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라스베이거스 사람들의 진짜 일상이 펼쳐지는 동네, 서머린.

“우리를 둘러싼 이 우주는 홀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다른 여러 우주들과 함께 존재하는가?” 이론물리학계에 논쟁의 불을 붙이는 이 질문을 라스베이거스 한복판에서 떠올린다. 물론 물리학이니 양자역학 같은 건 쥐뿔도 모른다. 아직 다른 우주에 사는 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단일 우주론 쪽에 서 있을 뿐이다. 라스베이거스에 오기 전까진 그랬다. 거의 모든 관광 인프라가 집결한 중심 대로, 스트립(Strip)을 걷다 보면 혼돈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한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자유의 여신상에서 파리의 에펠탑, 개선문, 베르사유 궁전을 지나 곤돌라가 두둥실 떠다니는 베네치아의 운하가 약 2.6km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이다. 라스베이거스의 토착 기업 MGM과 시저스가 큰돈 들여 구현한 호텔이란 사실을 알고 봐도 그렇다. 그 사이사이에서 난데없이 살아 있는 플라밍고가 사는 정원과 파도 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수영장 같은 것이 나타난다. 사막 도시에선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다. 최근엔 지구 밖에서도 보인다는 거대한 구체가 도시 한복판에 상륙해 스트립의 시제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스피어(Sphere)라는 이름이 붙은, 우리 돈으로 약 3조원을 들여 만들었다는 이 미래형 콜로세움은 눈동자, 토성, 이모지, 미식축구공 같은 물질과 물체로 모습을 시시각각 바꾸며 스트립 산책자의 정신을 교란한다. 이쯤에서 이 거리를 다시 정의하고 싶다. 스트립은 시간과 공간, 과거와 현재, 상식과 비상식을 가르는 경계선을 완벽하게 파괴하는 곳이다. 그게 다 여행자를 현혹하는 고도의 상술이자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을 알고도 각각의 호텔과 리조트가 구현하는 세계관에 하릴없이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존재하며 옛날과 지금, 미래를 수시로 들락이는 기분이다.
스트립이라는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달궈진 뇌와 몸을 식히기 위해 ‘오프 스트립’으로 통칭되는 동네로 나가본다. 전 세계의 온갖 잡동사니가 있는 골동품 가게가 즐비하며 1960~80년대 미국 영화에서 본 것 같은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다운타운(DTLV)은 라스베이거스를 정의할 단어를 찾아 헤맨 내게 더 큰 짐만 안겨줬다. 완벽하고 편안하며 안전하고 평온한 삶을 꿈꾸는 미국인들을 유혹하는 교외 도시 서머린(Summerlin)에선 ‘참’이라고 생각해서 메모장 앱에 기록해둔 이 문장을 지웠다. “라스베이거스에 없는 것은 고요와 여유뿐이다.”
네바다주 사람들에게 물과 전기를 가져다주는 오아시스, 후버댐(Hoover Dam)에 다녀오는 길, 멀리 스트라트(The Strat) 호텔이 망망한 사막 위 등대처럼 귀환객을 반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높은 고도를 가진 건축물과 그 뒤로 펼쳐지는 마천루를 응시하다가 며칠 전 이 도시에서 만난 예술가와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라스베이거스는 신기루(mirage) 같아요. 홀연히 나타나 잠깐 존재하다가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아름다운 환상. 도시의 모든 것이 아주 활기차고, 무성하며, 새로운 무언가가 끊임없이 사라지고 나타나잖아요.”
라스베이거스는 그런 도시다. 이것이라고 생각하면 저것이 등장하고,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 천연덕스럽게 한자리에 있는 곳. 정의할 언어를 찾으면 이내 사라지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상천외한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하는 세계. 라스베이거스에 머문 일주일 동안 나는 매일 매 순간 ‘지금’을 살았다. 우붓이나 치앙마이의 명상 센터에서 수련할 때 그런 몰입에 빠져본 적이 있었나? 모든 날과 모든 순간으로 진입하는 포털(portal) 같은 도시에서 포스트모던한 리트리트를 누리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