 누구나 잘 먹을 만한 무난한 요리를 내어주곤 자기들은 ‘진짜 로컬 음식’을 먹더군요. 그때부터 요구했죠.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인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 이런 음식 말고 당신들이 먹는 걸 똑같이 먹겠다’고요. 그러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미식 세계가 펼쳐졌어요. 머무는 동안 한 번도 한국 음식이 그리웠던 적이 없을 만큼요.”(태윤)
인도네시아 전통 요리에는 고추, 생강, 강황, 코코넛설탕, 양파, 마늘 등 다양한 식재료와 향신료가 풍부하게 사용된다. 여기에 샬롯이나 너트메그, 정향 같은 자극적인 향신료를 곁들이면 인도네시아 요리의 중심이 되는 삼발 소스의 주재료가 된다. 한국에 김치 종류가 많은 것처럼 인도네시아엔 부드러운 맛부터 아주 매운맛에 이르기까지 수천 가지의 삼발 소스가 있다. 쌈장이나 비빔장이 되기도, 밑반찬이 되기도 한다. 새우 페이스트를 넣으면 삼발 트라시, 라임을 넣으면 삼발 도부, 땅콩을 넣으면 삼발 페첼, 망고를 넣으면 삼발 망고가 되는 격이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삼발은 히조였어요. 인도네시아 서부 수마트라 지역의 전통 음식인데 녹색 고추를 잘게 다져 매콤하면서도 라임의 상큼함이 더해진 소스죠. 신기한 것은 제 고향 거창에도 똑같은 음식이 있어요. 할머니가 ‘고추지름장’으로 부르시던 고추 양념장의 일종인데 경상도에서만 먹는 밑반찬이에요. 어릴 적 밥상에 매일 올라오던 그 반찬을 인도네시아 오지마을에서 맛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지금까지 선명해요.”(민영)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사람들, 전혀 다른 대륙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같은 맛을 구현해낸다는 것에 놀랐다. 우리나라의 한상차림과 비슷한 파당을 먹기 위해 파당 시티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밥 하나를 기본으로 밑반찬이 죽 늘어지는 것을 보고 금세 한정식이 떠올랐다. 한국의 산나물이 이곳에선 찻잎으로, 참기름 대신 코코넛 오일이 사용되고 있었다. 항상 강조하던 종 다양성이 인도네시아에서 존중되는 것도 놀라웠다. 국내에도 익숙한 나시 고렝을 만들 때도 가벼운 쌀인 안남미뿐만 아니라 현미, 찹쌀이 사용됐다. 색도 검정이나 초록 등 다양했다. 쌀에 따라 나시 고렝의 맛도 조금씩 달라졌다.
“인도네시아 음식은 다양하면서도 먹기 쉽습니다. 고수 같은 향신료를 못 먹는 사람이 은근히 많잖아요.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동남아 여행에서 음식으로 고생하기도 하고요. 저는 그런 분들에게 고민 없이 인도네시아로 가라고 해요. 음식에서 향신료가 ‘훅’ 하고 들어오지 않거든요. 대부분의 식재료를 볶거나 익혀서 조금 더 맛이 부드럽고 온화해요. 향신료 초보도 충분히 좋아할 만한 맛이죠.”(태윤)
음식과 미래의 연결 고리
사실 이들이 인도네시아에 갔던 이유는 단지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태윤 셰프는 당시 발행하던 뉴스레터에 “팜유 때문에 오랑우탄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러고 나니 정말로 오랑우탄이 보고 싶어졌다. 둘 다 다이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한몫했다. 일주일간 보트 위에서 먹고 자며 다이빙하는 ‘리브어보드’에 참여해 자연을 마음껏 누렸다. 둘은 리브어보드 첫날 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보트를 타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휴대폰 신호가 약해졌고 강가에는 노을이 졌어요. 멀리 이슬람 사원에선 기도문이 흘러나왔죠. 곧바로 저녁을 먹었는데 보트 위에는 오로지 초 두 개가 전부였어요. 나머지 조명은 반딧불이로 충분했거든요.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붙여 놓은 것처럼 밝아지더라고요. 저희 두 사람이 항상 꿈에 그리던 장면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어요.”(민영)
저녁 식사를 마치니 다이닝 공간이 침실로 바뀌었다. 사방이 뚫린 배에 매트가 깔리고 모기장이 쳐졌다. 전기나 통신이 두절된 곳에 들어서자 비로소 완벽한 단절이 느껴졌다. 지구의 심장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소리, 풀벌레 소리,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 강에서 뛰는 물고기의 참방거리는 소리만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침 알람 대신 새소리가 울려 퍼졌고, 해가 뜨기 무섭게 강으로 뛰어들었다. 오후에는 정글로 들어가 오랑우탄과 낯선 동식물을 관찰했다.
“인도네시아의 자연은 전 세계에서 종 다양성이 뛰어나기로 유명해요. 다이빙하는 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구조된 오랑우탄을 돌보는 구역, 반대쪽에는 야생 오랑우탄이 사는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하지만 그 구역들은 전체 숲에 비해 보잘것없이 좁았어요. 나머지 숲은 모두 팜유 산업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태윤)
두 사람은 인도네시아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인투더와일드’라는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곳에서 맛본 요리를 한국의 식재료로 재해석해 내어놓으며 경험을 나누는 행사였다. 동해에서 잡힌 참다랑어를 사용해 말루쿠(Maluku)식 회무침을 만들고 여수의 달마새우로 아체(Acèh)식 볶음국수를 조리했다. 바다와 정글에서 만난 야생 동식물, 반딧불 아래에서 한 식사, 정글 밖에서 찾은 로컬 시장과 음식의 경험을 나눴다. 조금 더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생산된 팜유를 사용하길 권유했다. 이것이 장민영 대표와 김태윤 셰프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이다.
뉴질랜드 남섬을 캠핑카로 돌고, 대왕고래를 보기 위해 스리랑카를 가는 둘에게 여행은 곧 자연이다. 인도네시아를 다녀온 이후 두 사람은 틈만 나면 그곳으로 가 바다로 뛰어들고 오지를 걷는다. “지구의 과거이자 미래”라는 인도네시아는 이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을 주는 원천이다.
가도가도
재료(3~4인분)
스파이시 피넛 소스 4T, 삶은 달걀 1개, 옻순·엄나무순·머위·죽순·래디시·새우칩, 소금 적당량
스파이시 피넛 소스
피넛 버터 125g, 마늘 1톨, 간 생강 1/2T, 강황가루 1/2t, 타바스코 1/2t, 참기름 1/2T, 간장 2T, 꿀 1T, 레몬즙 1/2개, 물 125g
- 스파이시 피넛 소스의 모든 재료를 볼에 넣고 블렌더로 간다.
- 삶은 죽순은 데친 후 4cm 길이로 커팅하고 래디시는 슬라이스한다.
- 옻순, 엄나무순, 머위는 소금물에 데친 후 얼음물에 담갔다가 물기를 짠다.
- 새우칩은 튀기고, 달걀은 끓는 소금물에 9분간 삶는다.
- 각각의 재료를 접시에 담으면 완성.
tip.
인도네시아 음식이지만 한국의 제철 나물도 잘 어울린다. 다른 잎채소로 대체해 독창적인 가도가도를 만들어보자.
나시 고렝
재료(3~4인분)
닭가슴살 150g, 포도씨유 3T, 케찹 마니스(다크 소이 소스) 3T, 다진 마늘 2t, 다진 홍고추 1T, 다진 양파 1개, 쌀밥 3컵, 피시 소스 2t, 토마토·라임 슬라이스 적당량
- 웍을 달군 뒤 포도씨유 1T를 두르고 사방 1cm로 자른 닭가슴살을 볶는다.
- 고기가 거의 다 익으면 케찹 마니스 1T를 넣고 볶아서 따로 덜어놓는다.
- 웍에 포도씨유 2T를 두르고 다진 양파와 다진 마늘을 볶는다.
- 양파가 다 익을 때쯤 홍고추와 덜어둔 닭고기, 쌀밥을 넣고 재료들이 잘 섞이도록 볶아준다.
- 피시 소스 2t와 케찹 마니스 2T를 넣고 볶는다. 그릇에 담고 토마토와 라임 슬라이스를 가니시로 올려 완성한다.
tip.
라임 대신 레몬즙을 뿌려도 색다르다. 쌀의 품질에 따라 조금씩 다른 맛이 나니, 미세한 차이를 느끼며 종 다양성을 실감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