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간 트램이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의 조용한 외곽 동네 기야초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거세게 내리던 비가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골목을 걸으며 방금까지 쏟아지던 비 냄새, 짙어진 담벼락의 초록을 눈에 담았다. 오래됐지만 누군가 정성스럽게 관리한 듯한 집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샛노란 봄꽃을 쥔 할머니가 소녀처럼 웃으며 목례를 건넨다. 77세 예술가 이다 미도리(飯田みどり)다. 그는 60여 년 전부터 금속을 세공하고 판화를 찍고 그림을 그려왔다. 동시에 23년간 다도를 예술로 풀어내는 인물이다.
그의 안내에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조도 낮은 조명과 은은한 향이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잔잔하게 끓고 있는 물 덕분에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방이 나타났다. 금속으로 만든 말차 통과 향 주머니인 향낭(香囊)부터 흑과 백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판화 액자, 그 아래에 꽃꽂이해놓은 고고한 꽃까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이 모든 것이 이다 씨의 작품이고, 나도 모르는 새 완벽하게 준비된 다회(茶會)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가 꽃꽂이의 의미를 설명할 무렵부터다.
“다도에선 계절의 아름다움을 시적으로 표현한 문장이 많습니다. 오늘 도코노마(床の間, 방 안 한쪽에 인형·꽃꽂이·붓글씨 등을 걸어놓는 곳)에는 ‘柳は緑 花は紅(야나기와 미도리 하나와 구레나이)’라는 문장을 새긴 저의 판화 작품을 족자처럼 장식했습니다.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다는 의미죠. 그래서 버지니아 버드나무와 초롱꽃, 서양금사매로 꽃을 표현했어요. 식물의 종류, 꽃송이와 꽃잎은 모두 홀수로 맞췄고요. 일본 꽃꽂이에서 통용되는 룰이자 제가 속한 엔슈류 유파의 중요한 철칙 중 하나죠.”
12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일본 차 문화에는 오랜 시간만큼 각기 다른 철학과 미의식을 지닌 여러 유파(流派)가 존재한다. 일본 모모야마 시대에서 에도 시대에 걸쳐 차 문화를 견인한 주요 인물로는 센노 리큐(千利休),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고보리 엔슈(小堀遠州)가 있다. 일본식 다도의 선구자로 불리는 센노 리큐의 흐름을 계승한 우라센케(裏千家)와 오모테센케(表千家),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는 센노 리큐의 와비사비(侘び寂び), 즉 간소함과 내면의 수양을 중시한다. 이들과는 조금 다른 결을 지닌 유파가 바로 이다 씨가 속한 엔슈류다.
엔슈류는 에도 시대 초기에 다이묘이자 다인이었던 고보리 엔슈의 다도 유파로, 와비사비에 기레이사비(奇麗さび)라는 미의식을 더해 다도는 물론 건축과 조경, 도자, 꽃꽂이 등 예술 전반에 걸쳐 조화의 미를 종합 예술로 표현한다. 다실은 비교적 밝고 개방적인 구조로 설계하고, 다구 역시 세련되고 세밀하게 꾸미는 것도 특징이다. 이 모든 구성 요소가 하나의 다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엔슈 유파에 다양한 예술가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다 씨는 에히메현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엔슈류 유파 예술가들의 중심 인물 중 한명이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만 해도 수십 명. 공식적인 다회 행사에는 그가 만든 금속 오브제, 판화 작업 등이 함께 놓인다. 이다 씨가 60년 가까이 세공해온 작품은 그 자체로 미술관의 전시물 같지만, 동시에 다회를 위한 완벽한 배경인 셈이다.




다회라는 예술
말차를 마시기 전 소담하지만 다양한 음식이 담긴 플레이트가 나왔다. 다회 초반, 속을 데우는 가벼운 식사인 차 가이세키(茶懐石)다. 차 가이세키는 보통 계절감을 담은 소박한 요리로 구성된다. 먼저 부드러운 달걀말이를 음미했다. 이어 탱글탱글한 새우살과 작두콩이 들어간 튀김의 식감이 절묘한 대비를 이뤘다. 쑥갓, 꽈리고추 등 채소류도 단정하게 자리했다. 마쓰야마 인근 바다에서 잡은 꼬치 고기와 연어를 맛본 뒤, 차 가이세키의 필수인 절임류로 입안을 정리하니 담백하면서도 미세한 감칠맛이 은은히 남는다.
“다회는 보통 4~5시간가량 이어집니다. 숯을 데우는 것으로 시작해 차 가이세키를 먹고, 진한 말차를 마신 뒤 화과자를 먹지요. 마지막으로 연한 말차로 마무리해요. 차 가이세키는 진한 말차를 마시기 전 위장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차 가이세키를 먹고 나면 본격적으로 말차를 맛볼 차례다. 이다 씨는 교토의 우지 말차를 다완에 담고, 고운 다선으로 찻물을 섞었다. 숙련된 동시에 느긋한 손놀림이다. 반복된 동작인데도 처음인 것처럼 진지하고 조심스럽다. 그가 건넨 말차가 입안에 닿는 감촉은 실크처럼 부드럽고, 맛은 농밀하고 깊었다. 진한 풍미가 오랫동안 남았다. 고요했던 공간은 어느새 은은한 말차 향과 가벼운 찻잔 소리로 가득찼다.
“23년 전, 댄서 친구와 함께 처음 차를 접했습니다. 새로운 문화를 배우고 싶었거든요. 엔슈류의 다도는 예술의 갈증을 완벽하게 채워줬어요. 전통 다도 형식을 존중하면서 소재와 표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거든요. 지금 먹고 있는 화과자에 에히메에서 나는 작두콩, 초여름의 팥을 넣는 동시에 유럽에서 온 화이트 초콜릿이나 건자두를 넣은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차와 함께 단정하게 나온 화과자에 시선이 쏠렸다. 다도에서 화과자는 차의 맛과 흐름을 완성하는 요소다. 말차의 쌉쌀함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단맛이 필요한 데다, 입안을 정리하는 역할도 한다. “초여름 오후, 서서히 익어가는 열매의 기운을 화과자에 표현했어요. 고운 반죽 안에 넣은 작두콩 덕분에 씹을수록 고소하고 향기로울 거예요. 부드럽게 조린 팥은 진득하고 달콤하죠. 건자두가 내는 은은한 산미가 단맛을 절묘하게 잡아주고요.” 이다 씨의 말처럼 화과자 세 개는 저마다 초여름의 시간을 품고 있었다. 백앙금과 화이트 초콜릿이 부드럽게 어우러지고, 사이사이에 밤잼이 스며들었다. 씹을 때마다 사각한 식감과 맑은 단맛이 입안에 남는다. 마지막으로 연한 말차를 내어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일본의 다도는 단순히 마시는 행위가 아닙니다. 경험, 다시 말해 몰입형 예술의 확장입니다. 차 한 잔을 중심으로 이토록 다양한 미식 세계가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이다 미도리 씨가 마련한 다회는 오감의 예술이자, 자연의 풍경을 섬세하게 되짚는 시간이었다. 찻물이 오르고 화과자의 단맛이 입안에 퍼질 때까지 부산스러운 마음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차는 계절을 배우고 마음의 속도를 맞추는 일이었다.
차 가이세키

- 죽순조림 죽순과 다시를 넣어 끓이고, 적당량의 소금·설탕·사케로 간을 한다.
- 머위조림 머위와 다시를 넣어 끓이고, 적당량의 소금·설탕·사케로 간을 한다.
- 꼬치고기 소금구이 꼬치고기를 3등분한 뒤, 소금을 적당량 뿌려가며 굽는다.
- 닭다리살 소금구이 닭다리살을 먹기 좋은 크기로 준비한 뒤 소금과 사케를 적당량 뿌려서 굽는다.
- 연어 사이쿄야키(西京焼き, 교토 백된장에 생선이나 육류를 절여서 구운 일본 전통 요리) 미소 된장, 사케, 조미술을 섞어 만든 재료에 연어를 하룻밤 재워둔다. 절인 연어를 굽는다.
- 새우살과 작두콩튀김 밀가루에 소금을 조금 넣고, 다시를 섞어 반죽해둔다. 새우살과 작두콩에 반죽을 묻힌 뒤 식용유에 튀긴다.
- 우엉튀김 우엉에 다시, 간장, 설탕, 조미술, 사케를 넣어서 조린다. 우엉조림을 식용유에 튀긴다.
- 달걀말이 달걀을 다시에 푼다. 소금, 설탕, 사케, 간장을 적당량 넣고 잘 섞은 후 프라이팬에 부친다. 대나무 발로 말아 모양을 만든 후 식힌다.
- 쑥갓과 명란젓무침 쑥갓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후 알맞은 길이로 썬다. 명란젓과 함께 버무린다.
- 잔멸치와 당근깨소금무침 당근을 뜨거운 물에 데친다. 당근과 잔멸치에 참깨, 식초, 설탕을 넣고 버무린다.
- 꽈리고추 간장절임 꽈리고추를 석쇠에 굽는다. 다시와 간장, 조미술을 섞은 국물에 구운 꽈리고추를 절인다.
- 절임류 나라즈케(오이를 술지게미에 절인 요리)와 시바즈케(오이를 소금에 절인 요리).
화과자

작두콩 양갱
재료
달걀흰자, 작두콩 앙금, 팥 앙금, 한천, 설탕, 물
- 달걀흰자 거품을 낸 뒤 물과 한천, 설탕을 넣고 끓인다. 팥 앙금을 넣고 용기에 붓는다.
- 물과 한천, 설탕을 끓인 뒤 작두콩 앙금과 함께 1 위에 붓는다.
- 물과 한천, 설탕을 끓인 뒤 달걀흰자와 함께 1 위에 부은 뒤 냉장고에 넣어 굳힌다.
찹쌀 양갱
재료
도묘지코(道明寺粉, 쪄서 말린 찹쌀가루), 한천, 설탕, 물, 백앙금, 건포도, 밤잼
- 도묘지코를 먼저 준비한다.
- 물과 한천, 설탕을 끓인 뒤 백앙금과 건포도, 밤잼을 함께 1 위에 붓고 냉장고에 넣어 굳힌다.
초콜릿 양갱
재료
팥 앙금, 설탕, 한천, 물, 다크 초콜릿, 건자두
- 물과 한천, 설탕을 함께 끓인 뒤 팥 앙금과 다크 초콜릿, 건자두를 넣는다.
- 용기에 부어 열기를 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