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역 뒤편 오래된 주택가 골목. 유명 셰프들의 레스토랑이 하나둘 자리 잡고 있지만, 여전히 구도심의 정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들어선 작은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조용하지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 가운데 자리한 와인 바 ‘미들레인’은 몇 달 전까지 제로 웨이스트 레스토랑 ‘레벨제로’였던 곳으로, 지금은 와인 러버들이 주목하는 아지트로 변모했다. 간판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이곳을 이끄는 이는 데니 한(Denny Han) 셰프다. 호주의 미식 성지로 불리는 아티카(Attica), 뷔드몽(Vue de Monde) 등을 거친 그는 한국에서도 지속 가능성과 미식의 가치를 접목한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호주에서 요리를 하며 가장 중요하게 배운 것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이었어요. 그 자체가 곧 친환경이고, 제로 웨이스트였죠. 그래서 레벨제로를 시작하면서 음식의 가치를 전하는 동시에 지속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싶었습니다.”

레벨제로에서 미들레인까지
레벨제로는 자연을 모티프로 한 코스 요리를 선보이고 공간을 이동하며 음식을 경험하는 색다른 방식을 제안했다. 갤러리와 협업해 환경을 주제로 한 전시를 열고, 디자이너들과 손잡고 식소비 패턴을 시각적으로 풀어냈다. 지금은 다이닝 쇼룸이라는 개념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그가 구상하는 다이닝 쇼룸은 이를테면, 제주도의 동굴에서 로컬 식재료를 활용한 팝업 다이닝을 열거나, 파리의 갤러리에서 예술과 함께하는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것. 미들레인 역시 레벨제로의 연장선에 있다. 유리 천장으로 자연광이 쏟아지는 중정, 친환경 소재로 제작한 테이블, 주방에서 나온 달걀 껍데기로 만든 접시, 재생지를 사용한 조명까지 공간 자체가 자연을 담고 있다.
“음식에도 자연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풀만 먹고 자란 소를 식재료로 사용하고, 개체 수가 적은 어종은 양식한 것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지속가능성을 고민합니다. 한국 고유의 식재료인 앵두나 겨우살이 같은 것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의 이런 요리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곳은 셰프로 일했던 호주와 덴마크다. 특히 로컬 식재료를 활용하고 발효나 숙성 등 친환경 조리법에 집중하는 노르딕 퀴진(Nordic Cuisine)의 중심지 코펜하겐은 데니 한 셰프에게 깊은 영감을 준 도시다.
“코펜하겐은 친환경적인 미식을 탐험하기에 완벽한 도시입니다. 로컬 식재료를 활용한 창의적인 요리가 넘쳐나 미식가라면 누구나 경험하고 싶어 하는 곳이죠.


코펜하겐에서 영감을 얻는 법
노르딕 퀴진 문화를 깊이 경험하기 위해 데니 한 셰프는 코펜하겐에 갈 때마다 매일 저녁 파인다이닝을 찾는다. 코펜하겐에는 노마(Noma), 알케미스트(Alchemist), 제라늄(Geranium), AOC 등 독창적인 접근과 지속가능성, 자연을 존중하는 미식 철학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레스토랑이 많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은 노르딕 퀴진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노마다.
“노마는 식재료 고유의 맛을 정말 잘 끌어냅니다. 발효한 어린 민들레, 햇볕에 말린 솔잎 같은 야생식물도 노마에선 훌륭한 재료로 쓰여요. 가장 인상적인 요리는 대구를 이용한 코스였어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대구가 그곳에선 색다르게 이용되더군요. 혀, 머리, 살, 내장까지 각 부위를 저마다 다른 레시피로 맛볼 수 있었죠.”
최근 코펜하겐의 노르딕 퀴진은 단순한 미식 경험을 넘어 환경보호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되고 있다. 데니 한 셰프는 이러한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레스토랑으로 알케미스트를 꼽았다. 이곳은 레스토랑이라기보다 예술 공간에 가깝다. 특정 코스에서는 공간을 이동하며 요리를 즐길 수 있는데,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진다.
“알케미스트에서는 요리가 곧 예술이에요. 기술적으로 복잡하고 매우 창의적인 동시에 극적이기까지 하죠. 해양오염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대구 가죽에서 추출한 식용 콜라겐으로 장식한 ‘플라스틱 판타스틱(Plastic Fantastic)’, 식량문제를 상기시키는 ‘헝거(Hunger)’, 자연방사로 키운 닭 사용을 장려하는 ‘번아웃 치킨(Burnout Chicken)’ 같은 요리가 그렇죠.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영감을 가져온 캐비아 요리나 헌혈을 할 수 있는 QR코드와 함께 제공되는 아이스크림 디저트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메뉴였어요.”
코펜하겐에는 다양한 파인다이닝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연의 순환, 생명의 유한함 같은 철학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데니 한 셰프는 이런 문화가 한 도시의 미식 신(scene)에 퍼진 데에는 풍부한 식재료가 뒷받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그는 매일 저녁 파인다이닝으로 가기 전, 코펜하겐의 랜드마크 마켓인 토르베할레르네(Torvehallerne)에 들러 당일 들어오는 식재료를 마음껏 구경했다. 싱그러운 채소, 낯선 야생식물, 싱싱한 해산물은 물론 새로운 숙성 기법을 적용해 만든 다양한 치즈도 많았다. 다채로운 풍미의 치즈와 신선한 채소를 사서 맛보고 숙소에서 직접 음식을 해 먹기도 했다. 룬데토른(Rundetårn) 근처의 숙소 창문을 통해 아침마다 궁을 지키는 군사들의 행진을 보며 브런치를 만들어 먹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아침 일찍 문 여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는 것도 빼먹지 않는 루틴 중 하나였다.
“요리를 시작하기 전 바리스타로 일한 경험이 있는 만큼, 커피에도 관심이 많아요. 코펜하겐엔 훌륭한 빵집과 카페가 많으니 커피와 함께 곁들일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추천해요. 라테로 유명한 ‘라카브라(La Cabra)’엔 꼭 가보세요. 유제품이 훌륭한 덴마크에서 카페라테를 빼놓을 순 없으니까요.”
데니 한 셰프의 또 다른 단골 카페는 란데스게드에 있는 ‘프롤로그 커피(Prolog Coffee)’. 짙은 파란색 포인트가 인상적인 카페다. 로컬이 모여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는 이 작은 카페는 사실 매년 지속 가능한 원두 생산과 공급을 위한 보고서를 낼 만큼 환경에 진심인 곳이다. 데니 한 셰프는 코펜하겐을 여행할 때마다 이곳에 들러 에세이처럼 길게 쓰인 산지의 농장 이야기를 꼼꼼히 읽으며 커피를 맛본다. 카페와 가까운 곳에 자리한 ‘유노 더 베이커리(Juno the Bakery)’에서 카다몬 빵을 사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 코스다.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메신저
데니 한 셰프의 창의적인 음식이 단순히 코펜하겐의 미식 경험에서만 탄생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뮤지엄으로 꼽히는 루이지애나 근대미술관에서 전시를 감상하고, 오래된 중고 카메라 숍에서 저렴하게 산 사진기로 도시의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을 찍으며 영감을 얻는다.
“예르겐 보(Jørgen Bo)가 디자인한 루이지애나 근대미술관을 안팎으로 걸으면, 건물이 마치 작품처럼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동선을 따라 걸으며 즐기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곳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올라요. 사진도 마찬가지죠. 필름 카메라를 찍는 취미가 있는데 라이카 미니 2를 ‘원 오브 매니 카메라(One of Many Cameras)’라는 작은 반지하 중고 카메라 매장에서 샀어요. 랜드마크나 관광객보다는 골목, 로컬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다 보면 새로운 창작 욕구가 솟아오르죠.”
데니 한 셰프에게 코펜하겐을 추억할 만한 요리를 부탁했더니, 레시피를 알아도 따라 하기 힘든 창의적인 요리를 소개했다. 덴마크산 해산물과 유제품에서 영감받은 콜리플라워와 조기를 이용한 요리다. 우리나라 토종 쌀 흑갱을 이용해 만든 소스와 겨울 냉이를 가니시로 올린 근사한 디시가 펼쳐졌다. 치즈 풍미가 감도는 채소의 아삭한 식감에 이어 생선과 함께 은은하게 퍼지는 냉이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데니 한 셰프가 코펜하겐에서 보고 먹고 느낀 것들을 눈과 코, 입으로 확인하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코펜하겐의 미식 철학은 제가 가려는 방향을 제시해요. 음식이란 자연과 사람이 만나는 접점이며, 셰프는 메시지 전달자입니다. 저에게 코펜하겐은 수많은 메시지를 주는 여행지죠. 미들레인과 새로운 프로젝트로 돌아올 레벨제로에서 저만의 메시지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숯에 구운 조기 & 냉이 버터 소스(1~2인분)

재료
조기 한 마리, 생선 스톡 90g, 냉이잎 15g, 김 오일 5g(구운 김 1 : 카놀라유 1), 흑갱 10g (현미로 대체 가능), 냉이 버터 30g, 레몬 주스, 귤 25g(가니시), 말돈 소금
1 조기는 깨끗이 손질한다.
2 냉이잎을 세척 후 오일과 말돈 소금으로 시즈닝한 다음 숯에 재빨리 구워낸다.
3 흑갱은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미리 익힌다.
4 김은 불에 구운 후 바삭할 때 곱게 으깬 다음 카놀라유를 넣어 김 향이 오일에 충분히 밸 때까지 빻아 준비한다.
5 귤을 4등분한 후 알갱이 부분만 불에 그을려 굽는다.
6 포트에 냉이 버터를 녹인 뒤 흑갱을 넣어 볶는다. 여기에 생선 스톡을 섞고 소금과 레몬 주스로 취향에 맞게 간을 맞춰 소스를 만든다.
7 조기 껍질에 가볍게 오일을 바른 후 소금으로 간을 해 뜨겁게 달군 석쇠에 껍질 쪽을 먼저 올린다. 껍질이 갈색이 돌면 뒤집어서 익힌다.
8 플레이트에 ⑥의 소스를 담은 뒤 조기를 올린다.
9 플레이트 빈 공간에 구운 귤, 냉이잎, 김 오일을 올려 마무리한다.
10 구운 귤을 짜서 생선 위에 골고루 뿌린 후 먹는다.
tip.
조기 손질이 어려우면 통째 요리해도 괜찮다. 생선을 구울 때는 석쇠를 이용하면 좋고, 생선이 달라붙지 않도록 올리기 전 키친타월로 오일을 석쇠에 골고루 발라 뜨겁게 예열한다.
로스트 콜리플라워 & 마카다미아 퓌레

재료
콜리플라워 170g, 셀러리 파우더 0.5g(생략 가능), 케이퍼 파우더 0.5g(생략 가능), 차콜 오일 5g(올리브 오일로 대체 가능), 레몬 주스 2g, 레자노 치즈 3g, 마카다미아 퓌레 60g(구운 마카다미아 200g, 구운 마늘 45g, 태운 홍고추 32g, 정수 135g, 화이트 와인 비니거 7g, 레몬 주스 5g, 백설탕 4g, 말돈 소금 7g)
1 마카다미아 퓌레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를 넣고 믹서에 곱게 간다.
2 콜리플라워는 밑동에 칼집을 낸 후 끓는 물에 설익힌 후 식힌다.
3 식힌 콜리플라워 표면에 오일, 레자노 치즈, 말돈 소금을 시즈닝하고 220℃로 예열한 오븐에 12분 굽는다.
4 구운 콜리플라워에 차콜 오일, 레몬 주스, 케이퍼 파우더로 간한다.
5 플레이트 좌측에 구운 콜리플라워를 올린다.
6 플레이트 우측에 마카다미아 퓌레를 담는다.
7 마카다미아 퓌레에 차콜 오일, 셀러리 파우더를 올려 마무리한다.
tip.
콜리플라워는 선호하는 식감에 맞게 굽는다. 표면에 캐러멜라이징을 잘해줄수록 풍미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