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람의 제주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RYU JIN
  • RYU JIN CHO SooMIN

제주 사람의 제주

Islanders’ jeju

제주도에 거듭 가면 이국으로 보이던 풍경들이 익숙해지고, 여행지보다는 터전으로서 가진 매력에 호기심이 인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해 뿌리를 내린 새 도민들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섬의 삶을 지속하고 있을까?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종횡무진하며 사는 사람의 일상과 자취를 관찰했다.
  • written by RYU JIN
  • RYU JIN CHO SooMIN
2025년 09월 08일
곽지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타나는 옛집들. 과거로 훌쩍 건너간 듯한 풍광이다.
방과 후 자연이 빚은 수영장, 샛도리물로 향하는 아이들.
어촌과 농촌의 서정을 모두 품은 고산리의 풍경.
메종 노트르테르의 마당. 프랑스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가 꾸민 이국적인 정원으로 인기가 많다.
엉알해안에 면한 화산쇄설암층.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지질이다.
곽지해수욕장의 이국적인 경치. 아이들도 놀기 좋은 ‘아이 바당’과 용천수가 솟는 ‘과물노천탕’이 있어 로컬도 즐겨 찾는다.
제주의 매력은 불시에 출현하는 야생에 있다. 수월봉 지질 트레일로 향하는 길에 방목된 말을 만났다.
곽지해수욕장에서 제주의 여름을 한껏 즐기는 여행자들.
고산리의 자구내포구. 차귀도 인근에서 잡힌 오징어를 해풍에 말리는 풍경으로 유명해 ‘오징어 길’이라고 불린다.

제주에 사는 벗이 있다. 3호선과 4호선을 품은 충무로역,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줄을 서서 세 번째 오는 지하철에 겨우 몸을 구겨 넣고 친구의 SNS 속 일상을 본다. 밑동 굵은 삼나무가 우거진 숲, 초원의 말, 차 시트를 젖혀 자리를 넓힌 트렁크에 아무렇게나 누워 책을 읽는 모습. 보여지는 장면 이면에 있는 정보를 어느 정도 읽을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 그런 것을 무작정 부러워하진 않게 됐지만 얕은 한숨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 벗과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질시가 툭 튀어나왔다. “여기에서도 (삶이) 쉽지는 않아요” 하는 답장을 준 그에게 꽉 찬 성냥갑 같은 퇴근길의 군중을 찍어 보내자 “요즘 부쩍 서울에 가고 싶었는데, 반년 정도는 안 갈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답이 왔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내려가는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십여 년 전쯤 제주에 전입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던 시절에 섬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는 사람들의 얘기를 기사로 쓴 적이 있다. 그때는 그런 삶이 드물어서 제주도라는 섬에 깊은 환상을 품게 됐다. “내 공간에 깃드는 햇볕의 움직임을 종일, 가만히 들여다봐요. 여기 오기 전엔 알지도 못했고 해본 적 없는 일이죠.” 우연히 만난 어떤 사람이 한 이 말은 옆과 뒤를 외면하고 경주마처럼 내달리고 있다고 느낄 때 나를 멈추게 해주는 만트라가 됐다. 꽤 긴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제주도에 내려가 사는 일이 그때만큼 희귀하고 특별한 게 아닌 것이 됐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수소문해야 했던 예전과 달리 내 주변, 친구 주변, 직장 상사의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았다.
통계청이 가장 최근(2023년) 집계한 제주 총 주민등록 인구는 약 70만 명이고 그중 약 2만9000여 명이 외부에서 온 주민이다. 지역 신문에선 전입 인구수가 정점을 찍었던 2017년 이후로 이주민의 수가 매해 줄고 있으며 직업과 일자리, 교육 환경, 경제와 생활 여건 불만족 등 현실적인 까닭으로 전출하는 이들이 많다고 분석한다. ‘제주도라면 뭔가 다를 거야’라는 환상이 걷힌 자리에서 여전히 이주민의 삶을 지속하는 사람, 새롭게 들어와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거대한 목장을 개조해 근사한 복합공간을 차리거나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예술가이거나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 말고, 자신의 크고 작은 선택을 좇으며 떠나온 곳과는 조금 다른 일상을 누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삶을 지속하기 위해 성실한 매일을 보내는 평범한 사람들. 그런 이들은 어디에서 쉬고, 무엇을 하며 놀고, 어떤 걸 먹으며, 제주를 누릴까?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이상 살아보며 잃은 것, 배운 것, 얻은 삶은 뭘까?
전화 한 통, 문자 몇 개 보내고 다짜고짜 찾아가 오랜 시간 돈과 시간을 써서 만든 목록과 인사이트, 깨달은 것을 묻는 내게 섬사람들은 짜증 대신 넉넉한 마음을 나눠줬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스틸네거티브 클럽이라는 현상소와 커뮤니티 라운지를 운영하는 사진가 박성욱의 말이다. “제주에 사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곳’을 물으면 뾰족한 지명을 말해주지 않는 이들이 왕왕 있을 거예요. 알려주기 싫은 게 아니라 지도에 없는 장소, 이름조차 없는 자연인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델 찾아내서 호젓하게 즐기는 게 저의 낙이에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책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의 저자 아키코 부시가 소개한 나오미 시하브 나이의 시, ‘사라지는 기술(The Art of Disappearing)’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뭇잎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걸어 다니세요/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세요/ 그런 다음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하세요
나뭇잎처럼 존재하며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자연을 지척에 두고 누리는 것.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단하고 고민 많은 일상을 보내다가도 언제든 그런 자연으로 숨어들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는 삶. 작가 아키코 부시는 책 속에서 그런 순간에 “침묵의 은총, 분별력, 그리고 완전히 자율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세상을 깊이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여러 애로에도 불구하고 제주에서 계속 사는 이들이 발견한 건 그런 게 아닐까? 섬 곳곳, 갑자기 인적이 뚝 끊기는 외진 곳에서 바다, 나무, 암석, 풀꽃과 독대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주에서 산다는 것’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찾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