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방콕행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K는 2주 전, 일방적이면서도 어이없는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것도 문자로. “전형적인 한국 남자에게 어울리는 전형적인 한국 여자를 만나.” 차라리 못생겨서 싫다고 하지…. K는 전형적인 한국 여자가 보낼 법한 이별 문자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비전형적인 한국 남자란 무엇인가? 전형적인 외국 남자?
사팍탁신역을 빠져나온 K는 짜오프라야강 변에 자리한 사톤 선착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카오산 로드로 향하는 배가 그곳에서 출발했다. 오렌지색 깃발을 휘날리는 익스프레스 보트.
K는 방콕행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부터 오로지 야간 일정만 생각했다. K에겐 ‘밤의 방콕’이 진짜 방콕이었다. 술과 땀과 침의 경계를 섞고 허물어뜨리는 환락의 공간. ‘밤의 방콕’ 중심 중 하나에 카오산 로드가 있었다. 전 세계 여행자들의 성지. 너그럽고, 쾌활하고, 누구나 환대하는 공간. 천사들이 벌인 술판이자 난장판.(방콕은 ‘천사들의 도시’라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일렀다. 카오산 로드는 자정이 지나며 절정에 이른다.
K는 짜오프라야강을 따라 조금 걸었다. 쓰라린 마음을 다독이는 데 강가 산책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으니까. 짜오프라야강은 넓고, 짙고, 가늠할 수 없이 수심이 깊어 보였다. 흙빛을 띤 물의 정령이 살 것 같은 드넓은 강. K는 점점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어때서? 뭐? 전형적인 한국 남자?
K는 허리를 숙여 짜오프라야강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이비색 반바지에 흰색 셔츠, 그리고 흰색 스니커즈. 형편없진 않은 것 같은데, 짙은 물빛 때문에 뭉툭하고 평범해 보였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기분상으론) 전형적인 한국 남자의 모습 같았다.
“Watch Out!(조심해!)”
K는 화들짝 놀란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이마에 끼고 있는 덩치 큰 백인 남자가 강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K에게 장난을 친 것이었다. 자신보다 작은 동양 남자 놀리는 일을 즐길 것 같은, 전형적으로 뺀질하게 생긴 서양 남자. K는 남자의 장난 때문에 오히려 강에 빠질 뻔했지만, 남자는 낄낄거리며 유유히 자리를 떴다. K는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베이지색 파나마 모자와 푸른색 계통의 실크 스카프.
K는 선착장 부근의 차런끄룽 로드로 갔다. 옛 거리였지만 새로운 소품숍과 편집매장, 모던한 카페들이 속속 생기는 중이었다. K는 그곳에서 파나마 모자와 실크 스카프를 샀다. 전형적으로 뺀질하게 생긴 서양 남자가 가진 것과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K는 파나마 모자와 실크 스카프를 착용한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전형적인 한국 남자 같지는 않았다.
K는 차런끄룽 로드에 위치한 시윌라이 사운드 클럽으로 갔다. 낮에는 카페 겸 레코드 숍, 오후 6시 이후에는 재즈, 디스코 등을 연주하는 라이브 클럽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K는 한 재즈 트리오의 연주를 들으며 맥주 한 잔과 칵테일 두 잔을 마셨다. 빠르게 취기가 올랐다. 그러다 인터미션 때 한 백인 여성이 K에게 다가와 영어로 물었다.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어?”
“어려운 일은 아니지.”
“고마워. 일본 사람이야?”
“아니, 한국인.”
“내가 아는 한국 남자들은 주로 검은색 옷만 입었는데.”
“한국에 와본 적이 있어?”
“서울에서 6개월 살았어.”
K는 기분 좋은 예감 속에서 입을 떼려 했는데, 여성이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손을 흔들었다. 한 서양 남자가(동유럽 계통 같았다) 성큼성큼 걸어왔다.
K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피아노를 배경으로 둔 채 휴대폰에 담았다. 프레임을 바꿔가며.
“일본인?” 남자가 K에게 물었다.
“한국인이래.” 여자가 말했다.
“친절해서 일본인인 줄 알았어.” 남자가 말했다.
“한국인도 친절해. 특히, 너희 같은 백인들한테는.” K가 말했다.
커플은 자리로 돌아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밀어를 속삭였다. K는 클럽을 나왔다. 6시 40분이었다. 카오산 로드로 가는 배는 7시 무렵에 끊겼다. 사톤 선착장으로 서둘러 가야 했다. 그러나 K는 그 반대쪽 길이 마음에 끌렸다. 20분쯤 걸어가니 카오산 로드와는 조금 다른 ‘밤의 방콕’이 펼쳐졌다. 팟퐁.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 돈으로 사도 되는 것과 사면 안 되는 것의 경계가 흐릿한 곳. 강가에서 불어온 끈적한 바람이 취기를 끌어올렸다. K는 택시를 붙잡았다.
자정 전이라 한산할 줄 알았는데 이미 팟퐁의 거리에는 짧은 옷을 입은 여성들이 삼삼오오 늘어선 채 지나가는 남자들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K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호기롭게 달려왔지만 K는 멈칫거렸다. 술기운이 빠르게 달아났다. 이러려고 방콕에 온 게 아니었다. 이건 스스로를 북돋는 것이 아니라 모욕하는 것이다. 게임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에 침을 뱉는 것이다. 그때 한 여성이 K의 팔짱을 끼며 말을 걸었다.

“일본인이지?”
“한국인.”
여성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K를 아래로 훑었다.
“정말?”
“일본 남자가 좋아?”
“젠틀하지.”
“한국 남자는?”
여성은 웃었다.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터프해. 우리 가게에서 놀다 가. 터프하게.” 여자가 말했다.
K는 터프하게 여성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러 생수와 숙취 해소제를 샀다. K는 다시 택시를 타고 카오산 로드로 갔다.
카오산 로드는 달라진 게 없었다.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들썩거렸고, 귀가 멍할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K는 요즘 가장 핫한 클럽으로 알려진 곳으로 갔다. 정신없는 조명, 심장을 두드리는 비트, 디제잉 부스, 대형 스크린, 번쩍거리는 댄스 스테이지.
K는 스탠딩 테이블에 자리 잡은 후 맥주를 마시며 춤을 췄다. 주변의 여성들과 눈빛도 교환했다. 대부분 외면했다. 1시간을 그렇게 혼자 놀았다. 처량한 자신을 비웃으며. 그때, 아담한 여성이 K의 테이블에 맥주병을 올려놓으며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합석해도 되냐고. K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 여자가 물었다.
K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일본. 너는?”
“대만.”
“류이치라고 해.”(류이치 사카모토에서 따왔다.)
“링링.”
두 사람은 함께 춤을 추고, 활기찬 암파와 플로팅 마켓, 근사한 딸랏노이 대성당, 이색적인 LGBT 클럽, 혼자 떠나는 여행, 그리고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다. 링링은 전형적인 한국 여자와 다른 것 같았다. 거침없고, 솔직하고, 털털했다. K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는 법을 잊었다. 링링에게 더없이 다정하게, 관대하게 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클럽을 빠져나와 밤거리를 걸었다. 링링이 먼저 K의 손을 잡았다. K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와 작별을 고하는 기분이었다.
걷다 보니 프라아팃 선착장이었다. K는 선착장 끝에 서서 출렁거리는 짜오프라야강을 바라보았다. 링링이 곁에 섰다. 키스할 최적의 순간이었다. K는 링링 쪽으로 서둘러 몸을 돌렸다. 발이 삐끗했다. 바닥이 가라앉는 듯했다. K는 물에 빠진 채로 허우적거렸다. 짜오프라야강의 정령이 물밑으로 몸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K는 소리치려 했다, 한국말로. 살려주세요! 일본어를 몰랐다. 그런데 링링이 주변을 재빠르게 둘러보며 먼저 소리쳤다. 한국말로.
“도와주세요!”
경상도 사투리가 짙게 밴 어투였다.
소설을 쓴 김기창은 2014년 소설 <모나코>로 제3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방콕>, <마산>으로 도시의 깊이를 탐구한 그는 단편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에 이어 최근 첫 SF 소설 <화성의 판다>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