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징조
사계절의 존재를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나의 굳은 믿음은 그린란드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이곳에도 정말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걸까? 그린란드 사람들이 봄과 가을을 헷갈려 한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린란드에서의 삶이 해를 거듭할수록 그게 딱히 이상한 것도, 신기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봄과 가을은 정말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매우 짧기 때문이다. ‘봄이 왔나?’ ‘지금 가을인가?’ 하고 느끼려는 순간 이미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만다. 고로 그린란드엔 여름과 겨울만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6월에서 8월까지를 ‘여름’이라고 부르고(물론 여름이라고 해서 우리 가 알고 있는 그 날씨처럼 무덥진 않다) 나머지는 다 겨울이다. 그린란드 사람들은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순간을 후각으로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어디선가 눈 냄새가 나”라는 말과 함께. 그러면 어김없이 산꼭대기에 눈이 내려앉은 장면이 펼쳐져 있다. 시각을 자극하는 겨울의 신호는 눈 말고 또 있다. 바로 오로라다. 사실 오로라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한여름 백야의 나날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여름을 지나 밤하늘이 어둠을 되찾는 8월 말이 되면 녹빛 광선이 검은 하늘에 존재를 드러내는데 바로 그 모습이 이제 막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그린란드의 상징적 장면이다.
누크의 평범한 겨울 일상
겨울의 서막을 여는 눈은 9월에 본격적으로 찾아온다. 지난 9월에 내린 첫눈은 동토를 하얗게 뒤덮는 양이었다. 10월까지 내리고, 쌓이고, 녹는 과정을 반복하던 눈이 급강하한 기온과 함께 빙판으로 변하면 그린란드의 한겨울이 시작된다. 아이스링크를 방불케 하는 단단히 얼어버린 거리. 그 위에 자갈을 뿌리는 트럭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바로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Nuuk)의 일상적 풍경이다. 자갈이 마찰력을 높여주긴 하지만 이 ‘미끄러운 길’에서 제대로 걷는 것은 익숙지 않은 사람에겐 역부족. 나의 겨울 채비는 아이젠으로 시작한다. 빙벽 등반 용보단 간소화된 버전으로 보통 ‘안티 슬립 아이젠’이라 부른다. 그린란드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걷는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노인, 외국인, 그리고 ‘똑똑한 사람’들이다. (아이젠을 우습게 보다 미끄러져 넘어진 사람들 때문에 그린란드의 병원은 늘 북새통이다.) 여름이 아닌 계절에 그린란드를 찾을 계획이 있다면 아이젠을 챙겨 오거나 현지 스포츠용품점에서 구매하길 추천한다. 동장군이 절정일 땐 스키용 고글도 필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아침, 스키 고글까지 쓰고 회사에 출근할 땐 회의감마저 든다. 한번은 걷다가 ‘화이트 아웃’이 와서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길 한복판에서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순간도 있었다. 집 밖을 나서는 일이 곧 모험인 땅에서 그린란드 사람들은 계절과 상관없이 꽤 능숙하게 산책을 즐긴다. 그 비결이 궁금하다면 유치원 근처를 배회해보자. 두 줄로 서서 친구와 손을 잡고 그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잘 걷는 아이들을 보면 혹한의 환경에 익숙한 까닭이 보인다. 낮의 길이가 매우 짧은 탓에 비타민 D 부족을 겪지 않기 위해 해가 있을 때 부지런히 밖으로 나선다. 겨울을 더 적극적으로 즐기는 이들은 스노보드를 들고 외출한다. 실제로 누크의 시내버스 안에선 장비를 완벽히 갖춘 학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꽁꽁 언 연못 위에서 아이스하키를 즐기는 이들, 별다른 채비 없이도 집 근처에서 스키와 스노보드, 크로스컨트리 등을 자연스럽게 즐기는 이들이 얼어붙은 도시에 활기를 더한다.
극북의 땅에서 혹한을 즐기는 법
위에서 감상한다. POTOGRAPHY BY AXEL G. HANSEN / VISIT GREENLAN
2 슬리핑 헛(SleepingHuts)은 북극의 야성 넘치는 대자연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공간. 개썰매를 타고 설원을 달리다가 밤이 찾아오면 이 작은 오두막에서 쏟아지는 오로라 세례를 누려보자. PHOTOGRAPHY BY MANTAS HESTHAVEN / VISIT GREENLAN
그린란드의 이 혹독한 날씨는 낯선 외지인에게도 활짝 열려 있다. 많은 여행자들의 버킷 리스트인 오로라는 8월 말부터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지는 긴 겨울 내내 만날 수 있다. 보통 낮의 길이가 적당히 긴 10~11월을 겨울 여행의 적기로 생각하지만, 진짜 겨울은 온 땅이 눈으로 뒤덮이는 1월부터 4월까지. 개썰매, 스노모빌, 스키와 같은 액티비티를 제대로 즐기기엔 이 시기가 제격이다. 특히 3~4월은 한겨울의 날씨와 제법 길어진 낮 시간 덕에 여행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단, 폭설과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비행기 연착이 빈번하므로 일정을 여유 있게 짜길 추천한다.)
2 설원에서 물범을 사냥하는 이누이트. ⒸKEDARDOME / SHUTTERSTOCK.COM
북적이고 들뜬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면 그린란드의 최대 명절, 크리스마스에 찾을 것. 12월의 누크엔 크리스마스 시즌의 낭만이 넘친다. 크리스마스트리와 크리스마스 마켓의 따뜻한 불빛, 그리고 새하얀 눈이 일찌감치 밤이 찾아온 도시의 적적함을 채우고 거리에 스며든 어둠을 환하게 밝힌다. 덴마크의 영향을 받아 모던한 인테리어와 세련된 상점, 식당, 호텔 등이 많은 누크의 현재를 즐겨도 좋지만 오래전부터 이 땅에 속한 이누이트의 전통을 찾아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낮엔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바위뇌조라는 새를 사냥하러 나가는 이누이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린란드다. 이누이트 공예와 미술, 이들의 삶을 접할 수 있는 박물관 등 가볼 만한 장소도 많다. 매년 3월경에 열리는 누크 스노 페스티벌(Nuuk Snow Festival)도 놓치면 아쉬운 겨울 이벤트다. 친구, 동료, 급우, 가족들이 삼삼오오 팀을 이뤄 눈으로 아름다운 조각을 빚는 축제다. 예술이 된 눈도 근사하지만 그린란드 로컬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가 더 매력적이다.
또 다른 겨울, 시시미우트
시시미우트(Sisimiut)는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사랑받는 겨울 여행지. 그린란드 제 2의 도시로 불리는 이곳은 모험을 주제로 그린란드를 여행하고 싶을 때 베이스캠프로 삼기 좋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아시비수 이트-니피사트 구역의 황홀한 설경, 하이킹과 크로스컨트리 스키 등의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드넓고 가파른 협곡과 산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강렬한 모험보다 안락한 유희를 즐기고 싶은 이들은 개썰매 위에 오르면 된다. 이 액티비티는 북극권(Arctic Circle)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누크에선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썰매견의 넘치는 에너지를 느끼며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달리는 쾌감은 타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여행자에겐 ‘놀이’인 개썰매는 이누이트들의 겨울 사냥을 위한 생존 수단이기도 하다. 연료 공수가 어려운 스노모빌과 달리 개썰매를 이용 하면 며칠 밤에 걸쳐 물범 사냥을 할 수 있기 때문.
튼튼한 체격을 갖춘 이 동물은 선주민 이누이트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가족 같은 존재다. PHOTOGRAPHY BY MANTAS HESTHAVEN / VISIT GREENLAN
2 그린란드의 썰매견인 ‘그린란드 도그’. PHOTOGRAPHY BY ANINGAAQ ROSING CARLSEN / VISIT GREENLAND
2 사냥한 물범을 손질하는 이누이트. ⒸKYLIE NICHOLSON / SHUTTERSTOCK.COM
시시미우트 곳곳에선 이누이트의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와 프로그램을 쉽게 만난다. 악틱 사운드(Arctic Sounds)는 매년 4월 시시미 우트의 늦겨울을 달구는 음악 축제다. 그린란드를 비롯한 북극 여러 나라들,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 페로제도, 캐나다, 알래스카 등에서 뮤지션들이 모여 다채로운 음악과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린란드에 산 지 8년 차.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바깥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다. 맑은 밤 하늘에서 매일 다른 모습으로 춤추는 오로라, 집집마다 내뿜는 크리스마스 불빛을 보고 있으니 여름 내 그리웠던 그린란드의 겨울 한복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행복하다. 새해에도 혹한의 땅이 건네는 찬란한 선물을 만끽하며 그린란드의 겨울을 한껏 즐겨볼 생각이다.
- Travel Guide
가는 방법 에어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에어, 노드랜드 에어가 그린란드로 운항한다.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덴마크 코펜하겐을 경유하는 여정이 일반적이다.
여행 시기 대부분의 가이드북이 여름을 그린란드 여행의 적기로 명시하지만 극북 지방의 매력을 제대로 경험하고 싶다면 겨울에 찾을 것. 오로라는 8월 말부터 볼 수 있다. 3~4월에 찾으면 비교적 견딜 만한 추위와 함께 설경과 윈터 액티비티, 스노 페스티벌 등을 즐길 수 있다.
추천 코스 많은 여행자들이 그린란드의 80%를 뒤엎은 빙하지대를 만날 수 있는 캉거루수아크로 들어가 빙하 투어로 여정을 시작한다. 이후 이누이트의 삶을 만날 수 있는 시시미우트를 거쳐 페리를 타고 그린란스의 수도인 누크나 유네스코 헤리티지 사이트로 지정된 일루리사트로 이동한다. 겨울엔 개썰매를, 여름엔 고래 워칭과 트레킹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