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racha



2 토랏차에선 에리 씨가 직접 공수한 온두라스의 공예품을 살 수 있다.
3 모든 커피는 에리 씨가 직접 브루잉해 제공한다.


일본 에히메현 마쓰야마 도심을 벗어난 지 약 1시간. 오른편으론 세토우치 해안이 끝없이 펼쳐졌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어디선가 멈춰섰다. 새벽부터 쏟아지는 폭우가 원망스럽던 참이었다. 비를 가르며 통나무로 지은 집으로 뛰어들어 갔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습기 가득한 바닷가에서, 순식간에 선명하면서도 포근한 실내가 펼쳐졌다. 향긋한 커피 향이 넘실대는 이곳의 이름은 ‘가토랏차’. “오하요 고자이마스(おはようございます)!” 주인장 이마이 에리(今井英里) 씨가 마치 오랜만에 만난 둘도 없는 친구처럼 인사를 건넸다. 2013년부터 2년간 남미 온두라스에 머물며 교육 봉사를 실천한 에리 씨는 그곳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 좀 더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게 온두라스 커피다. “원두를 일본으로 가져와 소개하고 판매하고 싶었어요. 농장에 가 생산자를 만나고 원두를 사면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잖아요. 그때부터 온두라스의 커피를 현지에서 본격적으로 배웠죠.” 이후 이곳에 카페를 내고 1년마다 한번씩 온두라스에 가 원두 생산자를 만난다. 각 원두마다 생산자의 얼굴과 소개, 맛에 대해 쓴 카드를 직접 만들어 손님들에게 소개한다.
에리 씨는 최근 ‘행복한 아침 식사’라는 테마로 로컬 생산자들이 재배한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맛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도 이 조식을 맛보기 위해서다. 비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현지 생산자와 함께 식사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교류하는 특별한 이벤트다. 식사 후엔 생산자들의 농장을 찾아가 직접 보고 체험하거나, 날씨가 좋은 날엔 인근 명소로 드라이브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이미 지역 내에선 입소문을 타고 호평받는 중인데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찾아온 일본 현지인들로 북적거렸다.
에리 씨가 브루잉으로 내린 온두라스 커피, 이시다다미 빵집의 유코 씨가 유기농 밀을 사용해 돌가마에 구운 수제 빵, 농부 미오 씨의 허브 농장에서 따온 민트로 만든 소금, 오즈의 가토 농장에서 얻어온 달콤한 완숙 토마토로 만든 소스와 햇양파가 들어간 수프 등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 에리 씨는 직접 접시 위의 주인공을 소개하고, 식재료에 깃든 사연을 이야기했다. 모두 함께 “이타다키마스(いただきます)!”를 외치고 스푼을 들었다. 첫 술에 퍼 올린 양파 수프는 부드럽고 달큰했다. 천천히 끓여낸 양파의 깊은 단맛과 고소한 버터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뱃속을 따뜻하게 데웠다. 살짝 구운 수제 빵 위에 올린 완숙 토마토 소스는 과육의 단맛이 진하게 느껴졌고, 직접 빻은 허브 페이스트가 입안을 향긋하게 감쌌다. 그저 맛있기만 한 아침 식사가 아니라 내가 먹는 식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듣는, 이야기를 먹는 시간이었다. 바깥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커피 향과 웃음소리, 습기를 머금은 유리창 너머의 회색빛 풍경이 오히려 이곳의 따뜻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Komorebi



2 수줍음이 많은 남바 아키히로 씨와 아내 남바 게이코 씨.
3 커다란 창으로 나뭇잎이 일렁이는 고모레비의 실내 전경.


바닷가 마을을 뒤로하고 동쪽으로 향했다. 세토우치 해안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도로는 점점 구불구불해졌다. 차창 밖으론 나무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커브를 돌 때마다 녹색이 조금씩 짙어진다. 어느새 날이 개었다. 도로 위로 흐르는 나뭇잎 그림자에 눈길이 머물 때쯤, 나무로 지은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의 이름은 ‘고모레비’.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라는 의미다. 진한 나무 냄새를 좇아 문을 열고 들어섰다. 높은 천장과 큼직한 창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따뜻함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이 집은 남바 아키히로(難波昭宏) 씨가 17년 전 아내 남바 게이코(難波敬子) 씨와 함께 손수 지은 집이자 레스토랑이다. “도쿄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했어요. 언제부턴가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죠. 도시 생활에 지쳤던 것일지도 몰라요. 목공 일을 하는 아내의 부모님 집 아래 터를 잡고 함께 살기로 했죠. 이미 손수 집을 짓고 살고 계신 장인어른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요리사 아키히로 씨는 목수인 가족들과 함께 집을 지었다. 장인어른과 처남은 고모레비의 테이블에 문양을 새기고, 조명 갓을 깎고, 손님이 앉을 의자의 각도까지 조율했다. 이 외에도 작업한 식기류와 모든 나무 제품은 고모레비 아래쪽의 쇼룸에 별도로 진열돼 있는데, 누구나 관람하고 구입할 수도 있다.
고모레비의 메뉴는 단 하나, 제철 재료로 구성한 정성스러운 런치 코스다. 먼저 전채 모둠 플레이트가 나왔다. 수제 소시지와 푹 익혀 으깬 돼지고기로 만든 프랑스식 스프레드 리예트, 살짝 절인 우엉과 완두콩, 루콜라를 곁들인 닭가슴살, 데친 봄 고사리를 매리네이트한 요리, 새우를 더한 마카로니 샐러드, 그리고 부드럽게 간 흰살 생선 무스까지. 소박한 그릇 위에 크기도 맛도 다른 일곱 가지가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음식마다 식감이 달랐고 저마다 감칠맛이 은은히 퍼졌다. 어느 것 하나 튀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이 또렷했다.
이어 나온 양파 포타주는 무척 부드럽고 맑았다. 혀끝에 감도는 우유 향이 오래 남았다. 포타주의 온기가 손끝까지 퍼질 즈음, 메인 요리가 나왔다. 에히메의 흑우, 하나가우를 다져 만든 햄버그스테이크다. 숟가락으로 자르자 뜨끈한 육즙이 흘렀다. 데미글라스 소스는 묵직하면서도 산뜻해 부드러운 고기와 어우러졌다. 다른 테이블에도 메인인 돼지 등심 치즈구이, 닭다리살 올리브 갈릭 소스, 참돔과 리틀 리프를 곁들인 화이트와인 크림소스 등이 놓여 있었다. 식사의 마무리인 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였을 때쯤엔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빛이 창문 사이로 쏟아졌다. 천천히 움직이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테이블 위를 가로질렀다. ‘고모레비’라는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이 집이 지금껏 품어온 모든 시간이 그 단어 하나에 담겨 있었다.
Sugiura Koubow & Gakutogei Nanabu



2 부부는 커다란 다이닝 공간을 만들어 언제든 이곳으로 친구들을 초대한다.
3 요리는 아야 씨의 진두지휘 하에 만든다.


바닷가에서 아침을 보내고 숲속 나무 집에서 오후 시간을 즐겼다. 해 질 무렵 마쓰야마 도심 한복판으로 돌아왔다. 발걸음은 가스가초로 향했다. 독립 서점, 소규모 전시관, 디자이너의 편집숍 등 감각적인 가게가 모여 있는 동네다. 그중 한 곳이자 저녁 식사의 호스트가 있는 나나부 갤러리에 들어섰다. 이곳은 도예가 스기우라 후미노리 (杉浦史典) 씨의 작업실 겸 전시장이다. 거친 콘크리트 벽과 노출 천장이 그대로 살아 있고, 매트한 표면과 담담한 표정의 도자 인형들이 단정한 실루엣으로 자리했다. 사전 예약만 한다면 누구나 방문해 작품을 감상하고 구입할 수 있다. 후미노리 씨는 짧은 인사와 함께 우리를 옆 건물로 안내했다. 꼭대기 층의 문을 열자 주방과 거실이 연결된 다이닝룸에서 한 여성이 밝은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아내이자 도예가 스기우라 아야(杉浦綾) 씨다. 그는 도베초에 있는 스기우라 공방에서 에히메현의 전통 도자기인 도베야키를 빚는 예술가. 일상에 기분 좋은 감성을 더하는 식기를 주로 만든다. 손으로 잘라 붙인 듯한 유기적인 실루엣과 밝고 경쾌한 문양이 특징인데, 구름이나 도트, 푸른 염색이 자연스럽게 번지는 기법을 자주 쓴다. 얇고 가벼우면서도 손에 감기는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는 그릇을 만드는 일이 요리를 준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오늘 식탁도 바로 그런 철학이 담긴 접시 위에 차려질 예정이다. “누군가의 식사를 상상하며 식기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레 요리를 좋아하게 됐죠. 요즘엔 도자기보다 요리가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요.” 아야 씨가 호쾌하게 말했다. 우리는 어느새 부부의 곁에 붙어 채소를 손질했다. 식탁에 음식이 하나씩 놓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오래도록 동경해온 드라마 <심야식당>의 손님이 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모락모락 김이 나는 도미밥이었다. 에히메의 명물답게 밥알 사이사이에 은은하게 간이 밴 흰살이 부드럽게 섞여 있다. 첫 숟가락을 입에 넣자 담백한 감칠맛과 쫀득한 찰기가 동시에 퍼진다. 곁들여진 쓰케모노는 시큼하면서도 단맛이 있는 오이와 당근 누카즈케(ぬか漬け, 쌀겨를 이용한 일본 전통 발효 절임). 채소 본연의 아삭함을 살리면서 발효된 고소한 풍미가 입맛을 돋운다. 여름 채소 절임은 미묘한 단맛과 산뜻한 짠맛이 교차해 씹을수록 깔끔했다. 마지막으로 돼지고기와 뿌리채소를 푹 끓인 된장국이 놓였다. 고기와 곤약, 무, 당근이 국물 속에서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첫 숟갈을 떠서 입에 넣는 순간, 깊이 있는 맛의 진한 국물과 된장의 짭짤한 감칠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 집의 식탁은 조용할 틈이 없다. 접시가 바뀔 때마다 이야기가 쏟아졌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쉬지 않고 농담을 던지고 크게 웃는 아내와 그의 곁을 잔잔하게 지키는 남편. 음식과 이야기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하루의 마무리를 함께 빚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