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여행은 향기로운 맛을 느끼는 낭만이자 문화와 음식의 다양성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나는 특별히 향신료의 풍부한 맛과 향기가 얽힌 요리를 좋아한다. 내 향신료 여행은 20년 전 뉴질랜드에서의 어학연수 시절, 중국 친구들과 함께한 첫 중국 음식 경험에서 시작됐다. 당시 어학당의 90%는 중국인이어서 내 첫 외국인 친구는 당연히 중국인이었다. 훠궈라는 중국 요리의 향기와 맛은 내게 향신료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다. 그 후 나에겐 새로운 여행 버킷 리스트가 생겼다. 바로 중국에 가서 직접 훠궈를 먹어보는 것. 언제부턴가 한국에 마라 열풍이 불어 지금은 어느 곳에서나 훠궈를 먹을 수 있지만, 20년 전 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먹어본 훠궈의 맛은 느끼할 정도로 사골 향이 진하고 향신료 맛이 강했다. 반면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먹어본 훠궈는 깔끔하고 달콤한 맛이었다. 물론 레스토랑마다 맛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향신료는 어느 지방의 땅에서 재배했느냐에 따라 향과 맛의 차이가 있다. 중국 요리에는 대부분 ‘마라(麻辣)’라는 소스가 들어간다. 마라 소스는 라유와 마유를 섞어 만드는데, 라유는 마라의 붉은색을 만드는 고추기름이고 마유는 초피, 후추, 육두구, 정향, 팔각, 회향, 즈란 등 다양한 향신료를 넣고 만드는 기름이다. 바로 이 향신료가 마라를 독특한 매운맛으로 만드는 비밀이다. 마유의 베이스가 되는 이 향신료들은 모두 허브라 칭하는 식물과 나무의 열매에 해당한다.
허브(herb)는 푸른 풀을 뜻하는 라틴어 ‘헤르바(herba)’에서 유래된 어원으로 잎과 열매, 뿌리 등을 향신료, 치료용으로 사용하는 식물이나 나무를 말한다. 수천 년 전 인류는 허브를 약용식물(medicinal plant)로 불렀다. 음식에 넣어 먹었을 뿐만 아니라 허브의 줄기나 뿌리를 말려 약탕기에 넣고 달여 마시거나 생잎을 으깨어 직접 상처 부위에 붙여 치료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왕실 장례에선 사후 세계의 문을 여는 의식으로 매혹적인 향기를 가진 바질(basil)을 태우기도 했다. 뛰어난 효능으로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한 허브도 있다. 바로 타임(thyme)이다. 올망졸망한 모습으로 카페나 음식점에서 디저트와 가니시에 많이 사용하는 타임은 뛰어난 방부·살균 효과로 몇 천 년 전에는 미라를 만들 때 사용했다. 또한 14세기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발병했을 때는 항생제로 사용했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타임 오일이 전쟁터에서 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처음 향신료의 매력에 빠진 후로부터 정확히 10년 뒤 우리 가족은 허브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요리 속 향기가 아닌, 땅속에서 자라고 있는 진짜 살아 있는 향기를 운명처럼 만나게 됐다. 땅 위에서 하늘거리는 신선한 허브와의 첫 만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허브를 직접 키우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한 가지는 허브의 향기가 재배되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훠궈에 들어가는 향신료 초피는 영어로 쓰촨 페퍼(Sichuan pepper)라 부르는데 중국 쓰촨 지방에서 자라는 쓰촨후추나무의 열매이다. 초피의 생김새는 우리가 추어탕에 넣어 먹는 산초 또는 후추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이 세 가지 허브는 맛도 향기도 분류학적으로도 전혀 다른 식물이다. 초피의 학명은 ‘Zanthoxylum piperitum’, 산초의 학명은 ‘Zanthoxylum schinifolium’으로 같은 속(가족 관계)이지만 다른 종명(형제 관계)을 가지고 있다. 후추의 학명은 ‘Piper nigrum’으로 인도 남부 지역에서 자생하는 덩굴식물이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고된 농사일이 낯설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경험했던 향기로운 맛의 탐험 덕분이었다. 여행하며 보고 먹었던 허브를 직접 키우고 식물 자체로 볼 수 있으니 그 모습 하나하나가 무척 신비롭고 옛 추억을 곱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결에 날아오는 민트 향기를 맡으며 뉴질랜드 나의 첫 자취집에서 부모님께 해드리던 내 생애 첫 양고기 스테이크, 무성한 잎을 자랑하며 커가는 파슬리의 모습을 보며 오클랜드 선착장에서 친척 언니와 먹었던 그리운 맛의 홍합 스튜, 까다롭고 예민한 로즈메리를 키우며 스위스에서 먹었던 큼지막한 버터와 솔트가 올려진 두툼한 스테이크와 그때 그 풍경, 투명할 정도로 맑은 오렌지색을 가진 강황 뿌리를 신비롭게 쳐다보며 인도 배낭여행에서 길거리마다 수북이 쌓여 있던 다양한 빛깔의 카레 가루의 모습과 향기까지, 허브는 여행의 기억과 감정을 되살아나게 한다.
허브는 나에게 꿈같은 시간과 최고의 즐거움을 선물했다. 대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 허브처럼,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동반자가 되어주길. 그래서 내 인생을 끊임없는 허브의 모험으로 이끌어주길.
홍화 Carthamus tinctorius
꽃 7~8월 키 약 1m
이집트에서 자생하는 허브로 우리말로 잇꽃, 영어로는 새플라워(Safflower)라고 부른다. 씨앗에서 추출한 오일은 샐러드 및 각종 요리에 베이스로 사용된다. 투탕카멘, 파라오 무덤 미라에서 홍화로 물들인 천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홍화의 꽃을 옷을 물들이는 염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아름다운 노란색 꽃은 여름에 피는데 말려 차로 마시면 관절과 혈액순환에 좋은 효능을 볼 수 있다.
강황 Curcuma longa
꽃 4~6월 키 약 1m
인도 케랄라주에 자생하며 카레 요리의 기원이 된 강황의 본래 이름은 할디(Haldi)이다. 7세기에 중국에 전해지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재배되며 다양한 맛과 향의 카레가 판매되고 있다. 강황은 뿌리를 먹는 식물이기 때문에 재배되는 토양과 기후의 상태에 따라 맛과 색, 향이 결정된다. 이는 나라마다 카레의 맛과 향, 색이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인도 케랄라주에서 재배되는 강황이 가장 강렬한 황색과 독특한 향, 맛을 가지고 있다.
펜넬 Foeniculum vulgare
꽃 6~8월 키 약 1.5m
그리스에서 자생하는 대표적인 허브 펜넬은 그리스어 마라토(μάραθο)에서 유래됐다. 이는 마라톤 대회가 개최되던 시기 마을 가득 펜넬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기 때문. 펜넬은 그리스 요리에 단독 또는 곁들여 자주 사용하는데 그중 하나가 마라토피타(marathopita)로 알려진 전통 파이다. 펜넬 잎을 잘게 다져 양파, 시금치, 치즈 등과 함께 반죽 속에 겹겹이 쌓아 만드는데 이 파이를 한 입 먹으면 그리스 향이 가득 퍼지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로즈메리 Rosmarinus officinalis
꽃 4~6월 , 9~11월 키 약 1m
지중해 바다 절벽에서 자생하는 로즈메리는 ‘바다의 이슬’이라는 뜻의 라틴어 로즈마리누스(Rosmarinus)에서 유래됐다. 이슬(ros)과 바다(marinus)를 합친 말이다. 이는 거친 바닷바람과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나는 식물의 특성이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로즈메리는 지중해 지역 요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즈메리 치킨은 이탈리아의 전통 요리로 특별한 날 저녁 식사로 즐겨 먹는다. 로즈메리 갈릭새우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스페인 전통 요리 중 하나로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음식이다.
레몬버베나 Aloysia triphylla
꽃 5~7월 키 약 2m
남아프리카에서 자생하는 레몬버베나는 강한 레몬 향이 나지만 맛은 신맛이 아닌 부드러운 녹차 맛이다. 게다가 비타민까지 듬뿍 들어 있어 아랍의 보석 모로코에서 식후 마시는 귀중한 차로 쓰이는 허브.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 탐험 도중 발견하여 왕실로 가져온 이 식물을 공주가 미칠 듯 사랑했다 해서 ‘공주의 식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히말라야양귀비 Meconopsis betonicifolia
꽃 6~7월 키 약 80cm
히말라야산맥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식물로 1814년 히말라야를 방문한 프랑스 식물학자 비기에(Viguier)에 의해 알려졌다. 양귀비 열매 유액에 있는 환각 성분이 아편의 원재료로 사용되어 일부 나라에선 재배가 금지되었지만, 씨앗에는 칼슘이 풍부해 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중부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기간에 양귀비 씨앗을 롤 안에 넣어 구워 먹는 슈트루델(strudel)이 매우 인기 있다.
달리아 Dahlia pinnata
꽃 7~8월 키 약 1.5m
멕시코, 과테말라에서 자생하며 원주민의 허기를 달래주었던 달리아는 뿌리가 고구마처럼 크다. 이 뿌리는 냄비에 쪄 먹으면 야콘 같은 맛이 날뿐더러 이눌린이 풍부해 에너지 자원으로 활용됐다. 뿌리만큼 꽃도 커다랗고 아름다운 색감을 가졌는데 유럽에 퍼지면서 점차 재배용이 아닌 원예용으로 개량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달리아의 꽃 모양은 수천 가지에 이른다.
고추냉이 Eutrema japonicum
꽃 3~4월 키 약 40cm
일본과 우리나라 철원 지방에서 자생하는 고추냉이는 향신료 와사비의 원료이다. 일본 유명 스시집에서 초록색 덩어리를 강판에 갈아주는 모습과 맛이 인상적으로 남았는데 나중에 그것이 고추냉이의 뿌리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기억이 있다. 깨끗한 물이 많은 일본은 반음지에서 자라는 고추냉이의 조건을 완벽히 갖춘 곳이다. 뿌리에 들어 있는 시니그린(sinigrin) 성분은 생선의 비린내를 잡아줄 뿐 아니라 살균 효과가 뛰어나 식중독도 예방해준다.
글을 쓴 박선영은 허브농장을 운영하는 농부이자 그림작가 겸 여행자이다. 인생의 아름다움과 삶의 지혜를 가르쳐준 허브를 ‘소통’이라고 말하는 그는 허브에 대한 글과 그림을 함께 엮은 책 <올 댓 허브>를 펴냈고, 식물과 원예 활동을 통한 발달장애·어린이 원예치료사로도 일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