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물건을 만나게 될까?’얼마 전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렇구나, 나에게 여행이란 ‘물건과의 만남’이구나. 누군가는 다이어트, 누군가는 영어 공부라는 목표를 새해가 올 때마다 외치듯이 나 또한 입버릇처럼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매번 도돌이표다. 그 목표를 못 이룰 거란 사실을 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만년 귀차니스트 집순이인 나를 여행길에 오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원은 새로운 물건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물욕이기 때문이다. 물건이라면 일단 좋아하고 보는 나지만 아무래도 늘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자잘한 소품, 특히 문구류를 가장 좋아한다.
여행길에서 이고 지고 가져온 문구류와 물건들은 책상 위나 집 안 곳곳에 놓인다. 그들에게는 각자만의 이야기가 선명히 서려 있다. 물건과 나의 우연, 혹은 필연적인 인연들. 물건을 처음 발견한 순간의 감정이나 손에 넣은 앞뒤 정황, 함께 있던 사람, 구매한 곳의 전체적인 분위기 등 그 이야기도 참 다양해 집 안을 조금만 둘러보면 금세 마음이 풍족해진다. 자꾸 집에만 있으려는 내게 집에 꿀이라도 발라뒀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해본다. “꿀은 안 발라놨는데요, 발라둔 이야기는 많아요.”
오늘도 내 방을 천천히 눈으로 여행하며 나는 여행지들을 떠올린다. 물건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순식간에 베트남의 차이나타운으로, 뉴욕의 1달러숍으로, 경상도 삼천포로 떠날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1호 보물, ‘미코팬시’ 펜 진열장 먼저 살펴볼까. 이 진열장은 본래 경상도의 어느 오래된 문방구에서 펜을 판매하는 매대로 사용하던 것인데, 2020년 여름 여행을 마친 나와 함께 우리 집에 왔다. 그해 여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나는 기쁜 마음으로 친구와 전국일주를 떠났다. 이렇다 할 목적도, 정해진 일정도 딱히 없는 여행이었지만 유일하게 기대하는 것이라면 전국 방방곡곡 작은 문방구들을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늘 마음속에 버킷리스트로 남아있었지만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아 실행하지 못한 일이었다.(학교 앞 문방구들은 종종 주말에 문을 닫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오래된 문구점이 보이면 차를 세워 구경하고, 운이 좋으면 사장님들과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심심한 일정의 연속이었다. 그중 한 오래된 문방구는 2주 후면 문을 닫는다고 했다. 30년은 족히 지나왔을 법한 문방구가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니, 그 지역에 살지 않는 나조차 아쉽고 섭섭할 지경이었다. 학창 시절을 풍미했던 추억의 캐릭터 문구를 몇 개 골라 담다가 혹시나 해서 집기도 파실 수 있느냐고 여쭤본 물건이 바로 이 미코팬시 펜 진열장이다. 3천원만 달라는 주인 할머니 말에 냉큼 가져와 집에 오자마자 먼지를 털고 잘 닦아주니 새것처럼 말끔해졌다. 세월이 고스란히 쌓인 물건이 이제는 우리 집에 와서 수백 자루의 필기구를 보기 좋게 담아주는 필기구 전용 가구로 잘 쓰이고 있다. 2020년 여름의 기억을 간직한 최고의 기념품이다.
해외를 여행하며 주워 모은 작은 문구류도 책상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스마일 스티커도 그중 하나다. 5년 전, 처음 방문한 뉴욕에서 또 문구류를 트렁크 가득 사 왔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어 눈에 잘 띄는 곳에 보관 중인 이 스티커는 문구점이 아닌 장난감가게에서 발견했는데, 원래는 유아용 칭찬 스티커(behavior stickers)로 만들어졌지만 웬만한 디자인 문구보다 귀여워 한눈에 반했다. 철물점, 1달러숍, 중고가게에서도 아름다운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늘 눈에 불을 켜고 매대를 찬찬히 들여다봐야만 한다. 너무 마음에 들어 평소였다면 여러 개 구매했겠지만 하필 재고가 딱 한 장 남았던지라 구겨질까 노심초사, 애지중지 들고 왔던 기억이 난다. 실은 아마존에서도 구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한 장 남았을 때 산 이 친구가 그렇게나 애틋하다. 처음 가본 뉴욕에서 느낀 감동과 즐거움, 흥분부터 충격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일까?
해외 파견 생활 중에도 문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문구 시장에서도 불모지라 불리는 베트남 생활 중에는 일요일마다 핫트랙스에서 한 주를 마무리했던 서울 생활에 비하면 문구를 살 곳도, 구경할 곳도 너무 빈약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문구가 아닌 것을 문구로 사용하는 재미도 있지 않던가. 한창 모았던 영수증 뭉치도 그러하다. 아직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으로 많은 것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베트남에서 수기로 쓰는 영수증은 곳곳에서 쓰인다. 오토바이 주차를 할 때, 식당이나 카페에서 음식을 주문했을 때 후루룩 써주는 영수증은 내 일기 한편에 늘 자리하곤 했다. 촌스러운 색깔과 거친 종이로 만들어진 영수증 뭉치를 여기저기서 사보면 정겹기도 하고 지역마다 디자인도 조금씩 달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끔 메모를 할 때 뜯어 쓰기도 하고, 베트남어 단어를 공부하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1년 남짓 베트남 생활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이 흔적들을 다시 펼쳐보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이공 길거리 한복판에서 작열하는 태양이 떠올라 정수리가 뜨끈하게 달궈지는 느낌이다. 문구류가 없어도 너무 없다며 투덜거리던 날들, 이렇게 수기로 주문을 받으니 매번 실수가 생긴다며 툴툴거리던 날들. 영수증을 보면서 다시 그리워하게 될 거란 걸 그땐 몰랐다. 영수증들을 바라보며 치열했던 그 여름날들을 떠올린다.
이렇게 캐리어에 넣어온 작은 물건들을 매개로 나는 종종 내 방 안에서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다. 간혹 그렇다고 해도-내 방이 지루해져도- 문제없다. 그럴 땐 또 빈 가방 하나 들쳐 메고 떠나면 되니까. 오늘도 내일도 나를 설레게 해줄 작은 물건들을 찾아 집을 나선다. 내일은 또 어떤 물건을 만나게 될까?
김규림의 방을 여행지로 만들어준 문구점 목록
싱크 오브 싱스(도쿄)
떠들썩한 하라주쿠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면 나오는 싱크 오브 싱즈(Think of Things)는 도쿄에서 좋아하는 문방구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문구 브랜드 고쿠요(Kokuyo)에서 운영하는 문구점 겸 카페로, 클래식한 문구 라인업과 세련된 브랜딩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토야(도쿄)
긴자에 위치한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초대형 문구점. 나의 도쿄 문구 여행은 늘 이토야(Itoya)에서 시작해 이토야에서 끝나기에 긴자 한복판, 멀리서 빨간 클립이 보이면 그렇게나 반갑다. 분야별로 나뉘어 있는 층을 훑고 나면 서너 시간은 금세 가니 시간을 넉넉히 잡고 갈 것.
포인트 오브 뷰(서울)
창작 도구로서의 문구를 제안하는 성수동의 문구점. 전 세계에서 온 아름다운 문구류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유럽 어딘가에 있는 기분이 든다. 일상에서 영감이 필요한 순간 방문하면 좋을 곳.
글을 쓴 김규림은 마케터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자신을 ‘문구인’으로 소개하는 걸 더 즐긴다. MZ 사이에서 유명한 프로젝트 ‘두낫띵클럽’을 창립했으며 독립출판물 <도쿄규림일기>, <뉴욕규림일기>와 문구점 주인이라는 장래희망을 세상에 알린 책 <아무튼, 문구>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