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케시 올드 & 뉴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ING & PHOTOGRAPHY BY Joanne Jeongwon Sin

마라케시 올드 & 뉴

Marrakech Gravity

아프리카, 유럽, 이슬람, 아랍의 문화가 얽히고설킨 도시, 모로코 마라케시. 마라케시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올드타운과 뉴타운의 대조를 감각적으로 느껴보는 일이다. 천고의 매력과 현대적인 분위기가 공존하는 마라케시로 떠나는 건축 디자인 여행.
  • WRITING & PHOTOGRAPHY BY Joanne Jeongwon Sin
2024년 05월 14일

천년의 역사가 펼쳐지는 마라케시의 과거, 메디나

비행기에서 내려 게이트로 가는 길에 따뜻한 습기가 코를 덮쳤다. 생애 처음 아프리카 대륙을 밟는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런던에서부터 입고 온 아우터를 벗어젖혔다. 이틀을 꼬박 검색해 결정한 리아드 다 베이자(Riad Dar Beija)에 체크인하자 매니저가 모로칸 민트 티, 생수 한 병, 쿠키와 숙박 기록서를 내밀었다. 리아드는 모로코식 가옥을 뜻하는데, 외부의 사교 활동과 가족 생활 간 분리를 추구하는 이슬람문화에 기반해 건물 외벽엔 작은 창문과 묵직한 대문만이 존재하고 안쪽은 중앙에 분수나 수영장을 중심으로 보통 2층에 걸쳐 공용 공간인 응접실, 주방, 서재 및 개별 침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건축 방식은 연평균 340일간 햇빛이 내리쬐는 도시에서 50℃까지 기온이 오르는 여름에는 내부 열기를 분산시키거나 식히고 겨울에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효과가 있다. 장식 소재로 타일, 대리석이 많이 사용되는 것도 같은 이유. 모로코식 건축양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바히아 궁전(Bahia Palace)은 로컬들이 입 모아 추천하는 곳이다. 마라케시는 건물 외벽 색 때문에 ‘붉은 도시(The Red City)’라 불린다. 12세기 알모하드 왕조가 진흙을 사용해 건축한 요새와 성벽이 그 시초였는데, 이후 외벽이 붉거나 황톳빛이어야 한다는 도시 건축법 아래 지금의 풍경을 갖추게 됐다. 종교와 사회의 제한 속에 자신의 개성을 발현하려는 욕구는 대문에 깃들었다. 덕분에 메디나의 골목을 누비며 대문을 구경하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마음에 들어요? 유대인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스타일인데….” 멜라(The Mellah) 지구에서 슬쩍 봐도 손품이 꽤 들었을 법한 나무 대문을 카메라로 찍자 지나가던 남자가 말을 던졌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응답하니 그는 그 골목에서 특이사항이 있는 모든 대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어느 집 앞에서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어린 소녀가 뛰어나오더니 촬영비를 달라고 종용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와 사회의 이면을 짐작케 하는 당혹감이 마라케시에 있는 며칠 동안 자주 번갈아 몰아쳤다.

개별 리아드는 특색 있는 대문으로 골목에 개성을 드러내고, 모로코의 대표 특산품인 러그는 마라케시의 붉은 외벽에 활기를 더한다. 수화물 무게 제한 따위는 잊고 어떻게든 내 집에 들이고 싶은 러그를 보며 잠시 황홀함을 맛봤다. 어설픈 중국어로 호객 행위를 하는 러그 숍 몇 군데를 지나 손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묵묵히 베틀을 짜고 있는 아틀리에 엘 바히아(Atelier el Bahia)를 발견했다. “모로코가 러그의 종주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비슷한 문화권, 기후를 공유하는 나라에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만들고 사용해왔죠. 모로코도 그중 하나고요. 다만 메이커들의 뛰어난 실력이 품질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명성을 누릴 수 있게 된 거죠.” 해이탐(Haytam)은 어머니 말리카(Malika)를 대신해 가게를 보는 중이었다. 전 세계에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고객들이 전화로 주문을 하기 때문에 특별히 온라인 스토어를 열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실제로 마라케시의 러그 및 카펫 가게 대부분 간판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구글 지도에 뜨는 러그가게는 소수에 불과하다. 모로칸 러그에 대한 궁금증은 다음 날 편집매장 섬 슬로콘셉트(Some Slow concept)에서 만난 수미아(Soumia)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모로코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집에서 러그나 카펫을 짜왔는데,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그리고 그 딸에게 전수하는 방식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대를 이어 직조하지 않는 경우가 생겼지만 지방에서는 여전히 흔한 일이라고. “모로칸 러그는 크게 7~8개 종류로 나눌 수 있어요. 그에 따라 고유의 디자인과 색상이 있고 직조 방식, 주 소재인 울이나 면을 처리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아틀라스산맥에서 온 러그는 두툼하고 기능적인 반면 사하라사막의 것은 상대적으로 얇고 실용적인 게 특징이죠.”


모던 마라케시의 중심, 구엘리즈와 시디가넴

마라케시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올드타운과 뉴타운의 대비를 감각적으로 느껴보는 일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이 도시의 랜드마크인 제마엘프나(Jemaa el-Fna) 광장에서는 쇠사슬에 묶인 원숭이, 피리 부는 남자를 따라 춤을 추는 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이빨과 틀니를 부려놓고 파는 노점 상인이 날것 그대로의 광장 문화를 연출하는 반면 길 건너의 구엘리즈(Gueliz)는 건물 외관은 물론 사람들의 옷차림, 태도에서마저 마라케시의 경제, 현대 문화 중심지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보 스튜디오(Bō Studio)와 편집매장 마리 바스티드 마라케시(Marie Bastide Marrakech)를 운영하고 있는 마리 바스티드는 프랑스에서 건축을 전공한 뒤 마라케시에 여행 왔다가 매료되어 약 30년 전 먼저 이 도시에 깃발을 꽂은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발레리 바코프스키(Valérie Barkowski)의 회사에서 인턴십을 거친 후 자리 잡았다. “모로코를 상징하는 모티브가 들어간 스카프를 모로코 여성들이 구매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인정받은 기분이죠.” 이방인이 로컬이 되려면 해당 문화뿐 아니라 언어를 익히는 일은 당연한 수순. 마리는 이곳에 살 결심을 굳히고 곧장 아랍어부터 배웠다. 프랑스 문화나 태도를 내세우기보다 모로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기반으로 로컬에 스며들었고, 모로코의 정체성을 세련되게 풀어내는 마라케시의 대표적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성장했다. “여기 산 지 10년이 되었지만 북아프리카, 유럽, 토착 민족인 베르베르(Berbère)족 문화가 혼재된 마라케시에서 여전히 매일 영감을 받아요. 아프리카 현대예술을 소개하는 최대 아트페어인 ‘1-54’가 열리는 도시이고, 아프리카 대륙에 있지만 유럽, 북미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고요.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협업할 기회도 갖습니다. 창의성과 그 잠재력이 무한하죠. 이브 생 로랑도 마라케시의 이런 면을 알아본 사람 중 하나였고요.”

이브는 모로코의 이웃 나라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공부하고 디올에서 아티스틱 디렉터로 일한 그는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é)를 만나고 이내 자신의 첫 컬렉션을 선보인다. 생 로랑은 컬렉션 디자인을 할 때마다 마라케시를 정기적으로 찾았고, 둘은 1980년 코발트블루가 시선을 압도하는 자르댕 마조렐(Jardin Majorelle)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모로칸 문화를 이해하려면 베르베르족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아랍인들이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슬람화 및 아랍화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이들의 신앙·문화·언어가 일부 소멸되거나 배제됐으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를 겪으며 그 영향력은 더욱 축소됐다. 그러나 마라케시에서 마주친 모든 베르베르인은 고유의 정체성과 독자성에 넘치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브와 피에르가 이를 놓쳤을 리 없다. 이 둘이 수집한 베르베르족의 오브제 600여 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베르베르 자르댕 마조렐 뮤지엄(Musée Berbère Jardin Majorelle)의 탄생 배경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완성된 것은 2017년 문을 연 ‘이브 생로랑 뮤지엄(Musée Yves Saint Laurent)’. 프랑스 기반의 스튜디오 KO가 설계한 곳으로, 직물 한 장이 바닥부터 위로 들어 올려지는 순간의 곡선을 테라코타 벽돌로 쌓아 묘사한 외관이 특히 인상적이다. 자르댕 마조렐, 베르베르 자르댕 마조렐 뮤지엄, 이브 생 로랑 뮤지엄 마라케시를 인수하고 새로 짓기까지 걸린 기간은 무려 40년. 다행히 피에르는 그들에게 영혼의 안식처였을 마라케시에 대한 찬가가 모두 완성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뮤지엄을 나와 택시를 타고 15분이면 뉴타운 시디가넴(Sidi Ghanem)에 닿는다. 서울로 치면 청계천, 을지로 같은 제조업 클러스터인데, 예술가·장인·디자이너가 모여 커뮤니티를 이루면서 재조명되고 있다. 메디나에 리아드 로즈메리(Riad Rosemary)를 운영 중인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로랑스 리나르트(Laurence Leenaert)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LRNCE의 쇼룸, 모로코산 리빙용품을 판매하는 차비 시크(Chabi Chic), 현대미술 및 디자인 갤러리 디앤코 아트 갤러리(D&CO Art Gallery) 등이 도매, 산업용품점과 뒤섞여 생경함을 자아내는, 구엘리즈와는 또 다른 흥미로운 지역이다.
짐을 챙기러 서둘러 리아드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마라케시를 내려다보고 싶어 루프톱으로 올라갔더니 조식 때 만난 독일인 여행객이 독서 중이었다. “15년간 때마다 마라케시에 왔어요. 이번엔 생일 기념이죠. 이 리아드에만 일곱 번째 묵어요. 신기하죠? 세상에 얼마나 여행할 곳이 많습니까. 파트너와 매번 다른 곳에 가보자 하지만 결국 종착지는 마라케시예요.” 알 듯 모를 듯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껄껄 웃었다. 문득 마리가 한 말이 스쳤다. “야외에서 와인을 마실 수 없는 것 빼곤 딱히 프랑스가 그립지 않아요. 마라케시에는 제가 사랑하고 원하는 모든 것이 있거든요.”

마라케시 여행을 위한 리스트

  • 바히아 궁전(Bahia Palace)

바히아는 ‘beautiful’이라는 뜻으로, 19세기 프랑스 건축가 폴 시누아르(Paul Sinoir)가 모로코 전통 양식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했다. 이후 프랑스 식민지 시절 공공기관으로, 독립 후에는 왕실 주거지로 사용되다가 관광지로 변모했다. 궁전 전체가 인테리어 뮤지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이국적인 타일 모자이크, 천장 패턴, 아치 장식, 정원 및 분수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주소 40000 Marrakesh

  • LRNCE

시디가넴에 있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로랑스 리나르트가 2013년 설립했으며, 세라믹·텍스타일·의류·러그 등을 판매한다. 로컬 재료를 사용해 모로칸 장인들이 만든 제품을 선보인다. 메디나에 있는 리아드 로즈메리에서는 LRNCE 제품을 실제로 사용해볼 수 있다.
주소 59 Rue Sidi Ghanem, Marrakesh 40000
홈페이지 lrnce.com

  • 아틀리에 엘 바히아(Atelier el Bahia)

바히아 궁전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유대인 지역인 멜라 지구. 1558년 처음 그 모습을 갖췄고, 2014년 복원 및 개조 사업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향신료, 직물, 보석 가게를 비롯해 오래된 목조 건물, 장인들이 일하는 주석 공방 등이 있고, 좁고 미로 같은 골목을 기웃거리며 유대인 문화를 둘러볼 수 있다. 도로변에 모로칸 러그 숍 아틀리에 엘 바히아가 자리한다.
주소 Rue Bahia Bab Mellah, Marrakesh 40000

  • 마리 바스티드 마라케시(Marie Bastide Marrakech)

마라케시 기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 바스티드가 운영하는 편집매장. 모로코의 자연, 문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디자인한 스카프, 향초, 포스터 등을 판매한다. 메디나에서 찾기 어려운 모던한 제품이나 기념품을 찾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주소 68 angle boulevard Zerktouni et, Rue Tariq Bnou Ziad, Marrakech 40000
홈페이지 www.bostudiomarrakech.com

  • 리아드 다 베이자(Riad Dar Beija)

전형적인 모로코식 리아드로, 1층 공용 공간에 수영장이 있고 대칭형 건축에 룸이 총 5개 있는 부티크 규모의 숙박 시설. 베르베르 러그, 앤티크 오브제, 아트워크 및 전통 문양이 들어간 조명 등이 공간에 모로칸 에센스를 더한다.
주소 37 Derb Manchoura, Marrakesh 40000
홈페이지 www.riaddarbeija.ma

  • 자르댕 마조렐, 베르베르 자르댕 마조렐 뮤지엄, 이브 생 로랑 뮤지엄

마라케시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이브 생 로랑과 그의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제가 1980년부터 인수하거나 새롭게 건축해 조성한 정원과 뮤지엄. 북아프리카 기후에 적합한 나무와 꽃, 선인장, 오렌지나무 곁을 거닐며 정원과 뮤지엄을 둘러볼 수 있다. 예약은 필수.
주소 Rue Yves St. Laurent, Marrakech 40090
홈페이지 www.museeyslmarrake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