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파리는 만남의 횟수를 거듭해도 송두리째 훔쳐 오고 싶은 영감의 도시라는데, 내게는 복잡한 심상이 일게 하는 장소다. 마음 가벼운 여행자 신분으로 이 도시와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에디터인 내가 몸담은 매체는 전 세계의 마음을 훔친 브랜드를 탐구하는 곳. 그러다 보니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자주 소통하는데, 모국어는 다르지만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같은 유럽권이라도 그 나라 사람 특유의 화법이나 일을 바라보는 방식 등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다양성의 도시에 상주하는 ‘런더너’들은 어떤 순간에 굉장히 보수적으로 나올 때가 있는데, 이때 직설적으로 말하는 대신 세련된 화법으로 “노(No)”라고 에둘러 거절 의사를 표시한다. 이탈리아인들은 일단 이메일을 잘 읽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미술관과 같은 공공기관은 여전히 전화로(그것도 이탈리아어로) 소통하는 것을 선호한다. 프랑스인, 특히나 파리지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를 가장 곤란하게 만드는 존재다. 내게 파리지앵은 ‘지상 최고의 기분파’처럼 느껴진다. 변덕스럽고, 때로는 괴팍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다. 이들은 상당히 일이 진척된 사안에 대해서도 불쑥 반기를 들거나 의사 결정 자체를 재고하는 상황도 왕왕 만든다. 만일 왜 이 이야기를 진즉 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그땐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으니까”라는 대답이 되돌아올 것이다.
애증의 감정이 깊은 파리를 두 번째 방문한 때였다. 취재를 마친 뒤, 인근 아프리카 식당에서의 식사 자리로 기억한다. 스무 해 가까이 파리에서 사는 지인을 붙잡고 파리지앵과 소통하면서 묵혀둔 답답함을 하소연했더니 그가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네 말처럼 파리지앵은 괴팍해 보일 수 있는데, 가식을 떨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게 좋겠어. 그들만이 가진 솔직함이라고 할까? 타인의 시선이나 생각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매사 자기주장이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개성이 확고할 수밖에 없어.”
그에 따르면 파리를 포함해 프랑스에서는 개개인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에 관심을 두고 본인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문화이고, 이는 반대로 말하면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환영받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눈치 보지 않고 삶을 영위하는 구성원들 덕분에 파리는 그 어느 도시보다도 자유롭고,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열린 도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논리로 작동하는 사회 같다는 생각과 함께 왜 한국에서 많은 이들이 퇴사 이후 해방감을 만끽할 여행지로 파리를 선택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파리가 참 신기한 지점이 있어.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거야.”
식사를 마친 지인은 나의 손을 잡고 파리지앵을 대변하는 브랜드를 하나 보여주겠다며 파리 1구의 생토노레 거리로 이끌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내로라하는 패션, 뷰티 브랜드의 플래그십 매장이 즐비한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아스티에 드 빌라트’의 매장이었다. 지금은 서울 한남동에도 매장을 열어 많은 이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지만,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스러운 성격의 브랜드였다. 지인은 아스티에 드 빌라트를 만든 이들 또한 예술가라 파리에서도 창의적 일을 하는 이들(손꼽히는 아티스트, 배우, 크리에이터)이 특히나 깊은 애정을 표현하는 브랜드라고 소개했다.
아스티에 드 빌라트는 1996년 이반 페리콜리와 베누아 아스티에 드 빌라트가 시작한 브랜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졸업 전에 먼저 가구와 화이트 세라믹 제품을 시작으로 향초와 인센스, 문구류, 소품 등으로 차츰 영역을 확장하면서 브랜드를 키워왔다. 사람들에게 잊힌 과거와 옛 물건에서 영감을 받고, 생활에 꼭 필요하면서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온 아스티에 드 빌라트의 핵심 제품은 두말할 것 없이 화이트 세라믹이다. 파리 센강 인근의 검은 흙을 조각하듯이 빚어 화이트 에마유(에나멜)를 발라 구운 아스티에 드 빌라트의 세라믹 제품은 같은 디자인의 제품이라도 미세하게 그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알고 보니 브랜드의 세라믹 제품은 숙련된 도자공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제품 전체 공정을 손수 맡아 제작하는 시스템이기에 제품 하나하나에 만든 이의 손길과 온기가 담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익숙한 완벽함은 없지만 각기 다른 형태와 이야기를 가진 물건에 매료된 사람들은 한번 아스티에 드 빌라트를 알게 되면 오랫동안(가격이 그리 저렴하지 않으니) 취미처럼 이 브랜드의 세라믹 제품을 하나씩 수집하게 된다고 한다.
“익숙한 완벽함은 없지만 각기 다른 형태와
이야기를 가진 물건에 매료된 사람들은
아스티에 드 빌라트의 세계에 더 깊숙이 발을 들인다.”
오리지널 건물이 세워졌을 당시의 짙은 녹색 파사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스티에 드 빌라트의 생토노레 매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진열장 위 다닥다닥 모여 있는 컬렉션은 마치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인생을 엿보는 것 같았다. 흡사 골동품 가게 같기도, 시대 미상의 낯선 세계로 진입한 것 같기도 한 묘한 분위기도 한몫을 더했다. 브랜드의 주력 상품인 화이트 세라믹 제품 컬렉션 사이에 가짜 담배나 가면 등의 저렴하면서도 소소한 아이템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는데, 오래 일한 매장 매니저에 의하면 누가 와도 보물찾기를 하듯 무엇이든 하나 집어 가길 바라는 창립자들의 위트 섞인 배려라고 했다. 누군가는 잡동사니라 말할 수도 있고, 저렴한 취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배려야말로 정말 파리지앵다운 행동 아닐까?
며칠 더 파리에 머무르면서 혼자 아스티에 드 빌라트의 매장을 찾았다. 쇼핑백은 가벼워 보였지만, 아스티에 드 빌라트의 매장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얻은 듯 기쁨에 찬 표정의 파리지앵들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샘솟았다. 각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움, 그리고 이를 기꺼이 이행하는 개별 행동파들이 모여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실행해볼 수 있는 이 도시에서의 삶이 말이다. 완벽함에 집착한 채 분망하게 살아가는 서울라이트는 여전히 파리지앵과 일할 때마다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읊조린다. 다만 이제는 모니터 너머의 파리지앵들이 어떤 목소리를 가진 이인지, 그리고 어떤 자기만의 가치를 가진 채 비밀스러운 ‘잡동사니’를 집 안에 품고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