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춤과 무술을 매일의 운동으로
마다뽄 노이니스 Madaporn Noinith
Dancer & Thai Fit Instructor
랏차담리 로드와 플른칫 로드가 교차하는 사거리에 자리한 에라완 사원 앞을 지나다 보면 황금빛 탑 모양의 모자와 전통의상을 입고 춤추는 무용수들을 종종 만난다. 이들이 추는 춤은 방콕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힌두교와 불교의 신 브라마를 경배하는 의식으로, 타이의 민속무용에 속한다. 타이 패키지 투어의 필수 코스 중 하나인 전통식 정찬에 곁들여지는 공연에서도 본 듯한 이 춤사위를 ‘타이 핏(Thai Fit)’이라는 운동으로 바꾼 무용수들이 있다는 기사를 우연히 접했다. 운동이 된 옛날 춤. 우리로 치면 봉산탈춤이나 승무를 누구나 쉽게 출 수 있는 에어로빅으로 바꾼 셈인가?
주저 없이 메일을 보내 만남을 청했다. 흔쾌히 즉답을 보내온 듀(Dew, Khajittam Phatta- yakul)와 촬영 날 우리를 맞이해준 퓨(Feaw, Madaporn Noinith)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이자 무용가, 타이 핏을 함께 만든 설립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단짝이다. 우리를 태운 차가 ‘파따야쿨 타이 뮤직 앤드 드라마 스쿨(Phattayakul Thai Music and Drama School)’을 간판으로 내건 오래된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퓨는 나와 통역사, 사진가를 수업이 열리는 교실로 곧장 데리고 올라갔다. 별다른 설명도, 인사치레도 없이 시작된 춤판에 끼어들 생각은 사실 없었다. 음악이 나온 후 2~3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절로 리듬을 따라가는 몸.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자’고 다짐했던 통역사 차나마스 까오와 나는 손끝 모양까지 신경 써가며 연습실 한구석에서 운동인지 춤인지 모를 동작에 한껏 집중했다. 온종일 쥐고 있는 스마트폰 때문에 오그라든 손가락과 팔근육, 말린 어깨와 굽은 척추가 팽팽하게 펴지는 기분, 비트의 속도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빨라지는 심장박동, 온몸에 피가 돌며 기분 좋게 뜨거워지는 몸을 차례로 느꼈다. 수업이 끝난 후 “천근만근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뇌가 맑아진 것 같다”고 말하자 퓨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타이 핏은 타이의 고전무용과 무술 동작에서 스포츠의 요소를 찾아 만든 운동이에요. ‘댄서사이즈’로 이해하면 쉽죠. 우리는 타이의 역사와 정신을 품은 전통 춤과 음악이 요즘 세대에게 잊히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스포츠 과학자, 운동 전문가들과 함께 안전하고 효능 높은 동작을 연구하고 직접 훈련해보며 타이 핏을 만들었습니다. 워밍업, 트레이닝, 쿨다운이라는 단계에 맞는 시퀀스를 짜고, 거기게 맞는 음악을 만들고, 소근육과 대근육을 골고루 사용하는 동작을 뽑아낸 후 이 새로운 움직임을 누군가에게 완벽히 가르쳐줄 수 있을 만큼 우리 몸에 익히기까지 꼬박 2년가량 걸렸죠.”
2017년에 첫선을 보인 후 타이 핏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다양한 연령층의 타이 사람들과 만났다. 건강에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20대, 격무로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30대가 주요 타깃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세대에게 호평과 사랑을 받고 있다. “타이 핏은 운동이라는 정체성 외에도 때론 예술적인 요소에 집중해 하나의 ‘의식’이 되기도 해요. 예로 〈Scene Erawan:Destiny〉라는 전시와 협업해 신을 향한 기도인 ‘에라완 춤’을 배워보는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전통 춤은 자신의 소원을 이뤄준 신에게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거든요.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마음 챙김을 할 수 있어 좋았다’거나 ‘어린 시절에 접한 고전 춤과 무술의 요소에서 향수를 느꼈다’는 분들도 있어요.” 듀와 퓨가 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든 이 새로운 ‘움직임’에서 타이 사람들은 각자의 즐거움과 성취를 찾고 있다. “단순히 건강을 위해 하든, 자신에게 집중하거나 혹은 종교적인 명상이 목적이든, 춤과 음악 그 자체를 즐기든 다 좋아요. 우리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전통무용, 무술이 고리타분한 옛날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와 혹은 자신의 삶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싶습니다.”
뿌리를 탐구하며 약이 되는 미식을 만드는
수깐야 응암스리캄 Sukanya Ngarmsrikham
Chef
방콕에 머무는 동안 만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원기를 회복하고 싶을 때 어떤 음식을 먹나요?” 우리의 삼계탕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대치할 만한 타이 음식은 뭘까. 돌아온 답들엔 공통점이 딱히 없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보양이 필요 없나?
180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사이, 타이 왕실과 귀족이 즐겨 먹은 요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선보이는 다이닝 ‘벤자롱 방콕’의 셰프 수깐야 응암스리캄과 대화를 나누며 나의 의문이 우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거의 모든 타이 음식에 들어가는 허브와 향신료, 채소가 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생강, 홀리 바질, 레몬그라스, 가랑갈, 타마린드, 강황 같은 식재료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강화하거나 효율성을 높이고 염증을 완화해주죠. ‘타이’라는 정체성이 확실한 음식이 곧 보양식이 아닐까요?” 1년 내내 무더운 나라에선 매일 먹는 음식이 응당 기운을 보해줘야 하며, 음식에 얽힌 역사, 문화도 그런 방향으로 진화해왔을 거란 사실을 왜 진즉 눈치채지 못했을까? 타이 요리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치유하는 식재료에 더해, 수깐야 셰프는 뿌리에도 집중한다. “독특한 향과 대담한 맛으로 유명한 타이 음식은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나라의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저는 시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타이 요리의 기원을 탐구해 그 시절의 맛과 미식 문화를 현대로 가져와서 방콕 사람들 그리고 이 도시를 찾은 여행자들에게 내놓고 있습니다. 인도, 중국, 포르투갈의 식문화가 ‘타이식’에 끼친 영향과 진화를 정교하게 표현하는 것은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이죠.”
뿌리를 기억하는 시암 시대의 요리로 그는 잘게 부순 생선 살과 레몬그라스, 고추, 시트러스 계열 과일의 새콤한 즙 등을 섞어 버무린 ‘속’을 싱싱한 잎채소에 싸서 먹는 ‘미앙 쁠라 냄’을 추천한다. 고단백질 재료,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매콤한 양념, 수분과 비타민이 가득한 잎채소의 조합은 한국 보양식 식단 구성과 꽤 흡사하다. “거의 모든 타이식이 보양식”이라고 말하는 이 요리사에게 집요하게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흔한 음식으로 딱 하나만 꼽아달라”고 묻자 돌아온 답. “까이 팟 킹을 추천하고 싶어요. 생강 풍미가 물씬한 닭볶음 요리인데, 몸을 따뜻하게 하고 항염증 효과가 높은 생강과 고단백 닭고기가 즉각적인 에너지를 주거든요. 항균에 좋은 카피르 라임 잎, 면역력을 높이는 가랑갈, 새우 등을 듬뿍 넣고 끓이는 얌꿍이나 고기 육수에 버섯, 각종 채소와 향신료를 넣어 끓이는 맑은 수프류도 기운을 북돋워줄 거예요. 그리고 음식 이름보다 더 중요하건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이 내일 나의 몸이 된다는 사실 아닐까요?”
방콕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시린띱 마니랏 Sirinthip Maneerat
Therapist, Counselor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고고인류학 박사 헨리 홈즈는 저서에서 “타이 사람들의 미소엔 12가지 뜻이 있으며, 진의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 친절, 존경 같은 긍정적인 감정 표현 외에 포기, 슬픔, 반대, 억지 등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미소도 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타이 사람들은 (거의) 항상 웃는다는 뜻이다. 이 ‘미소’를 가득 띤 얼굴로, 방콕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트레스받을 땐 뭘로 풀어요?”라고 묻는 내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진짜일까? 방콕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테라피스트이자 카운셀러, 시린띱 마니랏에게 겉치레 없는 솔직한 대답을 해달라고 졸랐다. “타이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마이 뺀 라이’가 있어요. ‘괜찮아’라는 뜻이죠. 대부분 습관처럼 내뱉어요.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인데 왜 스트레스가 없겠어요. 다만 그 상황 앞에서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일 뿐이죠. 괜찮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다 지나갈 거야.” 내가 만난 방콕 사람들이 스트레스가 ‘별로’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까닭은 ‘사눅(Sanook)’이란 단어에 있다. ‘즐거운’이란 뜻으로, 이 나라의 삶의 태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타이 사람에겐 ‘즐거운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중요해요. 사눅이 없으면 관심을 두지 않죠. 밀어붙이거나 몰아세우기보단 ‘사바이사바이(Sabaisabai, 편안한)’를 선택하고요. 자신에게 즐겁고 느긋하게 사는 삶을 선사하는 거죠.” 관대함으로 응축되는 이 태도의 배경엔 불교가 있다. ‘타이다움(Very Thai)’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종교이자 철학. 시린띱은 교리의 핵심인 카르마(인과의 법칙)가 타이 사람의 온화하고 순한 성정을 만든 요인이라고 말한다. “이 나라에선 나누는 것이 아주 당연해요. 이를테면 이웃들과 만든 음식을 함께 먹고, 사원에 기꺼이 시주를 하는 거죠. 이를 ‘남 짜이(나누는 마음)’라고 표현해요.”
남에게 친절을 베풀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세계에선 현대인의 생존 도구, ‘명상’이 딱히 필요가 없는 걸까? 정신적 내공이 단단해 보이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으로 방콕 전체를 통틀어 명상 센터가 딱 한 곳뿐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 나라에서 메디테이션은 특정한 행위나 수련이라기보단 그냥 일상 그 자체예요. 예를 들어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이 ‘잠시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을 종종 갖게 해주셨어요. 연인과의 이별로 마음이 아프면 명상으로 슬픔을 달래는 대신 사원에 가서 부처에게 기도를 올리고요. 방콕에선 굳이 거창하게 ‘명상 센터’에 가지 않아도 삶을 메디테이션으로 만드는 일이 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