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의 자연과 삶을 품은 아크테릭스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Seo Jaewoo

밴쿠버의 자연과 삶을 품은 아크테릭스

Arc'teryx: Embracing Nature and Life in Vancouver

장대한 로키산맥의 한 자락인 코스트산맥과 태평양 사이에 자리한 도시, 밴쿠버에서 대자연은 일상의 무대다. 그들이 언제든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코스트산맥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브랜드, 아크테릭스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written by Seo Jaewoo
2025년 01월 03일

밴쿠버를 좋아해 본 기억이 없다. 20대 시절, 미국 여행 중 두어 번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무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는 포틀랜드 같군.” “여기는 런던 같고….” “음 여긴….” 내게 밴쿠버는 여러 도시의 매력을 조합한 도시에 가까웠다. “스탠리 파크라는 거대한 공원과 한국식 자장면을 맛볼 수 있는 차이나타운이 있는 도시야.” 친구들이 밴쿠버에 관해 물어보면 이렇게 시덥잖은 얘기를 하곤 했다. 물론 이는 아크테릭스(Arc’teryx)를 경험하기 전 밴쿠버에 대한 인상이다.

밴쿠버에 다시 가게 된 건 약 3년 전, 아크테릭스 취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해외 출국 자체가 여의찮던 시절에 성사된 출장이기에 아크테릭스는 좀 더 특별하게 인식된 브랜드인데, 무엇보다 출국 전 브랜드 홍보 담당자와 주고받은 메일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는 아크테릭스가 코스트산맥(Coast Mountains)이라는 아름다운 산맥에서 영감받은 브랜드임을 강조하며 취재 기간에 하이킹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 그 제안이 딱히 달갑지 않았다. 무엇보다 짧은 하이킹만으로 브랜드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메일을 회신할 때 의도적으로 하이킹과 관련한 질문에만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나름의 완곡한 거절 표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내게 하이킹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좋은 등반 장비가 필수라며 취재팀 전원의 의류와 신발 사이즈를 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코스트산맥 하이킹은 아크테릭스라는 브랜드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었다.
취재를 위해 투숙한 호텔은 노스밴쿠버 론즈데일에 위치했는데, 선착장과 가까워 객실 창을 통해서도, 호텔 밖에서도 언제나 바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와 크루아상을 주문하고, 선착장 주변을 산책하며 파도 소리와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것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했는데, 바다와 잠시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팬데믹 속에서 느낀 관계의 결핍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실제로 론즈데일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웠다. “밴쿠버 사람들은 밖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요. 다들 행복해 보이는걸요. 그저 평범한 일상 같아요.” 팬데믹 시기에 해외에 체류하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이런 답과 함께 밴쿠버 사람들처럼 일상을 보낸다고 말했다.

밴쿠버에 머무는 동안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건 도심에서 마주친 로컬들이 입고 있던 재킷이었다. 대부분 모자가 달린 방풍 재킷을 입었는데 유독 아크테릭스의 ‘스쿼미시’ 재킷이 눈에 띄었다.
스쿼미시는 아크테릭스의 상징적인 경량 방풍 재킷으로 밴쿠버가 속한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작은 마을 이름에서 따온 모델이다. 원주민 언어로 ‘바람의 어머니’라는 뜻을 지녔는데, 이름에 걸맞게 아주 강력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은 암벽등반의 성지로서 화강암 절벽으로 이뤄진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크테릭스는 스쿼미시의 자연과 암벽등반을 즐기는 밴쿠버인들이 있기에 바람과 강수에 강하고 활동성을 높여주는 경량 방풍 재킷인 스쿼미시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밴쿠버 사람들은 산이나 바다에 매우 자주 가요. 그것이 우리가 팬데믹 시기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크테릭스 본사에서 만난 이들 대부분은 자연을 통해서 팬데믹 시기를 버티고 행복을 얻는다며, 그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삶이 예전과 다르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길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암벽등반을 하지 않는 디자이너는 암벽등반가가 인정할 만한 좋은 제품을 디자인할 수 없고, 스키를 타지 않으면 기능이 뛰어난 스키 백팩을 만들 수 없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아크테릭스 어드밴스트 콘셉트 부서의 시니어 디렉터인 댄 그린(Dan Green)의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밴쿠버 사람들의 삶 속에 이 브랜드의 성공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밴쿠버의 자연과 삶을 고스란히 품은 아크테릭스는 1989년 등반가 데이브 레인(Dave Lane)이 더 나은 등반 장비를 만들기 위해 캐나다 밴쿠버에서 설립한 록 솔리드(Rock Solid)를 전신으로 하는 아웃도어 브랜드다. 1991년 시조새의 학명 ‘아르카이옵테릭스 리토그라피카(Archaeopteryx lithographica)’에서 모티프를 얻어 ‘아크테릭스’로 사명을 변경했는데, 이는 제조를 기반으로 두며 진화적 접근법을 취하는 그들의 태도를 담기 위함이다. 아크테릭스는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품절 대란을 일으키는 아웃도어 신(scene)의 최강자다. 어디 그뿐인가. 패션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는 생전에 아크테릭스의 고어텍스 프로 셸 재킷인 ‘알파 SV’를 무심하게 입고 런웨이 현장에 등장했고, 뮤지션 프랭크 오션은 아크테릭스의 경량 패딩 재킷인 ‘세륨 LT 후디’와 시조새 로고가 큼직하게 그려진 비니를 매칭해 입었다. 나비효과처럼 힙합과 스트리트 컬처를 좋아하는 이들 모두가 패션 아이템으로 아크테릭스 제품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저희에게는 진실한 관계와 거짓 없는 진짜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아크테릭스의 브랜드 마케팅을 총괄하는 사내이사 칼 아커(Karl Aaker)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등반가의 개척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그들이 밴쿠버 내 제조·생산 공장 아크원을 취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아크원(ARC’One)은 디자인 센터에서 차를 타고 25분 정도만 가면 도착한다. 축구장 세 배 크기의 규모를 자랑하는데, 흥미로운 건 각자 위치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내는 생산자의 모습이 가장 먼저 보인다는 점이다. 자동화 기계나 컨베이어 벨트가 없는 현장 덕분에 기계가 내는 굉음도, 화학약품 냄새도 나지 않는다. 아크원을 둘러보면 원단과 실, 재봉·프레스·테이핑 기계, 커터 칼과 재단 가위 등 옷과 장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재료와 도구가 작업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맨손으로 가파른 암벽을 오르던 창립자의 도전 정신처럼 인간의 손으로 제품 혁신을 일궈낸 것이다. 실제로 아크테릭스의 모든 혁신은 코스트산맥에서 시작해 코스트산맥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아크테릭스를 이해하는 데 주변 환경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희는 캐나다 서부 코스트산맥의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태어난 브랜드입니다. 항상 코스트산맥 날씨와 환경 변화를 주시해야 하죠. 저희 모든 제품은 코스트산맥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크테릭스 취재 내내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아크테릭스 관계자의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하이킹하는 날에만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저희가 준비한 옷을 입고 코스트산맥을 함께 탐험해봐요.” 관계자의 말에 따라 그들이 자랑하는 레이어링 시스템에 입각해 겹겹이 옷을 입고 코스트산맥을 올랐다. 분명 초보자 코스라고 했는데, 유독 길이 아닌 밀림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계곡에 당도할 때마다 제대로 된 다리가 없어 쓰러진 나무를 밟고 건너야만 했고 가파른 바위를 넘기 위해 하네스를 차고 암벽을 타야 했다. “조금만 힘내요. 이제 곧 정상이에요.” 아크테릭스 관계자와 이번 하이킹의 길잡이 역할을 한 탐험가는 밴쿠버인들은 이 정도는 가뿐하다는 표정으로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산을 타며 말했다. 기어코 오른 정상에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의 영향인지 안개로 가득했다. 내가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조차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본사 취재를 마무리하고, 밴쿠버의 중심가인 개스타운과 이름 모를 작은 동네에서 레코드 몇 장을 사고 PCR 테스트를 받았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와서 아크테릭스에 관한 원고를 마감하는데 이상하게 하이킹 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알게 됐다. 도시 근방에 드높은 산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아가 자연을 통해서 태어난 브랜드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크테릭스 취재를 통해서 내가 경험한 건 단순히 기술력을 가진 훌륭한 아웃도어 브랜드 제품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에 관한 ‘여정’이었다. 흥미로운 건 밴쿠버 출장 이후 나의 삶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시티 라이프’를 추구했던 나는 이제 시간이 나면 산을 오르고, 때때로 백패킹을 떠난다. 지금 이 원고를 쓰는 순간에도 주말에 떠날 백패킹 여행지를 생각하고 있다. “밴쿠버 사람들은 자연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연을 통해서 삶의 영감을 얻곤 하지.” 밴쿠버에 관해 묻는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내게 밴쿠버는 더 이상 지루한 도시가 아니다.

글을 쓴 서재우는 매거진 에서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며 브랜디드 콘텐츠를 만들었다. 지금은 ‘일렉트로닉 에스프레소’라는 커뮤니티 센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음악, 패션, 디자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입체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