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는 즐거움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RYU JIN
  • ILLUSTRATION BY JOE SUNGHEUM

잊히는 즐거움

Joy of Missing Out

2025년 여행 트렌드가 조모(JOMO, Joy Of Missing Out)라는 기사를 봤을 때 쾌재를 불렀다. 십수 년 동안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의 노예가 되어 먹고 살았던 나는 그 누구보다 ‘놓칠 게 없는 여행’, ‘사라지는 것의 유익함’에 대해 할 말이 많다.
  • written by RYU JIN
  • ILLUSTRATION BY JOE SUNGHEUM
2025년 01월 18일

“어제 오후 쿠스코를 떠나 안데스 고원을 품은 푸에르토말도나도에 면한 탐보파타국립자연보호지구에 왔다. 숲의 꼭대기를 잇는 산책로, 캐노피 탐험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모기 퇴치 스프레이와 땀에 전 몸을 씻었다. 테라스 기둥에 매단 해먹에 몸을 던진 후 나무 아래에서 주워 온 자몽의 과육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져간 책을 읽다가 집중력이 닳으면 난간 밖으로 보이는 아마존의 지류, 마드레데디오스강의 느리게 일렁이는 물살, 금빛 물비늘을 감상하며 멍을 때렸다. 책 한 권을 단숨에 해치우고, 읽을 게 없어 다음 날 또 보는 경험을 한 게 언제였나? 필드 가이드 이반이 ‘운이 좋으면 나무늘보를 보거나 재규어의 몸내를 맡을 수 있다’고 귀띔해준 야밤 트레킹까진 5시간이나 남았다. 지금 이 야생의 정글에 완벽히 고립되어 있으며, 앞으로 나흘이나 이렇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숙소 어디에도 바깥과 연결할 방법이 없어서 족쇄 같은 각종 연락을 본의 아니게 씹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플랫폼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숨 막히는 기분이 들 때마다 수년 전에 쓴 이 일기를 꺼내 읽는다. 내 인생에서 집과 가장 먼 곳으로 날아가 더없이 외롭고 황홀한 시간을 보냈던 때다. 이 꿈같은 고립을 겪기 전에 나는 ‘포모’ 세계의 빛나는 주자였다. 새로운 것, 신선한 것, 낯선 것 중 유행할 만한 것을 잘 찾아낼수록 내 가치가 올라가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간과 웅장한 지출을 동반하는 여행에서 뭔가를 놓친 것 같은 두려움은 극으로 치닫는다. 간 곳, 찾아낸 곳에 질문(“어머, 여긴 어디야?”), 찬사(“넌 어쩜 이렇게 좋은 데를 아는 거야?”)가 따르지 않으면 그 여정은 값어치가 없는 것으로 팽개쳤다.
보고 먹고 마시고 살 것이 아주 많은 도시들, 이를테면 런던이나 방콕, 뉴욕, 도쿄 같은 도시를 휴가지로 찾지 않는 건 더 이상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다. 방콕 엠콰티어 쇼핑몰 지하 1층 슈퍼마켓에서 내일부터 바깥 세계 출입을 금지 당한 사람처럼 필요 없는 온갖 물건을 쓸어 담는 나 자신을 자각했을 때 이 도파민에 전 뇌를 씻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뒤로 아무것도 없는 곳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스마트폰이 무용해지는 곳으로. 불랄라 스테이션은 그중 난도가 꽤 높은 목적지다. 보이는 건 광물과 광야, 살아 있는 건 매가리 없이 나부끼는 마른 잡초뿐인 서호주 오지 한복판에 들어선 이곳은 양털 깎는 일꾼, 스톡맨이 머물던 집을 여행자 숙소로 개조한 공간이다. 얼마나 오지냐고 묻는 이에겐 전기 용량조차 미미해서 저녁 식사를 하자마자 불을 끄고 자야 하는 곳이란 대답을 건넨다. 하루는 태양열로 데운 온수 한 양동이로 샤워를 한 후 젖은 머리칼 때문에 너무 추워 몰래 헤어드라이어를 썼다가 함께 머문 사람들의 객실 전등이 전부 꺼지는 사태도 있었다. 그런데도 불랄라를 앞세우는 건 황야의 황홀한 밤하늘 때문이다. 도시에선 목을 뒤로 잔뜩 젖혀야 하늘을 시야에 담을 수 있지만 사방을 가로막는 것이 하나도 없는 오지에선 하늘이 정면에, 파사드로 펼쳐진다. 그 크고 많은 별이 땅을 뒤덮을 기세로 쏟아져 내렸던 밤을, 그 별에 파묻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기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해가 지면 우주가 되는 불랄라에서 나는 지긋지긋한 자아를 시시때때로 망각하며 텅 빈 시간을 보냈다.

남과 세계로부터 잊히고 싶을 땐 인간이란 영장류가 미천해지는 곳으로 가면 된다. (과장을 조금 섞어) 코끼리가 길고양이만큼 빈번히 출현하는 스리랑카의 얄라국립공원과 코끼리가 오줌 싸는 소리를 들으며 아침 조식을 먹을 수 있는 남아공 크루거국립공원은 거대한 4륜구동 자동차에 앉아 엉덩이를 들썩이며 대포 같은 렌즈를 들이대는 관광객 무리를 심드렁하게 무시하는 야생 짐승들의 천국이다. 동물들을 찾아 헤매는 그 차엔 대부분 창문도, 창칼도 없다. 그게 안전의식이 부재한 안일함이 아니라 무수한 경험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을, 사흘 내내 사자의 분변을 쫓아 달렸던 남아공에서 깨달았다. 기린, 얼룩말, 하마 등을 마주칠 때마다 호들갑 떠는 인간들과 달리 배부른 짐승들은 우리에게 하등 관심이 없다. 열 명 남짓한 구경꾼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바닥에 드러누워 사타구니나 핥다가 선잠에 빠진 사자 앞에서 나는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묘한 쾌감을 느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그날 마주한 사자의 무관심을 영양제처럼 꺼내 곱씹는다.

놓칠 게 하나도 없어서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는 곳, 존재감이 이름 없는 풀처럼 작아지는 곳으로 떠나는 것도 좋지만 사실 ‘조모’를 누리기에 가장 좋은 여정은 아무데도 가지 않는 것이다. 이제껏 갖은 호들갑을 떨며 “여기에 가봐” “저기는 어때?” 해놓고, 집에 있으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고? 당신의 배신감을 십분 이해한다. 자기는 세계 곳곳을 누벼 놓고 떠나지 말라는 메세지의 책을 쓴 여행가, 피코 아이어에게 나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의 저서 <여행하지 않을 자유>에 나오는 이슬람 우화를 보면 분이 좀 누그러들 것이다. 자기 집에서 열쇠를 잃어버린 한 남자가 밖이 더 환하다는 이유로 집을 나가 열쇠를 찾으러 다녔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아주 자주, 무언가를 잊거나 잃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는가? 그게 나라면 나를 잃어버린 장소에 머물자. 집이나 일상 말이다. 조모의 궁극적인 목적은 회피가 아니라 잃은 후 찾는 것이다. 그런 건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고, 어떤 말과 행동에도 반응할 필요가 없으며, 얘기하는 사람만 있고 듣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대화에 끼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완벽히 혼자인 시간에 이뤄진다. 스마트폰을 끌 용기, 내 허리께에 엉덩이를 꼭 붙인 채 말 없이 함께 있어주는 반려동물이 있다면 더 완벽할 것이다.

세상에서 잊히기 좋은 곳

호주 태즈메이니아 크래들 마운틴
태즈메이니아는 영국에서 지독한 죄를 지은 죄수들을 유배 보낸 섬이었다. 고립에 더없이 이상적인 곳이란 뜻이다.
물론 지금은 아름답고, 맛있는 여행지다. 크래들 마운틴에 있는 페퍼스 크래들 마운틴 로지의 객실에선 와이파이가 안 터진다. 일부러 막아놨다. 거기에서 할 일이란 왈라비가 사과 먹는 걸 구경하거나 웜뱃이 진짜 네모난 똥을 싸는지 확인하러 다니는 일뿐이다.

페루 탐보파타국립공원
아마존은 모험심 가득한 베테랑 여행자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탐보파타국립공원 안에 있는 올 인클루시브 리조트 잉카테라 레세르바 아마조니카에선 누구나 정글왕 김병만처럼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아침이면 하루살이 사체로 가득한 수건, 모기약에 몸을 절이는 것만 괜찮다면 말이다.

캐나다 옐로나이프
오로라가 설원을 뒤덮는 겨울의 옐로나이프. 여기서 할 일이란 오로라를 기다리고, 오로라를 보는 일뿐이다.
실제 온도는 영하 25℃, 체감 온도는 영하 40℃에 육박하는 혹한에, 오후 2시가 넘으면 깜깜해지기 때문에 나가서 돌아다니기도 여의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