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적잖이 마셨다. 미국 사는 매제가 한국 들어온 김에, 그의 동생과 친구까지 집으로 불러 꽤나 거한 술자리를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날 이렇게 무겁지 않은 머리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우리가 마신 술의 주종 탓이다. 다른 술은 링 위에 올리지 않고, 오롯이 소주만 예닐곱 종류를 마셨던 것. 그런데 이 소주가 직장인들이 퇴근길에 한잔 걸치곤 하는 ‘초록병 소주’와는 사뭇 다르다. 이른바 ‘증류식 소주’라고 하는,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마셔왔던 전통적인 소주에 좀 더 가깝다. 쌀로 양조주를 만들고, 그것을 비교적 소형의 증류기에 넣고 끓이면서 물보다 먼저 날아 나오는 알코올을 공중에서 낚아챈다. 이것을 스테인리스 탱크나 옹기, 자기 독에서 몇 달 혹은 몇 년 숙성시켜 병입한다. 이렇게 만든 술은 꽃이나 즙 많은 과일, 갓 지은 밥 같은 향기를 풍긴다. 자연에서 온 극미량의 향미 성분 이외에는 물과 천연 에탄올뿐인 술이기에 당연히 다음 날 숙취도 적다.
조상 때부터 마셔온 이런 증류식 소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이트 스피릿’이다. 여기서 ‘화이트’는 흰색이 아니라 ‘무색투명’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외국산 증류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연한 갈색을 띠는 위스키와 코냑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술들도 증류를 갓 마쳤을 때엔 무색투명하다. 캐스크, 혹은 배럴이라고 부르는 떡갈나무 통 속에서 숙성 과정을 거치며 통의 목재에서 우러나온 나뭇진이 술에 섞여 들어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스키와 코냑의 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크통 숙성을 거치는 술들은 나에겐 양념갈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화이트 스피릿은? 당연히 소금구이다. 나뭇진, 심지어는 그 통에 전에 담았던 술의 향까지 개입해 복합적인 풍미를 내는 이른바 ‘브라운 스피릿’과 달리 재료의 향이 좀 더 순수하게,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술을 만드는 원천 기술인 ‘증류법’은 5천500년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길가메시가 다스리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증류법을 이용해 여러 식물성 재료로부터 향유를 분리해냈고, 이 기술은 이집트와 그리스, 페르시아와 인도에까지 전해졌다. 여러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던 증류 기술을 집대성하고 효율을 향상시킨 것은 8~9세기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압바시야 왕조의 연금술사들이었다. 이들 무슬림에게 술은 금기였지만 어기는 사람이 있어야 금기 아닌가. 레반트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와인을 최신식 증류기로 증류해본 사람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그에게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그 미칠 듯이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액체를 알라에게 용서를 빌며 입안으로 흘려 넣었던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액체를 아랍인들은 ‘아라크(araq)’라고 불렀다. ‘땀’ 또는 ‘응결된 것’이라는 뜻이다. 증류기 안에 땀이나 이슬처럼 맺힌 뒤 냉각기의 꼭지를 따라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을 반영한 자연스러운 작명이다.
아라크와 그 제조법은 북아프리카를 정복하고 스페인으로 쳐들어간 아랍 군대를 따라, 그리고 바그다드를 정벌하고 동아시아로 개선한 몽골 군대를 따라 서쪽으로 동쪽으로 퍼져나갔다. 기껏해야 5도에서 15도 내외의 도수밖에 되지 않고 그마저도 쉽게 변질되어버리기 일쑤이던 기존의 술에 만족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이 내린 축복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이렇게 퍼져나간 아라크는 때로 뒤늦게 들어온 종교에 의해 만드는 것과 마시는 것 모두 죄악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알아내버린 비밀의 향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으로 유명한 수단에서 만났던 ‘아라기’가 그런 예다. 수단 내전이 한창이던 2003년, 반군으로 둘러싸인 남수단의 와우라는 곳에서 르포 형식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우리 일행을 도와줬던 유니세프 소속의 의사 말릭은 모든 취재가 끝난 마지막 밤에 우리를 자신의 거처로 초대했다. 그 동네에 몇 개 안 되는 냉장고를 열고 꺼내온 것은 생수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 딱 봐도 그냥 물일 리 없는 음료였다. 기장으로 만든 지역 전통 화이트 스피릿, 아라기였던 것. 그의 말을 빌면, 교도소에 있는 남자의 80%는 이걸 마시다가 잡혀왔고, 여성의 80%는 이걸 만들다가 잡혀왔단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도 후끈하고 뜨거운 한 잔에 탐닉할 수단의 술꾼들에게 ‘팀 스피릿’에서 우러난 박수를 보낸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저마다의 아라크를 만들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의 과실 증류주 ‘오드비(eau-de-vie)’, 배·자두·체리를 이용하는 독일의 증류주 ‘슈납스(schnapps)’, 와인을 만들기 위해 즙을 짜고 남은 포도의 찌꺼기를 재발효시켜 증류하는 이탈리아의 ‘그라파(grappa)’ 등으로 뿌리를 내려갔다. 과일이 변변찮은 북방에서는 곡물 증류주로 탈바꿈한다. 러시아의 보드카가 그런 예다. 보드카는 밀, 호밀 등의 곡물뿐 아니라 감자, 사탕무와 같은 재료를 이용해 만들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과실 증류주에 비해 맛이 거칠어지기 쉬운 곡물 증류주를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도 생겨났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아콰비트(akvavit)’가 그렇다. 감자를 원료로 하는 원주에 카다멈, 정향, 아니스, 레몬 껍질 등을 첨가해 맛을 낸 것. 이와 비슷하게 곡물 주정에 주니퍼 베리, 고수 씨앗, 시나몬, 팔각, 오렌지 껍질 등을 우려내 다시 한 번 증류한 술을 네덜란드에서는 ‘게네베르(genever)’라고 불렀는데, 이걸 무척이나 좋아했던 영국 사람들이 발음을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진(gin)’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글을 쓰다 보니, 세계 곳곳의 화이트 스피릿을 풀어낸 글인지 내가 지금 마시고 싶은 술을 열거하는 건지 모르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아무래도 주방으로 가서 술장을 열고 새 병을 하나 따야 하는 시간이 된 모양이다. 어제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나는 소주를 섭렵했으니 오늘은 또 어디로 향해볼까나. 어느 마법의 양탄자가 나를 그 술이 태어난 나라로, 행복한 피안으로 데려다주려나.
예니 라키 알라 Yeni Raki Álá
라키는 튀르키예에서 수세기 동안 생산된 화이트 스피릿이다. 이 제품은 건조한 포도를 삼중 증류시킨 후 오크통에서 숙성시켰다. 강렬하면서도 벨벳처럼 부드러운 텍스처를 지녔으며, 향신료 아니스의 달콤한 풍미도 느껴진다.
MGC 싱글샷 MGC Single Shot Gin
영국의 진 증류 기술은 연방국인 호주로 퍼졌다. 2012년 호주 멜버른에 설립된 ‘멜버른 진 컴퍼니’의 대표 제품으로 주니퍼베리를 메인으로 한 7가지 식물을 단일 증류 방식으로 만들어 보다 깊고 진한 풍미와 향을 지닌다.
디스틸러리 빌리자우 키르슈 Distillerie Willisau Kirsch
슈납스는 배, 자두, 체리 등의 과일로 만든 독일의 증류주다. 독일 인접국인 스위스에서 체리를 구리 증류기로 증류시켜 만든 이 제품은 기분 좋은 과일 향과 은은한 단맛을 지녔으며, 균형 잡힌 구조감과 긴 피니시를 지녔다.
나르디니 그라파 비앙카 Nardini Grappa Bianca
이탈리아의 그라파는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 부산물을 재발효시켜 증류한 술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증류소인
보르톨로 나르디니에서 만든 이 제품은 이중 증류 후 냉간 여과시켜 깨끗하면서도 강렬하다.
비 퓨어 B Pure
카샤사는 사탕수수 즙을 발효시켜 만든 브라질의 증류주다. 드링크 B는 전통적인 카샤사 제조 방식에 독창성을 더해 새로운 경험을 주는 브랜드. 구리 스틸에서 생산한 퓨어는 말 그대로 순수한 풍미의 술로, 칵테일 베이스로 최적이다.
러시안 스탠다드 Russian Standard
러시아의 프리미엄 보드카 브랜드로, 밀과 빙하 40km 밑에서 끌어올린 청정한 물로 생산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에 설치된 35m의 여과기를 통해 순수하면서도 가장 보드카다운 제품을 만들기로 유명하다.
모월 인 Mowall In
한국의 소주가 고려 말엽에 처음 전래되었을 때의 명칭은 ‘아라크’의 음차로 추정되는 ‘아라길’(阿剌吉)이었다. 현재 아라길의 전통은 증류식 소주들이 잇고 있다. 모월 양조장의 모월 인은 원주 쌀 토토미와 직접 빚은 누룩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