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촌의 조용한 골목길 안, 유난히 노란 간판의 가게로 들어섰다. 커다란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공간이 펼쳐졌다. 불규칙한 라인의 커다란 글라스 바스켓과 탐스러운 포도 모양의 오브제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제작 연도가 궁금해지는 투박하면서도 감성적인 시계와 조명을 지나자,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색이 바뀌는 신비로운 물건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핸드 페인팅 오브제, 누군가 정성스럽게 관리한 흔적이 있는 트링켓 박스, 색 바랜 낡은 가구 위에 가득한 액세서리, 손으로 두드린 듯 울퉁불퉁한 표면의 브라스 소품, 손잡이 하나에도 과감한 곡선이 들어간 화병까지 쉽게 보기 힘든 진귀하고 예쁜 물건으로 가득하다.
시간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색과 질감은 저마다 다르지만, 동시에 일관된 감도가 느껴지는 이곳은 빈티지 숍 ‘테이크 마이 옐로우’다. 지난해 여름 서촌에 문을 연 뒤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감각적인 물건들로 유명한 편집숍이다. 전 세계를 다니며 비슷한 취향을 한데 모은 주인공은 결혼 3년 차 부부 이경은, 이진희 씨다. 아내 경은 씨는 영화와 광고 등에서 미술감독을, 남편 진희 씨는 10대 시절부터 태국에 거주하며 방콕을 거점으로 광고 영상 분야 PD로 일해왔다. 두 사람은 방콕에서 일로 만났다. 어릴 적부터 모으는 것을 좋아한 경은 씨는 한 시간이 넘도록 오브제 하나를 들여다보는 자신을 천천히 기다려주는 진희 씨를 보고 결혼을 결심했다.
경은 씨가 빈티지의 세계에 빠진 것은 10년 전, 미술팀에서 일하며 독일 헤이코(Heico)의 핸드 페인팅 토끼 조명을 처음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때는 너무 갖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손에 넣기 어려웠죠. 언젠가 꼭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물건이었어요. 그런데 몇 년 후 운명처럼 유럽의 한 빈티지 마켓에서 다시 만났어요. 오래 기다린 만큼 더 큰 애정이 생겼죠. 하나의 물건이 어딘가에서 추억을 쌓다가 나에게 오는 과정이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스토리가 담긴 물건, 감정이입이 되는 피겨, 빛을 담는 유리 같은 아이템이 일상에서도 제 감각을 자극하더라고요. 그렇게 ‘풍경을 만들 수 있는 물건’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어요.” 경은 씨의 시작과 꿈을 상징하는 헤이코의 토끼 조명은 지금도 여전히 테이크 마이 옐로우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진희 씨의 경우엔 아내의 취미에 물들어버렸다. 아내가 수집하는 것을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본인도 컬렉션에 빠지게 됐다. 최근에는 해외 출장이 잦은 진희 씨가 수집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촬영이 끝난 후나 여유 시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구글맵에 저장해둔 중고 가게들을 탐색하러 나선다. 예쁜 물건이 놓인 가게를 넓게 찍어 경은 씨에게 보내면, 사야 할 물건을 체크해서 다시 보내는 식이다. 시차가 있는 나라로 출장을 가더라도 경은 씨는 남편이 빈티지 마켓에 가는 시간에는 늘 깨어 있다.
‘컬렉션’은 둘의 여행 일정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함께 여행하며 물건을 살 땐 그 나라의 공기와 빛, 사람들의 표정까지 가져오는 기분이에요. 같은 장소를 걸어도 서로 다른 물건에 눈이 가기 때문에 한 공간을 두 번 보는 것처럼 풍요로워져요.”(진희) 경은 씨는 즉흥적으로 물건을 고르는 편이고 진희 씨는 구조나 디테일, 희소성을 눈여겨본다. 가끔 한 오브제를 두고 “이건 내가 먼저 봤다”며 장난스레 다투기도 한다. 그렇게 함께 고른 물건은 그 순간의 분위기와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어 시간이 지나도 추억으로 남는다.



이야기를 파는 가게
테이크 마이 옐로우를 처음 열게 된 계기는 다소 즉흥적이었다. 원래 진희 씨의 사무실 겸 대관 스튜디오로 쓰던 공간이었지만, 친한 촬영감독의 조언에 따라 집에 있던 빈티지 소품들을 꺼내 전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손님이 하나둘 찾아오면서 본격적인 편집숍으로 성장했다. 초반에는 빈티지 조명이 중심이었지만, 점점 범위가 확장되어 지금은 가구, 의류, 국내 작가들의 작품까지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촬영 협찬으로 인연이 닿은 국내 공예 작가들의 물건을 직접 써본 뒤 셀렉트해 들여오기도 한다. 특히 애착이 가는 디자인은 독일의 괴벨(Goebel)이나 하겐레나커(Hagen-Renaker), 그리고 미국의 레녹스(Lenox) 같은 브랜드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글라스 바스켓이나 손잡이 잔은 무라노풍, 프랑스산 유리 제품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런 물건들을 손에 얻기 위해 주로 유럽, 그중에서도 헝가리에 자주 간다. “부다페스트의 작은 골동품 가게를 좋아해요. 유럽에서도 물가가 저렴한 편이라 프랑스나 독일에서 보기 힘든 유럽 빈티지 소품을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거든요. 고급 도자기부터 장난감, 유리잔, 조명까지 다양하고 가게마다 분위기가 정말 달라요. 관광객이 잘 가지 않는 동네에서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마치 시간 여행 하는 기분도 들어요.”(진희)
진희 씨가 오래 살았던 방콕도 이들의 주요 사냥터다. 방콕 차뚜착 마켓 안쪽의 빈티지 전문관은 태국 로컬부터 일본, 미국, 유럽, 중동 제품까지 온갖 오브제가 섞여 있다. 색감도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전체적으로 일관된 빈티지 감도를 갖고 있는 게 특징이다. 예상치 못한 조합에서 영감을 받는 경우도 많다. 문화적으로 섞여 있다는 점에서 이태원의 빈티지 거리와 비슷한 분위기다. 방콕의 일본인 거주 지역에 있는 일본 빈티지 마켓도 자주 찾는다. “요즘 방콕은 로컬 셀렉트 숍도 굉장히 잘 꾸며져 있어요. 특히 빈티지를 큐레이션해 파는 곳은 동남아만의 기후, 질감, 채도 같은 게 그대로 묻어나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이 많죠. 약간 바랜 듯한 유리, 대나무 재질, 레트로 타이포가 들어간 패키지 등은 그 지역의 무드를 담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요.”(경은)
이경은, 이진희 씨가 꾸며가는 테이크 마이 옐로우는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펼쳐놓고 기록할 수 있는 ‘작은 수집의 기록실’이다. “손님이 물건을 사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보게 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모은다는 건 결국 나를 아끼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공간 안에서는 누구든 자기만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