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수원 행궁동 탐험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parc jinmyoung
  • PHOTOGRAPHY BY cho soomin

이방인의 수원 행궁동 탐험

Timeless Walls, Endless Stories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은 2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을 품는 든든한 터전이다. 튀르키예계 독일인 일라이다와 함께 고즈넉한 성곽 길을 걷고, 견고한 성벽을 이웃 삼은 행궁동 골목 사이사이의 매력적인 공간을 찾아 나섰다.
  • written by parc jinmyoung
  • PHOTOGRAPHY BY cho soomin
2026년 03월 09일

10:00~13:00

Landmark

변치 않는 약속의 길에서
수원화성

“화서문에서 내려줄게요. 장안문 쪽으로 걸어가며 행리단길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예쁘거든.” 택시 기사에게 수원화성에 간다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맞춤형 동선을 일러준다. 그의 말마따나 조선의 건축미와 근대의 흔적이 교차하는 풍경을 동시에 굽어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치 가본 적 없는 시간의 틈새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저는 고택이나 성곽 같은 역사적 장소를 좋아해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는 시대에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것들을 보면 안정감이 생기거든요”라며 일라이다가 거든다. 변치 않는 것이 주는 안정감. 이 거대한 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해 보낸 굳은 약속이기도 하다.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정조는 국방과 경제를 동시에 강화할 전략적 요충지로 수원화성을 축조했다. 왕의 효심과 정치적 포부를 느끼고 싶다면, 3시간 정도 소요되는 성곽 길을 천천히 걸어보자.
주소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조로 915

13:00~15:00

FOOD

건강한 식자재가 빚은 다정함
계절곳간

어떤 시간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한다. 고교 시절 한국인 친구의 가족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일라이다는 커다란 접시에 담긴 음식을 정답게 나누는 한국 식문화를 접하며 우리나라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각자 자기 접시에 집중하는 독일에서는 생소한 풍경이었죠.” 한국의 따뜻한 식문화는 그에게 인생을 바꿀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나눔의 정서는 갖가지 재료가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한국 대표 음식 김밥과도 닮았다. 일라이다의 발길이 멈춘 곳은 행리단길 골목 안쪽에 자리한 ‘계절곳간’. 제철 식자재를 활용한 퓨전 김밥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평소 하이록스와 러닝을 즐기며 비건 식단에도 관심이 많은 그에게 가장 매력적인 건 채식 메뉴다. 발효한 콩을 뭉쳐 튀긴 템페의 고소함이 돋보이는 템페김밥과 수제 훔무스에 구운 두부를 곁들여 크리미하면서도 묵직한 풍미를 내는 훔무스김밥은 채식에 대한 편견을 깨기 충분하다. 여기에 신선한 채소와 단호박, 템페가 어우러진 훔무스 템페 샐러드를 곁들이니 몸을 기분 좋은 에너지로 채우는 완벽한 한 끼가 완성된다.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32번길 21-11
영업시간 10:00~19:00(브레이크타임 16:00~17:00), 일요일 9:00~17:00(브레이크타임 15:00~15:30)
인스타그램 season.storage

15:00~17:00

Drink

빈티지 찻잔에 담긴 유산
패터슨커피

수원을 여행하다 보면,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자 근대적 여성운동의 선구자인 나혜석 선생의 생가가 이곳 행리단길에 있고,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나혜석거리가 행궁동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인계동에 자리한다. 행리단길 메인 로드를 걷다 마주치는 ‘패터슨커피’는 더욱 각별하다. 이곳은 나혜석 선생의 자손이 운영하는 드립 커피 전문점으로, 빈티지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곳이다. 서가에는 나혜석 선생 관련 서적과 말 모양의 오브제가 가득하다. 5년 전, 승마 선수 출신의 나진수 대표는 은퇴 후 아내, 아들과 함께 카페를 시작했다. 아내가 오랜 시간 모아온 빈티지 찻잔에는 아들이 정성스레 내린 커피가 가득 담긴다. 일라이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맛본다. “깔끔한 산미와 묵직한 보디감이 레트로한 분위기와 더없이 잘 어울리네요.” 이어 단호박 케이크를 맛보더니 두 눈을 반짝인다. “단호박의 단맛과 폭신한 식감이 매력적이에요.” 소박하고 깊은 맛의 조화를 즐기며 여행의 밀도도 더욱 높아져만 간다.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33, 2층
영업시간 월~금 11:30~23:00, 토·일 11:00~23:00
인스타그램 patersoncoffee

17:00~19:00

Break

여행을 추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
레터프롬피스타치오

국내외 작가들의 지류 작품을 소개하는 엽서 편집숍. 이곳에서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일러스트 엽서부터 사진엽서까지 900여 종의 엽서가 전시돼 있는 이곳에서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손님이 원하는 달에 엽서를 보내주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 매장 한편에는 ‘다꾸러(다이어리를 꾸미는 사람)’를 위한 스티커, 펜, 도장 등의 문구류가 진열돼 있어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행리단길의 메인 로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며 일라이다는 이렇게 말한다. “치열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의 일상이 버거울 때도 있어요. 그런 순간마다 성과보다 행복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혼자 잘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한국행을 택했다는 일라이다. 오늘 쓴 편지는 그에게 지친 일상을 다시 설레게 할 귀중한 기념품이 될 테다.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30, 2층
영업시간 13:00~19:30
인스타그램 letterfrom.pistachio

책이라는 숲에서 찾은 안식
브로콜리숲

“Zeit meines Lebens. ‘평생 동안’이라는 뜻의 독일어예요!” 2017년 주택을 개조해 문을 연 독립서점 ‘브로콜리숲’에서 독일어 제목이 적힌 책을 보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소곤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어 부제로 된 시집과 에세이 시리즈가 고즈넉하고 아늑한 브로콜리숲의 중앙에 진열돼 있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던 안리타 작가의 출판물이다. 이외에도 문학, 에세이, 독립출판물 등 다양한 장르의 서적이 울창한 숲의 나무처럼 서점을 채우고 있다. 한편에서는 포스터, 키 링, 스티커 등 책 관련 귀여운 소품도 판매한다. “책은 가장 좋은 한국어 선생님이에요.” 일라이다는 낯선 단어 사이를 천천히 들여다보며 문장에 담긴 한국의 정서를 수집한다. 일라이다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은 바로 책을 통해 길러진 듯하다.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32번길 21-10, 2층
영업시간 13:00~18:00(수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broccoli_soop

19:00~20:00

Night Vibe

이 밤의 끝을 잡고
롱플레이어

수원 행리단길 탐험의 종착지는 LP 숍이자 바 ‘롱플레이어’. 평소 보이 밴드 데이식스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일라이다는 2층짜리 공간을 가득 메운 LP와 CD, 테이프, 각종 음향 기기와 필름 카메라에 금세 매료된다. 포크록 뮤지션 김동산이 운영하는 이곳은 저녁 6시가 되면 LP 박스가 바 테이블이 되고, 김 대표가 즉석에서 뚝딱 만드는 ‘오늘의 요리’ 냄새가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김치찌개와 크레이프라는 종잡을 수 없는 메뉴 구성만큼이나 이곳의 밤은 자유롭다. “베를린은 밤새 클럽에서 테크노를 즐기는 반면, 한국은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더라고요.” 얼마 전, 데이식스 콘서트 티케팅에 실패한 일라이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듯 고량 하이볼 한 잔이 테이블에 놓인다. 고량주 팝업 행사에서 선보였던 메뉴다. 백두고량주의 알싸한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짜릿한 탄산수와 섞여 청량하게 입안을 적신다. 잔 부딪치는 소리와 감미로운 선율이 섞이며 행궁동의 밤이 깊어간다.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886번길 12
영업시간 13:00~22:00(월·화 휴무)
인스타그램 long_player_

Ilayda Asimgil | 일라이다 아심길 | 방송인이자 모델.

독일 베를린에서 온 한국전쟁 참전 용사의 후손이다. 지난해 한국외대 대학원 국제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새로운 커리어를 위해 구직 중이다. 고등학교 시절 한국인 친구를 통해 한국 문화를 처음 접했으며, 2018년 성인이 되자마자 첫 배낭여행지로 한국을 택했다. 외향적이고 호기심 많은 성격 덕에 한국 문화에 금세 적응했고, 그렇게 시작된 한국살이가 어느덧 8년째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