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양평으로, 왼편에 북한강을 끼고 두물머리를 지나 문호리에 닿으면 만나는 프란로칼(Från Lokal). 메밀국수와 돈가스 맛집, 한방 카페가 있는 전형적인 관광지 거리에서 8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파인다이닝의 이름은 스웨덴어로 ‘지역으로부터’라는 의미다. 문자 그대로 지역에서 나는 식재료로 요리하는 팜투테이블(Farm-to-Table) 레스토랑이다. 프란로칼을 지키는 이는 엄현정 셰프다.
“팜투테이블은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미식 트렌드입니다. 대량생산 최저가, 단일 품종, 긴 유통기한, 획일화된 제품을 추구하는 문화에 반대하며 신선한 재료와 근거리 재배, 안전한 먹거리, 재래종 보존을 지향하죠. 프란로칼은 지역 농부들과 협업하고 지역의 제철 식재료를 활용해 시즌마다 새로운 음식을 선보이고 있어요.”
계절을 요리하는 셰프
엄현정 셰프는 2016년 처음 양평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막걸리를 사 들고 지역의 농부를 직접 찾아다니며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꾸준히 얼굴을 익히며 농부들과 계절마다 새로운 식재료를 나누고, 판매가 어려운 농산물은 레스토랑 식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직접 공용 밭을 가꾸고 농사를 지으며 농산물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고 요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덜 자란 작물이 기대 이상의 맛을 내는가 하면, 수확해서 얼마간 묵히며 맛을 들여야 하는 작물도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 수시로 먹어보고 가장 맛있는 때를 알게 되니 요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요리사, 그것도 팜투테이블 같은 자연주의적 요리를 실천하는 셰프가 될 생각은 없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회사에 다니던 엄현정 셰프는 호텔 레스토랑 인테리어에 관련된 공부를 더 하고 싶어 200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몇 달간 뉴욕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지적 갈증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시행착오 끝에 FCI(French Culinary Institute) 요리 학교에서 진행하던 레스토랑 매니지먼트 코스를 신청하고 돌아오는 길, 직원의 추천으로 한 셰프의 시연을 보게 됐다. 시연이 끝나자 그 길로 되돌아가 신청했던 매니지먼트 코스를 미루고 요리 클래스를 등록했다. 시연의 주인공은 팜투테이블의 선구자이자 미슐랭 스타를 받은 셰프, 농업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댄 바버(Dan Barber)였다.
“댄 바버의 시연을 보고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분자요리가 유행하고 테크닉적 요소가 부각되는 시기였어요. 하지만 댄 바버는 자연 본연의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부분이 오히려 제 마음을 건드렸죠. 저게 식문화의 본질이라면 내가 하려는 것은 수박 겉핥기 아닌가? 뭔가 중간부터 배우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결국 레스토랑을 제대로 기획하려면,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부터 알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하지만 요리사로 직업을 바꿀 생각은 없었어요. 요리 수업을 다 듣고, 그걸 바탕으로 다시 인테리어 디자인을 할 생각이었죠. 아직까지 요리사지만요.”
요리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하게 된 그는 맨해튼 미드타운에 위치한 스웨디시 레스토랑이자 미슐랭 2스타의 ‘아쿠아빗’을 거쳐 스타 셰프 그레이 쿤츠 사단에 들어가 ‘그레이즈’에서 수련한 뒤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유럽 요리 전문 레스토랑 ‘22서더맘’을 오픈했다. 그러다 2016년 양평으로 자리를 옮겨 경험과 취향을 접목한 프란로칼을 운영 중이다.
숨은 미식의 도시, 루앙프라방
이런 이력 때문이었을까. 엄현정 셰프에게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를 물었을 때 북유럽의 숨겨진 미식 도시도, 오래 머물렀던 뉴욕도 아닌 라오스 루앙프라방이란 대답이 돌아온 것은 퍽 의외였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한참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곳이에요.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특별하지 않은데 특별하달까요. 우선 아침저녁으로 흐느적거리며 걷는 게 좋았어요. 차 없이 하루 종일 걸어도 될 만큼 좁고 구경할 게 많은 것도 마음에 들고요. 날씨도 달라요.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타이 등 동남아의 다양한 나라와 라오스의 비엔티안과 방비엥에도 가봤지만, 루앙프라방은 그 어느 곳보다 습도가 낮고 서늘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죠. 프랑스 요리를 공부해서인지 프랑스령이 주는 익숙한 느낌도 편안했어요. 길 가다 만나는 레스토랑, 사원, 시장 곳곳에 특유의 여유로움과 고요함, 정겨움이 묻어 있었고요. 또 록 음악을 좋아했는데, 유토피아 카페를 처음 갔던 2015년만 하더라도 그곳에선 록 음악이 주로 나왔거든요. 하루 종일 누워 음악을 들었죠.”
미식 역시 그녀의 취향과 잘 맞았다. 동남아는 나라마다 음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소스류가 많고 자극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루앙프라방에는 그가 선호하는 슴슴하고 좀 더 자연스러운 음식이 존재했다. 내륙 지방인 덕분에 신선한 채소와 허브를 이용한 요리가 다양하고, 발효 음식이 많다는 것도 놀라웠다. 배추, 무, 당근 등 채소를 소금물에 절여 발효하는 쏨팍(Som Pak)도 마찬가지. 한국의 김치와 유사한 방식이지만, 양념이 덜 복잡하고 소금과 물만으로 발효하는 경우가 많다. 레몬그라스와 바질로 양념한 생선을 볶거나 튀기지 않고 바나나 잎으로 싼 뒤 쪄서 먹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은 레시피였다. 이곳을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쿠킹 클래스에도 참여했다.
“셰프로 일하던 시기에 참여한 거라 큰 기대를 하진 않았어요. 그저 호기심이 컸죠. 신선한 채소, 아침에 잡은 민물고기, 부위별로 구별해 둔 생고기를 흥미롭게 구경했어요. 직업 특성상 인근에서 어떤 식재료가 나는지, 어떻게 보관하고 판매하는지 유심히 보게 되더군요.”
고향의 맛을 닮은 인생 쌀국수
무엇보다 엄현정 셰프를 사로잡은 음식은 우연히 만난 쌀국수 한 그릇이었다. 여행에서 호텔보다 에어비앤비를 주로 이용하는 그는 메인 로드와 다소 떨어진 곳에 묵었다. 첫날 저녁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집인지 식당인지 모를 정도로 소박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오토바이 기사들이 모여 쌀국수를 먹고 있지 않겠어요? 한국의 기사식당이 연상되면서 본능적으로 맛집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식탁 한편에 앉아 같은 걸 달라고 했어요. 맑은 베이스의 고기 국물인데 깊은 감칠맛이 났습니다. 직접 만든 면도 훌륭했죠. 눈 깜짝할 새 한 그릇을 비웠어요. 저는 아침에 잘 못 일어나는 사람인데,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먹고 싶어서 일찍 깼을 정도예요. 그곳에 머무는 내내 매일 그 쌀국수를 먹었어요. 자극적인 요소 없이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은 먹을수록 감탄스러웠습니다. 마치 함흥냉면 사이에서 평양냉면을 찾은 기분이었죠.”
엄현정 셰프는 외가가 함경도 출신인 덕분에 어릴 적부터 이북 음식과 가까웠다. 그 때문에 맵거나 짜지 않고 슴슴한 쌀국수가 친숙하게 다가왔다. 고기 국물을 베이스로 하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외국에서 고향의 음식이라도 맛본 듯 익숙하고 반가웠다. 3년 뒤 엄현정 셰프는 루앙프라방을 다시 찾았다. 도착하자마자 그 가게로 직행했다. 주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3년 전에 여기서 이걸 먹었다”고 말했다. 웃으며 내어준 쌀국수 한 그릇은 그때와 똑같은 맛을 담고 있었다. 그제야 ‘루앙프라방에 다시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유럽 가정식을 선보이던 22서더맘에서도, 팜투테이블 프란로칼에서도 엄현정 셰프는 누군가의 음식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결합해 재해석해왔다. 라오스를 추억하며 음식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가까이 날아가 먹은 쌀국수를 생각하며 오리 다릿살을 다져 넣은 토르텔리니에 맑은 국물을 부었고, 바나나 잎으로 감싼 생선찜을 떠올리며 레몬그라스로 마리네이드한 농어를 찜기에 올렸다. 밭에서 직접 수확해 온 식재료가 가득한 그의 창의적인 식탁에선 루앙프라방의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스팀 피시와 토종 쌀 요리
Steam Fish with Native Rice
재료
농어, 큐어링 리퀴드(물 250g, 소금 8g, 설탕 8g, 레몬그라스 약간, 생강 약간, 고수잎 약간), 토종 쌀 적당량, 레몬그라스 1줄기, 카피르 라임잎 1/2, 소금 약간, 마늘 1/2쪽, 샬롯·애호박·당근·버터·배춧잎·아스파라거스·고수잎·시솔트·생크림·후추·미니 애호박·베이비 당근·세모가사리·베이비 루콜라 적당량
1 농어는 뼈를 발라내어 물, 소금, 설탕, 레몬그라스, 생강, 고수잎을 넣은 큐어링 리퀴드에 45분 동안 염지한다.
2 토종 쌀은 물에 불린 후 레몬그라스 1줄기, 카피르 라임잎 1/2, 소금을 넣고 밥을 한다.
3 마늘, 샬롯, 애호박, 당근을 버터에 볶아서 밥과 섞은 후 데친 배춧잎에 감싸 배추롤을 만든다.
4 아스파라거스를 데친 다음 고수잎을 아스파라거스의 10% 정도 넣은 뒤 퓌레로 만든다.
5 농어는 배춧잎과 고수잎을 깐 찜기에 넣어 찌고 시솔트를 뿌려 간을 더한다.
6 아스파라거스 퓌레에 10% 정도의 생크림을 더하고 데운 뒤 소금, 후추로 간한다.
7 미니 애호박, 베이비 당근을 구워 가니시로 준비한다.
8 세모가사리를 얼음물에 불려두고 베이비 루콜라도 가니시로 준비한다.
9 접시 위에 아스파라거스 퓌레를 올리고, 배추롤, 찐 농어, 미니 애호박, 베이비 당근을 차례로 담아낸다.
토르텔리니 인 브로도
Tortellini in Brodo
재료
오리 다리 2개, 염지 재료(샬롯 2개, 마늘 3쪽, 파슬리·타임·고수· 통후추·소금 약간씩), 달걀노른자 2개, 파스타 밀가루 38g, 세몰리나 12g, 엑스트라버진 올리브 오일·양파·애호박·소금· 후춧가루·레몬그라스·생강·고수씨 약간씩
1 오리 다리는 소금을 뿌려 두고 염지 재료를 푸드 프로세서에 간다.
2 간 염지 재료를 오리 다리에 골고루 발라 냉장고에서 하루 동안 숙성한다.
3 염지 재료를 닦아낸 후 오리 지방과 함께 오븐용 그릇에 담아 105℃에서 4시간 반~6시간가량 콩피(시럽이나 기름에 식자재를 넣고 오랫동안 끓이는 기법)한다.
4 콩피한 오리 다릿살만 발라내 만두소를 만드는 것처럼 다져준다.
5 달걀노른자, 파스타 밀가루, 세몰리나, 소금, 엑스트라버진 올리브 오일을 약간 넣고 반죽한 뒤 1~2시간 숙성한다.
6 제면기로 면을 뽑아낸다.
7 양파와 애호박을 작게 깍둑썰기 한 다음 소금, 후추 간만 해서 색이 나지 않게 볶아준다.
8 콩피한 오리 다릿살과 7을 2:1로 섞어 속을 준비한다.
9 8을 넣고 토르텔리니를 만든다.
10 기름기를 완벽히 제거한 닭육수 베이스에 레몬그라스와 생강, 고수씨를 담은 주머니를 넣고 끓여 이국적인 향을 가미한 국물을 낸다.
11 토르텔리니는 끓는물에 익혀 볼에 담고. 애호박 볶음을 중앙에 올린 뒤 10의 맑은 국물을 부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