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사이판
Extreme Saipan




사이판에서, 마를 틈이 없었다. ‘날씬’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안락한 올인클루시브 리조트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면 갈 곳은 온통 물가뿐. 섬에 머무는 내내 나는 몸을 옥죄는 수영복 위에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래시가드까지 겹쳐 입은 채 몸 말릴 새 없이 바깥을 쏘다녔다. 나를 적신 첫 물은 그로토(The Grotto). 보통 자연이 빚은 동굴을 통칭하지만 여기에선 고유명사로 쓴다. 섬 북쪽, 한때 이 지역을 삼키려고 했던 일본군이 패전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 절벽(Sucide Cliff) 근처에 있는 수중 해식동굴 얘기다. 그로토에 가기 전 내가 쥐고 있던 정보는 ‘세계 3대 다이빙 명소’라는 수식어뿐이었다. “그럼 다이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함께 일정을 짠 동행에게 호기롭게 의욕을 내비쳤다. 그로토는 사이판을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이고, 그런 이름난 관광지에는 자격증은 없고 바닷속엔 들어가보고 싶은 욕심꾼을 위해 ‘체험 다이빙’이란 패키지가 존재하니까. 출발 전날 현지에서 ‘스노클링 먼저 해보고 말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로토로 이어지는 117개의 계단 끝에서 ‘날 뭘로 보고…’ 했던 마음을 물렀다. 보기 아름다운 것과 겪기 아름다운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신생대부터 바람과 파도가 깎고 벼른 이 오래된 터는 진입부터 쉽지 않았다. 뭍에서 바로 뛰어들었다간 거센 물살에 휩쓸려 절벽에 부딪히거나 떠내려가기 십상. “그래서 그로토는 절대 혼자 와서 즐기면 안 됩니다. 자격이 있는 수중 가이드와 동행해야 해요.”
힘 좋은 가이드 셋의 도움을 받아 발목을 산산조각 낼 기세로 닥치는 물살을 건너 너럭바위에 안착하면 진짜 공포가 기다린다. 2~3m 높이를 낙하해 깊이 21m의 해저로 뛰어드는 일 말이다. 수영은커녕 구명조끼 입고도 물에 못 뜨는 나는 고소공포증 호소인처럼 꽤 오래 주저했다. (물론 다섯 살짜리 꼬마도 잘 뛰어든다. 수영을 할 줄 안다면.) 주저앉으려는 몸짓을 뛰어들겠단 몸짓으로 해석한 가이드가 냅다 밀어 던진 덕분에 마침내 그로토의 차가운 품에 안착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부력과 옥신각신하며 수면에 겨우 엎드렸다. 조악한 물안경의 흐린 시야 사이로 보인 동굴 아래 풍광은 그걸 눈에 담기 위해 벌인 고투가 억울하지 않을 만큼 황홀했다. 온갖 형태의 산호와 색색의 열대어, 스펙터클한 지형보다 내 넋을 훔친 건 발광하는 푸른빛. 천창처럼 난 동굴의 구멍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만든 그 물빛은 꼭 영화 <아바타> 속 나비족의 신비로운 피부 같았다.


오래 그 장면을 응시하다가 체력이 다해 밖으로 나왔다. 남쪽에 있는 숙소까지 돌아갈 여유가 없어서 흠뻑 젖은 채로 북쪽 명소들을 순회했다. 관광객들은 대개 마르피산 꼭대기의 서편, ‘반자이 클리프(Banzai Cliff, 만세 절벽), 라스트 커맨드 포스트(Last Command Post, 일본군 최후 사령부), 재퍼니즈 피스 메모리얼(Japanese Peace Memorial, 일본인 평화 위령비) 같은 곳을 돌며 전쟁의 상흔을 되짚지만 대한민국의 딸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의 만행을 듣는 일이 쉽지 않아 겉핥기로 지나쳤다. 언젠간 지도에서 이 이름들 대신 주변의 이름난 다이빙 포인트인 스포트라이트(Spotlight), 윙 크레바스(Wing Crevasse)라든지 요즘 사이판의 스포츠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마르피 주변의 러닝, 하이킹, 산악자전거, 마라톤 트레일 이름이 새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짙푸름이 넘실대는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다음 날에도 채 마르지 않은 수영복과 래시가드 안에 물과 땀, 더위로 불어난 몸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나왔다. 오늘은 스마일링 코브 마리나(Smiling Cove Marina)에서 멀미약을 털어넣고 낚싯배 위에 오르는 날. 타나팍 리프(Tanapag Reef) 안쪽에서 엔진을 끈 선장님은 “잘만 하면 그 비싼 다금바리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로 초보 낚시꾼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아쉽게도, 태평양의 물고기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끼로 끼워 넣은 비싼 오징어만 헌납한 채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가 연달아 잡은 이름 모를 물고기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손맛을 보는 덴 실패했지만 눈요기는 쏠쏠하다. 그날 스노클링을 하며 만난 열대어, 매가오리와 깃대돔, 가시나비고기와 노랑양쥐돔 같은 물고기들은 이름만큼이나 색, 무늬, 모양, 몸놀림이 화려했다. 낚시와 스노클링을 마치고 타나팍 리프의 꽃이자 이 섬의 관광 통계 수치를 높이는 최고 인기 스타, 마나가하섬(Managaha Island)에서 낮잠과 해수욕까지 즐기니 ‘꼭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한 기분이다.


나흘 차. 마침내 수영복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왔다. 오늘의 바깥 활동은 트레킹. 사이판에서 오를 수 있는 산은 해발고도 474m의 타포차우(Tapochau)뿐인데, 걷는 대신 대부분 차를 탄다. 전망대 주차장에서 꼭대기까지는 5분도 안 걸려 운동이라고 할 만한 활동은 아니다. 대신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버드 아일랜드 하이크 트레일(Bird Island Hike Trail)은 매독곶 남쪽 끝에 자리한 새섬을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길. 석회암으로 이뤄진 이 섬에 그런 이름이 붙은 까닭은 두 가지다. 절벽의 숭숭 뚫린 구멍에 둥지를 튼 온갖 새가 모여들어서, 또 섬 주변의 해안선으로 밀려드는 파도 모양이 새의 날갯짓처럼 보여서. 트레일 초입은 당혹스러울 만큼 밋밋해서 운동량을 측정해주는 시계의 스위치를 꺼야 하나 고민했다. 완벽한 기우였다. 동행에게 난데없이 나타난 밧줄의 용도를 묻기도 전에 내 눈에 가파른 비탈과 미끄러지기 좋은 마른 흙길이 들어왔다. 슬라이딩에 최적화된 플립플롭 샌들을 신은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젖 먹던 힘’을 다 짜내서 밧줄에 목숨을 의탁했다. 다행히 비탈의 길이는 아주 짧아서 15분이면 트레킹이 끝난다. 살아남는 데 열중하느라 열대 과일 바구니에서 보이는 모든 색을 섞어놓은 것 같은 ‘마리아나 과일 비둘기’나 ‘사이판 갈대 울새’ 같은 것을 관찰하는 덴 실패했지만, 괜찮았다. 정글이 끝나는 지점부터 펼쳐지는 바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새섬, 산호가 자갈처럼 깔린 해변, 우리 말곤 인적 하나 없는 그 적막함이 흘린 땀을 보상해줬으니까. “물이 빠질 땐 저 섬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어요. 이곳은 보호구역으로 낚시, 사냥 등을 엄격하게 금지해 다채로운 산호초와 희귀한 열대어들을 만날 수 있거든요.” 차모로 출신으로 이 섬에서 평생을 산 마테오의 말을 들으며 수영복을 입고 오지 않은 나 자신을 책망했다. 그날 밤, 취재 수첩을 꺼내 이런 메모를 남겼다. “사이판의 대자연을 제대로 누리려면, 북마리아나 제도 사람들이 틈날 때마다 즐기는 야외 활동을 따라잡고 싶다면, 언제든 물에 들어갈 태세를 갖춰야 한다. 이곳에서 수영복은 전투복이나 마찬가지다.”

도파민 폭발하는 사이판의 자연
포비든 아일랜드(Forbidden Island)
동쪽 끝에 자리한 섬으로, ‘금지된 섬’이란 이름에 걸맞은 험준한 트레일을 갖췄다. 현지인들은 ‘평소에 운동을 즐긴다면 도전해볼 만한 섬’이라고 추천했지만, 사이판 마라톤 대회 입상 경력이 있는 운동인은 “여행객들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는 말을 전해왔다. 밧줄에 의지해 절벽을 타고 내려가면 자연이 빚은 수영장이 나타나고, 바다거북, 희귀 열대어들과 함께 헤엄칠 수 있는 바다가 기다린다.
판항 비치(Fanhang Beach)
입구에 이런 표지판이 있으면 제대로 닿은 것이다. “강한 물살과 조류에 주의하세요. 해안에서 익사할 수 있습니다. 낙석도 조심하세요. 모든 사고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악어 비치’라는 별명을 가진 이곳엔 악어 대가리 모양의 바위가 시시때때로 들이닥치는 파도를 집어삼킬 기세로 우뚝 서 있다. 동쪽에 있는 대표적인 비치로 현지인들은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구경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곳.
래더 비치(Ladder Beach), 오비안 비치(Obyan Beach)
계단이 나기 전엔 사다리를 타야 닿을 수 있는 해변이라 ‘래더 비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며칠 머물러도 괜찮을 만한 드넓고 큰 동굴이 있는데, 로컬 사이에선 해 질 무렵 찾아와 모닥불을 피우고 음악을 들으며 달빛에 취하는 낭만적인 아지트로 통한다. 근처에 자리한 오비안 비치는 스노클링 포인트로 유명한 곳. 해변 주변엔 고대 차모로족의 라테 스톤 유적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벙커가 있어 볼거리도 쏠쏠하다.
야생의 로타
Wild Rota

“로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침략을 피해간 섬입니다. 차모로족은 이 섬을 수호하는 정령이 그 액을 막았다고 믿어요. 로타가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어 배를 정박하고 상륙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있긴 하지만….” 로타에 삶을 정박시킨 다이버 알레한드로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말리럭(Maliluk) 정글 안에 숨어 있는 누누 트리(Nunu Tree) 앞에 서 있다. 차모로어론 나나 누누(nåna nunu). ‘조상들의 어머니’란 뜻이다. 차모로 사람들은 동굴, 바위, 나무의 갈라진 틈 같은 데에 타오타오모나(Taotao Mo’na), 즉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맘먹고 뛰어올라도 나무의 정강이쯤 되는 높이밖에 닿지 못하는, 수천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줄기들이 얽히고설킨 이 뱅골보리수는 진정 정령의 탯줄 같았다. “차모로 문화엔 깊은 정글에 들어갈 때 꼭 누누에게 인사를 하고 허락을 받는 풍습이 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기시감을 느낀다. 제주에서도 이런 나무를 본 적이 있다. 깊은 숲 안, 기개 좋게 뻗어 나간 가지와 성성한 잎 무리를 가진 밑동 굵은 나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스산한 분위기,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찬바람이 불었던 당나무 터. 할망 무당이 섬을 지켜달라고 기도를 올리고 굿을 치르는 폭낭(마을을 지키는 신령이 깃든 당나무)과 이 누누를 둘러싼 공기는 놀라울 만큼 닮았다. 이런 나무 앞에선 어쭙잖은 장난을 치면 안 된다. 나무 주변을 한 바퀴 휘 돌면서 수십 년 된 경비행기를 타고 사이판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여행지로서 로타의 매력을 발견한 건 스쿠버다이버들이다. 다이빙 좀 한다는 이들에게 쇼운마루(Shoun Maru) 포인트는 버킷 리스트로 꼽히는 곳. 1944년 미국의 공중 어뢰에 의해 침몰한 일본 화물선 쇼운마루는 소산자야 베이(Sosanjaya Bay) 아래, 수심 33.5미터 깊이의 해저에서 지난 과거를 잊은 채 열대어의 놀이터가 됐다. 어쩌면 로타에선 수중 동굴 센하놈(Senhanom)의 구멍 사이로 태양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들어오는 로타 홀(Rota Hole), 산호는 꽃이 되고 열대어는 나비처럼 그 안팎을 나부끼는 낭만적인 풍경을 가진 코럴 가든(Coral Garden) 주변의 인구 밀도가 땅 위보다 더 높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체류일이 짧다는 핑계로 이곳에서 다이빙 체험을 요청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포나 포인트(Pona Point)는 다이버가 아닌 여행자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로타섬 최남단에 자리한 이 절벽 위에 서서 아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면 신나게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다. 수십 미터는 족히 넘는 높이에서 말이다. 내 눈엔 푸른 몸빛을 가진 물고기들이 포착됐는데, 돌아와서 찾아본 그 열대어의 정체는 ‘우쿠(Uku)’였다. 하와이 주변 해역에서도 볼 수 있는 리프피시의 일종으로 ‘후무후무누쿠누쿠아푸아(Humuhumunukunukuapua’a)’와 함께 빈번히 출몰하는 어종 중 하나란다. 그 밖에 가다랑어, 황다랑어와 같은 대형 참치가 활개를 치는 덕에 실력이 빼어난 낚시꾼들이 앞다퉈 이곳을 찾는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태평양발 강풍이 등과 얼굴, 볼기짝을 사정없이 때리는 통에 포나 포인트에 오래 머물진 못했지만 언젠가는 낚시 잘하는 친구들과 다시 찾아 갓 잡은 황다랑어의 쫄깃한 뱃살을 포식할 날을 꿈꾼다.
살코기 맛이 아주 좋아서 로타 사람들이 진짜 사랑한다는 과일박쥐 서식지, 알라구안 베이 전망대(Alaguan Bay Lookout)와 약 97종의 새가 발견된 야생 조류 보호구역 버드 생추어리(Bird Sanctuary)를 지나 스위밍 홀(Swimming Hole)에 안착했다. 병풍처럼 둘러진 암초가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라군으로, 수심이 얕고 바닥엔 곱고 흰 모래가 깔려 있어 둥둥 떠다니기 좋은 천연 수영장이다. 밀키스에 하늘색 물감을 묻힌 붓을 담갔을 때 나오는 색깔을 내는 스위밍 홀의 유혹에 못 이겨 더 이상 몸에 짠물과 모래를 묻히지 않겠다고 한 다짐을 물렀다. 친절한 계단이 되어주는 잔 바위 몇 개를 밟고 내려가 망망대해 앞에 우뚝 섰다. 그날 거기에 있었던 인간이라곤 물을 싫어하는 내 뒤의 취재팀 셋과 “스위밍 홀을 떠날 때는 쓰레기를 꼭 가져가라”는 문구가 쓰인 표지판에 노란색 페인트를 칠하던 초로의 로컬뿐. 인간이 진저리 나게 많은 서울에서 나는 늘 ‘외딴 섬에 혼자 있는 기분’을 꿈꾸곤 했는데, 로타섬 북쪽에서 그 황홀한 고립감을 아주 잠깐 맛봤다.

혼자 있기 좋은 로타의 자연
테테토 비치(Teteto Beach)
가이드북에선 ‘로타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해변’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인적이 드물다. 인근에 위치한 로타의 ‘읍내’ 격인 송송 빌리지의 인구수가 350여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나제도에서 7번째로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힌 이 해변은 약 1.3km 길이에 달하는 드넓은 백사장의 시원한 시야가 매력. 바비큐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이 있어 주말엔 피크닉을 즐기는 로타인들을 간혹 만날 수 있다. 일몰과 별빛이 땅과 바다를 적실 때가 하이라이트다.
송송 빌리지 전망대(Song Song Village Lookout)
로타를 낮게 나는 새의 시선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로타의 번화가 송송 빌리지, ‘웨딩케이크 마운틴’이란 별명을 가진 타핑고트 마운틴(Tapingot Mt.)이 한눈에 들어온다. 길게 뻗은 섬자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섬 양쪽에서 파도가 치는 진귀한 풍경을 만난다. 왼쪽은 태평양, 오른쪽은 필리핀해가 펼쳐지는 로타의 독특한 해양 환경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타가 라테 스톤 채석장(Taga Latte Stone Quarry)
로타의 원주인이자 원주민, 선사시대 차모로 문화의 유산인 라테 스톤은 차모로 전통 건축 양식의 기초를 이루는 석조 구조물을 뜻한다. 무게 35톤, 높이 약 7.6미터 규모를 자랑하는 석재를 채석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금속 연장이 없던 시대에 이 거대한 건축재를 어떻게 옮겨 집으로 만들었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평온한 티니안
Calm Tinian



사이판 국제공항 옆에는 임시 대기 장소 같은 야외 벤치와 컨테이너 몇 채가 있다. 공항 직원들이 끽연하며 쉬는 공간인 줄 알았던 그곳이 바로 티니안과 로타로 넘어가는 국내선, 스타 마리아나스 에어의 터미널이다. 섬사람들과 여행자를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6인용 경비행기를 타기 위해선 짐을 짊어지고 아날로그 체중계에 올라야 한다. 비행기의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의 무게 균형을 맞춰 좌석을 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티니안으로 향하는 여정은 이 생소한 과정, 그러니까 인류가 하늘을 날아 이 땅에서 저 땅으로 넘어가는 행위가 갓 태동하던 시절에 있었을 법한 일을 겪는 것부터 시작된다. 숨기고 싶었던 몸무게를 모두에게 공개하는(것이나 마찬가지인) 좌석표를 들고 현지인이 “아마 30년은 족히 넘었을 걸요?”라고 안내해준 경비행기로 향한다. 기장 옆엔 부기장이 앉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앉았다. 티니안까진 10분 남짓이면 도착하는 짧은 비행이지만 복잡한 항공 계기판을 앞에 두고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이 젊고(어린) 혈기왕성한(침착함은 별로 없을 것 같은) 친구에게 내 목숨을 맡겨도 되는 걸까? ‘걱정이 무색하게 발 아래 펼쳐진 코발트빛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솜사탕 같은 구름 속을 헤집으며 하늘을 누비는 느낌도 좋았다’고 쓰고 싶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비행을 즐긴 척한 내게 사진가가 날린 일갈이 근거다. “앉았던 자리가 땀으로 흥건히 젖었던데요?”

공항에서 렌터카를 찾아 몇 분 달려나가면 티니안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시원하게 뚫린 브로드웨이(Broadway)가 나타난다. 남쪽의 부두와 북쪽의 노스 필드(North Field)를 잇는 이 10.3km의 직선로는 1945년, 미군이 ‘티니안 하이웨이’라는 이름으로 구축한 고속도로. 뉴욕의 쭉 뻗은 브로드웨이와 닮았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현재의 이름이 됐다. 그 길의 초입에 자리한 타가 비치(Taga Beach)는 압도적인 물빛으로 방문객의 발목을 붙든다. 고대 차모로 왕족 타가(Taga) 가문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3m 높이의 절벽에서 다이빙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쌀뜨물에 파워에이드를 풀어놓은 듯한 바다에 몸을 적실 수 있다. 그 아래 타촉나 비치(Tachogna Beach)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나무 군락과 바비큐 데크를 갖춘 해변 공원도 함께 있어 로컬 사이에서 소풍지로 인기가 높다. 휴양지로 이름난 섬의 수심이 얕고 물살이 잔잔하며 물빛이 아름다운 바다엔 스노클링이나 카야킹, 스탠드업 패들링을 즐기는 이들이 풍경을 채우기 마련인데 내가 찾은 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근해에 악독한 해파리라도 출몰했나 싶었지만 그냥 말 그대로 ‘인적이 드문 섬’이기 때문이다. 미국 인구조사국이 2020년(이것이 가장 최근에 시행한 조사다)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티니안의 총 인구수는 2044명. 그마저도 대부분 산호세(San Jose) 마을에 모여 살며 평일에는 직장이나 농장에 매여 바닷가에 잘 출몰하지 않는다. 티니안에서 가장 보기 힘든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달하려고 인구조사 통계까지 가져왔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손타지 않은 자연과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 안을 누비는 고요한 모험을 간절히 원했다. 막상 그런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니 간사함이 요동친다. 마을 하나 없는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적막은 끝없이 깊어졌고 슬슬 사람 냄새가 그리워지던 차. 어디선가 조악한 스피커로 내보내는 음악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여기는 출루 비치(Chulu Beach)예요. 별 모양으로 부서진 산호 모래가 아주 예쁜 풍경을 만드는 해변이죠.”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차 문을 여는데 저 멀리 쿵짝 소리의 발원, 텐트와 간이 부엌, 의자와 테이블로 캠프 사이트를 구축하고 맥주를 들이켜는 무리가 눈에 들었다. 무인도에 사흘 갇혔다 나온 사람이라도 되는 양 한달음에 그들에게 달려갔다. 당신은 누구고 우리는 누구이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고 우리는 뭘 하러 이 섬에 왔는지 같은 대화를 주고받기도 전에 내 손에 음식이 한가득 담긴 접시가 들렸다. 그들이 ‘일단 먹고 시작하자’고 준 그 음식은 꿈에서도 못 먹어볼 것 같았던 코코넛크랩이었다. 예능인들이 무인도 정글에서 생고생하며 잡아 허기를 채우는 TV 쇼 속 그 식재료 말이다. 맵기로 유명한 티니안 특산 고추 도니살리와 코코넛워터, 토마토, 라임과 각종 채소를 푸짐히 넣고 한 솥 가득 쪄낸 ‘티니안 엄마표 코코넛크랩 요리’에 아이스박스에서 갓 꺼낸 시원한 음료까지 곁들이니 한시라도 빨리 (사람 많은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들이 나무에 매어둔 해먹에 누워 낮잠 한숨 자다가 물비늘이 발광하는 출루 비치의 맑은 바다에 달궈진 몸을 식히고, 노을 앞에서 넋을 놓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구가 비강까지 차올랐다. “더 있다가 가요. 우리 노래방 기계도 있거든요. 밤엔 낚시도 할 거예요.” 1944년, 미군이 티니안을 차지하기 위해 상륙했던 출루 비치는 이제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독식할 수 있는 환상적인 휴식처가 됐다. 그 친절한 차모로인의 말, 낮잠 자고 물놀이 하고 노래도 부르고 별빛 낚시도 하자는 제안은 이제 내 꿈이, 티니안에 또 와야 할 이유가 됐다.

즐거운 고요가 있는 티니안의 자연
블로 홀(Blow Hole)
‘고래 구멍’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이곳은 티니안 북동부, 저 멀리 사이판이 보이는 해안 절벽을 가리킨다. 날카롭고 거친 산호초의 숭숭 뚫린 구멍으로 파도가 들이닥치면 물줄기가 분수처럼 치솟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을 땐 10m까지 치솟는다고. 그 앞에 서면 지구에 나 혼자 살아남은 기분이 든다.
플레밍(Fleming) & 티니안 그로토(Tinian Grotto) 포인트
티니안 역시 근사한 다이빙 포인트가 많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아찔한 절벽으로 이뤄진 플레밍 포인트는 그레이 리프 샤크와 참다랑어 같은 대형 물고기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경험 많은 다이버들에게 인기가 높다. 수중 동굴과 터널 안에서 거북, 가오리, 다채로운 열대어와 소프트 코럴이 만든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티니안 그로토도 놓치지 말 것.
캐롤리나스 라임스톤 포레스트 트레일(Carolinas Limestone Forest Trail)
산호세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이곳은 길이 약 320m, 빠른 걸음으로 5분 안팎이면 둘러볼 수 있는 산책로다. 이 짧은 길 위에서 산호와 석회암이 어우러진 독특한 지질 구조를 감상하며 마리아나 물총새, 마리아나 왕파리잡이새 같은 희귀 조류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트레일 위엔 타가 비치와 존스 비치(Jones Beach), 티니안 항구를 조망하는 전망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