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빚은 두 도시, 솔트레이크시티와 파크시티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ing & PHOTOGRAPHY BY LEE JIHYE
  • SUPPORTED BY Brand USA, Delta Air Lines, Utah Office of Tourism, Visit Salt Lake, Park City Chamber of Commerce & Visitors Bureau

시간이 빚은 두 도시, 솔트레이크시티와 파크시티

Two Cities Shaped by Time: Salt Lake CITY & Park City

장대한 자연과 신앙의 도시 솔트레이크시티, 그리고 올림픽의 유산과 자유의 기운이 살아 있는 파크시티. 서로 다른 두 얼굴의 도시가 단 한 시간 거리에 나란히 자리했다. 호수와 소금평원, 트램과 축제, 그리고 눈과 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여행자의 시선을 붙든다.
  • Writing & PHOTOGRAPHY BY LEE JIHYE
  • SUPPORTED BY Brand USA, Delta Air Lines, Utah Office of Tourism, Visit Salt Lake, Park City Chamber of Commerce & Visitors Bureau
2025년 11월 06일

Salt Lake CITY

앤털로프 아일랜드에 서식하는 바이슨 무리.

미국 중서부의 관문,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에서 일행을 태운 차는 곧바로 그레이트솔트레이크로 향했다. 도심을 벗어난 도로 양옆이 19세기 후반 골드러시 여파로 세워진 제련소 굴뚝으로 바뀌더니, 이내 압도적인 돌산이 펼쳐졌다.
“저 갈색 언덕은 섬이 아니라 프로몬토리 서밋(Promontory Summit) 입니다. 1869년, 서쪽에서 동쪽으로 만들어지던 철도가 이 지점에서 연결돼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됐죠. 미국의 동서를 잇는 물리적·경제적·문화적 전환점이 된 셈입니다.”
‘사우스 웨스트 어드벤처 투어스’의 가이드 데이비드는 가는 내내 유타주의 역사와 지형, 생태계에 대해 설명했다. 어느새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는 호수의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 거대한 염호(鹽湖: 물이 바다로 흘러 나가는 데가 없는 호수)는 북아메리카 최대 규모로 해발 약 1300m 고원지대에 자리했다. 첫 목적지는 그레이트솔트레이크 한가운데 자리한 앤털로프 아일랜드 주립공원(Antelope Island State Park)이다. ‘영양(antelope)의 섬’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이곳엔 시속 88km 속도로 달리는 북미 토종 영양과 긴 귀가 하늘로 뻗은 잭래빗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섬의 진짜 주인공은 북미 들소, 바이슨(bison). 1893년 이곳으로 들여온 12마리의 바이슨은 천적이 없고 먹이가 풍부한 이 섬에서 빠르게 번식했다. 이후 개체수는 수천 마리로 늘어났고, 현재는 700마리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멀리서 바이슨이 한두 마리씩 보이기 시작하자 데이비드는 차를 세우고 설명했다.
“다들 팔을 곧게 펴고 주먹을 쥔 채 엄지를 들어보세요. 엄지손가락이 바이슨의 몸통을 완전히 가리면 안전한 거리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재빨리 피하세요. 코를 골 듯 소리를 내거나 두 눈으로 노려보거나, 꼬리를 치켜들어도 물러나는 게 좋아요.”
멀리서 보이는 바이슨의 거대한 몸집은 느리지만 위압적이었다. 무리 생활을 하는 이들은 주로 초원 지대에서 풀을 뜯으며, 아침과 해 질 무렵에 가장 활발히 움직인다. 가까이 다가서자 특유의 짙은 체취와 거친 숨소리가 공기를 메웠다. 수컷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잠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빛과 뿔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데이비드가 가장 좋아한다는 짧은 코스, 버펄로 포인트 트레일에 올랐다. 송골매 한 마리가 급강하하며 하늘을 가르고, 흰 펠리컨 무리가 수평선을 따라 저공 비행했다. “영양은 시속 88km에 달하는 속도로 달려요. 송골매는 하늘에서 세계 최고 속도로 비행하죠. 이 섬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동물 두 종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보너빌 소금평원의 장엄한 풍광.

빛과 소금의 착시 속으로
끝없이 펼쳐진 하얀 사막이 공감각을 마비시킨다는 보너빌 소금평원(Bonneville Salt Flats)으로 향했다. 오늘의 가이드 블레이크는 캘리포니아에서 뉴저지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한 시간 반가량 내달리며 말했다. “이 도로는 제한속도 128km로, 텍사스에 이어 미국 주간고속도로중 두 번째로 깁니다. 평평하고 광활한 지형 덕분에 다양한 영화의 무대가 됐죠.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에서 죽음과 환상의 경계를 상징하는 배경으로,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에서는 끝없는 지면 위에 거대한 우주선이 등장하는 배경으로 나왔어요.”
단순해진 풍경이 눈에 익을 때쯤, 식물은 사라지고 지면은 점점 하얗게 바뀌더니 마침내 끝없는 대지가 수평선 너머까지 이어졌다. 이곳이 바로 북아메리카 최대의 염분 지대이자, 지구상에서도 가장 평평한 땅 중 하나인 보너빌 소금평원이다. 약 1만 5000년 전, 지금보다 훨씬 거대한 담수호였던 보너빌 호수가 증발하면서 형성됐는데, 당시 유타·네바다·아이다호 일부까지 덮고 있었으며, 면적은 약 5만km²에 달했다. 기후가 따뜻해지고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염분이 두꺼운 결정층을 이뤄 지금의 흰 사막을 만들었다.
보너빌의 풍경은 듣던 대로 시공간의 감각을 무력화했다. 지형의 기복이 거의 없어 빛과 수증기가 만들어내는 착시가 강하게 일었다. 수평선 위의 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여도 실제로는 수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는 블레이크의 말이 무섭게 실감났다. 그 때문에 길을 잃거나 방향감각을 잃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고. 염분층 위를 걷는 발밑에서는 마른 소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과 땅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풍경은 또 한 번 낯설게 변했다. 하얗게 빛나던 소금층이 서서히 금빛으로 물들고 그림자는 긴 선으로 늘어졌다. 이내 온 세상이 주홍색으로 번지고, 나는 고요 속을 느리게 산책했다.

리프트 아래 잔디밭에서 음악을 듣거나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

유타의 주말, 자연과 축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주말에 뭐 해요?”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자연으로 가죠”라고 대답했다. 주말이 되자 도심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고, 그들이 향하는 자연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히든 피크로 향했다. 히든 피크는 스노버드 리조트 정상부, 워새치산맥(Wasatch Range)의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로 해발 약 3300m에 자리한다. 트램에 오르자 유리창 너머로 능선과 평원, 계곡이 한눈에 펼쳐졌다. 리조트 베이스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히든 피크 트레일은 길이 약 5.5km로, 1000m 고도까지 오르는 코스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트램은 구름 가까이로 올라섰고, 발아래엔 산맥이 펼쳐졌다.
여름이면 트램 아래로 하이커와 러너, 바이커가 오가고, 겨울이면 눈 덮인 슬로프 위로 스키어와 보더들이 내달린다. 협곡을 따라 오르는 퍼루비언 걸치 트레일(Peruvian Gulch Trail)은 야생화가 피고 새들이 머무는 길로 유명하다. 암벽등반 명소인 헬게이트 클리프(Hellgate Cliffs)와 게이트 버트리스(Gate Buttress)에는 초급부터 상급까지 다양한 루트가 개척됐다.
정상의 온도는 도심보다 훨씬 낮았다. 10℃ 남짓한 찬 공기에 몸을 웅크리던 그때, 아래쪽에서 하이킹을 마친 이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헐떡이면서도 밝은 표정으로 “춥죠? 걸어오면 금방 더워질 걸요!”라며 웃는다. 우리는 결국 추위를 이기지 못해 트램을 타고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산 아래에선 스노버드 리조트의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가 한창이었다.
스노버드의 옥토버페스트는 1973년 시작된 유타 최대의 맥주 축제로, 매년 8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두 달간 주말마다 열린다. 매년 6만 명 이상이 찾는 이 축제에선 30여 종의 지역 수제 맥주를 즐길 수 있다. 커다란 천막 안에서는 전통 복장을 한 밴드가 폴카 리듬을 연주하고, 사람들은 맥주잔을 부딪치며 춤을 춘다. 천막 밖에는 프레첼, 소시지, 슈니첼, 자우어크라우트 같은 독일식 간식 부스가 줄지어 있다. 우리는 얼굴만 한 프레첼을 들고 맥주를 마시는 친구들, 대형 머그잔을 나란히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풍선을 불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사이에서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축제를 만끽했다.

움직이는 극장, 솔트레이크시티의 트롤리
도심을 천천히 도는 붉은 트롤리 버스 투어는 솔트레이크시티를 깊고 흥미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이다. 초기에 시내를 오가던 전차를 복원한 듯한 복고풍 트롤리 버스가 오늘날엔 ‘움직이는 극장’으로 변했다. “This is the right place. Drive on.” 모르몬교 지도자이자 솔트레이크를 개척한 브리검 영(Brigham Young)의 명언을 외치는 가이드이자 배우이자 음악가인 루크와 케일리의 목소리가 트롤리 엔진 소리와 맞물렸다. 1847년, 이 말 한마디로 시작된 개척의 땅은 해발고도 1280m에 들어선 도시가 되었고, 유트족이 부르던 이름 ‘유타(산에 사는 사람들)’를 얻었다. 루크가 웃으며 덧붙였다. “오늘만큼은 여러분도 유타가 된 셈이죠.”
트롤리는 도심의 주요 랜드마크를 따라 움직였다. 차창 밖으로 후기 성도 교회의 상징, 40년의 세월 끝에 완성된 석조 성전인 템플 스퀘어(Temple Square)가 펼쳐진다. 루크는 이곳을 ‘솔트레이크시티의 심장’이라 불렀다. 북쪽의 골드 스파이크 국립역사공원(Golden Spike National Historical Park)에선 솔트레이크시티의 급격한 변화를 목도할 수 있다. 1869년, 미국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된 순간, 이 자리에 상징적으로 금색 스파이크라는 마지막 못이 박혔는데, 이 장면은 미국 역사에서 서부 개척과 산업 확장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 후 광부들이 이곳에서 부를 쌓고 정치가들이 맨션을 지으며 솔트레이크시티가 발전했어요.” 케일리가 노래하듯 말했다.
트롤리는 이후에도 도심의 여러 랜드마크를 지났다. 빅토리아풍 건축양식인 유니언 퍼시픽 철도역, ‘위스키 스트리트’라 불렸던 옛 유흥가, 모셰 사프디가 설계한 유리 돔의 시립 도서관을 지나 마지막 구간은 유타주 의사당(Utah State Capitol)이다. 흰 돔과 코린트식 기둥이 미국 연방 의사당을 쏙 닮은 건물이다. 덕분에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연방 의사당 내부를 둘러보는 나에게 루크는 벽화를 가리켰다. 브리검 영의 개척 장면, 갈매기가 메뚜기 떼를 구한 전설, 그리고 올림픽 성화가 한 폭에 담겨 있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역사는 기적의 반복이에요. 하지만 진짜 기적은, 이렇게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오는 당신이죠.”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놓치기 아까운 스폿

  1. 솔트레이크시티 주민들의 삶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다면 매주 토요일 파이오니어 파크에서 열리는 다운타운 파머스 마켓으로 향하자. 옛 개척 시대 요새 자리에 조성된 이 공원은 6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주말마다 신선한 농산물과 수공예품을 사고파는 장터가 된다. 농사지은 채소와 과일, 꿀, 직접 로스팅한 커피와 구운 빵 냄새가 어우러진 공원을 천천히 걷다 보면 이 도시의 평화를 체감할 수 있다.
  2. 1900년대 초반에 지은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하루를 묵고 싶다면 애셔 애덤스(Asher Adams) 호텔을 선택하자. 유니언 퍼시픽 철도를 개조한 이 호텔에는 프렌치 세컨드 엠파이어 양식의 외관과 아치형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구두닦이 의자 같은 흔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매표 창구였던 공간은 ‘더 바 앳 애셔 애덤스(The Bar at Asher Adams)’로 바뀌어 위스키와 칵테일을 즐길 수 있다.
  3. 현지인처럼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면 브런치 카페 에바스 베이커리(Eva’s Bakery)가 제격이다. 갓 구운 빵 냄새가 거리로 번지고, 사람들은 커피와 크루아상을 손에 쥔 채 오간다. 다양한 브런치 메뉴를 노천 테이블에서 맛볼 수 있다.

Park City

디어밸리 리조트 드라이브 중 만난 파크시티의 풍경.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차로 40여 분, 워새치산맥의 능선을 넘을수록 공기가 청명해졌다. 건조한 사막의 기운이 금세 사라지더니 맑은 하늘이 가까워졌다. 솔트레이크시티보다 약 1000m 높은 해발 2100m의 도시, 파크시티에 도착했다. 파크시티는 19세기 후반까지 은과 납을 캐던 광산 마을이었다. 고된 노동과 번영, 그리고 쇠락을 반복하던 도시가 다시 빛을 얻은 건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의 주무대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부터다. 세계는 이 작은 산악 도시를 주목했다. 유타 올림픽 파크(Utah Olympic Park)는 그 역사의 상징이다. 2002년 대회 당시 스키점프·봅슬레이·루지 경기장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완벽히 관리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곳은 북미에 네 개뿐인 슬라이딩 트랙이 있고, 미국올림픽위원회 지정 훈련 사이트로 사용된다. 경기장 옆에는 올림픽 박물관이 자리해 대회 당시 사용한 썰매, 메달, 유니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봅슬레이 트랙은 일반인도 체험하도록 개방해 시속 100km로 얼음 트랙을 미끄러지는 스릴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파크시티가 2034년 두 번째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30여 년 만에 한 도시에서 올림픽이 다시 개최되는 것은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2002년이 파크시티라는 도시를 세계에 알렸다면, 2034년은 이 도시가 지속 가능한 올림픽 운영 능력을 증명하는 시기가 될 거예요.” 파크시티 홍보 담당자 사치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2034년 동계 올림픽은 철저하게 기존 자원을 재활용하도록 설계됐다. 새 경기장을 짓지 않고 2002년 대회 당시 사용했던 13개의 경기장을 그대로 활용할 예정이다. 스키점프·루지·봅슬레이 경기장이 있는 유타 올림픽 파크, 피겨스케이팅과 하키 종목이 열린 매버릭 센터(Maverik Center), 스노보드 종목이 예정된 파크시티 마운틴 리조트 등 주요 시설은 이미 완비돼 있다. 각 경기장은 개·보수만 진행해 탄소 배출과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할 계획이다.

지속 가능한 올림픽을 향한 실험
2034년 동계 올림픽은 예산도 세금이 아니라 민간 모금으로 충당한다. ‘포디움34 (Podium34)’ 캠페인을 통해 이미 2억 달러 이상이 모였고, 이 기금은 경기장 유지뿐 아니라 청소년 스포츠, 지역 문화, 정신 건강 프로그램에 재투자된다. 새로운 건설 없이 기존 인프라를 순환시키는 구조라 교통·숙박·환경 부담이 적고, 올림픽 이후 시설이 방치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북미 최대 규모의 스키 리조트 중 하나인 파크시티 마운틴으로 향했다. 이곳은 해발 3000m가 넘는 정상과 2100m 지대에 펼쳐진 슬로프, 약 30km²에 달하는 면적 안에 350여 개의 코스와 40여 개의 리프트를 갖추고 있다. 겨울이면 스키와 스노보드 천국이 되고, 눈이 녹는 여름엔 산악자전거, 하이킹, 코스터, 집라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덕분에 주말마다 솔트레이크시티와 인근 도심에서 액티비티를 즐기기 위해 젊은 군중이 모여든다. 9월의 파크시티 마운틴은 눈은 없지만 가벼운 냉기가 섞여 있어 액티비티를 하기에 적격이었다. 우리가 탄 곤돌라가 천천히 움직이며 산을 올랐고, 거대한 산맥의 능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발아래로는 마른 풀밭과 산책로, 트레킹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흩어졌다. 정상에 닿자 사방이 열렸다. 집라인과 봅슬레이를 체험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나 역시 안전벨트를 매고 봅슬레이 체험을 하기 위한 출발점에 섰다. 순간 중력이 몸을 끌어내렸고, 산맥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치며 긴장이 풀렸다. 눈앞의 가을 풍경이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순간을 그대로 통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파크시티의 남동쪽 디어밸리로 방향을 틀었다. 이곳은 1981년 개장한 프라이빗 스키 리조트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스키 리조트 브랜드다. 우리의 목적지는 디어밸리에서도 최고급으로 평가받는 스테인 에릭센 로지. 노르웨이 올림픽 영웅의 이름을 건 파크시티 최초의 럭셔리 숙소다. “우린 세계 최고의 스키 호텔이라는 꿈에서 출발했다”는 입구의 안내 문구가 눈을 사로잡았다. 객실 벽난로와 목재 디테일,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산빛이 이곳의 가을 공기를 데웠다. 객실마다 작은 정원이 딸려 있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세심하게 다듬은 화단과 분수가 자리했다. 라벤더와 솔송나무 향이 뒤섞인 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물소리가 명상 음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레스토랑은 탁 트인 창으로 디어밸리의 스키 슬로프를 내려다보게 설계됐다. 식사 중에도 눈앞의 풍경이 끊임없이 변했다. 반짝이는 햇살, 구름이 만드는 그늘, 멀리 보이는 스키 루트의 곡선에 넋을 잃고 있을 때쯤, 명상을 위한 싱잉볼 세션 시간이 다가왔다. 진동이 바닥을 타고 천천히 몸 안으로 스며들자 자연스레 여독이 녹아내렸다. 눈을 감으면 멀리서 산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마음속엔 단 하나의 생각만 남았다. ‘이곳은 고요와 호사, 자연과 인간의 균형이 완벽히 맞닿은 곳이다.’

산악 도시의 저녁, 메인 스트리트의 활기
파크시티에 머무는 내내 솔트레이크시티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사실 그 이유는 과거의 궤적에 있다. 유타 전역이 신앙과 절제의 지역이었다면, 파크시티는 광석과 노동의 도시였다. 고된 노동자들은 음악과 술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덕분에 지금도 도심에는 하이 웨스트 같은 위스키 증류소가 자리한다. 주말이면 메인 스트리트와 리조트 옆 바가 북적이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있어서다. “우린 산에서 일했고, 지금은 산에서 놉니다. 절제와 금욕을 존중하지만, 이 도시는 즐거움을 더 사랑하죠.” 첫날 들은 사치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파크시티의 메인 스트리트로 들어섰을 때, 산속의 정적은 활기로 바뀌었다. 이 거리는 19세기 은광 붐과 함께 탄생했다. 1860년대 광부들이 몰려들며 마을이 형성됐고, 한 세기 뒤 광산이 닫히자 도시는 한동안 침묵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스키 산업이 들어서며 다시 살아났다. 오늘날의 메인 스트리트는 그 부활의 상징이다. 1979년에는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어 19세기 말 건축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빅토리안 스타일과 스페인 리바이벌 양식이 섞인 200여 개의 상점, 갤러리, 카페, 바가 이 짧은 언덕길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늦은 오후 방문한 메인 스트리트는 젊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흥겨운 음악, 커피 향이 공기 속에 퍼졌다. 붉은 벽돌 건물과 나무 간판이 줄지어 늘어서고, 창문마다 조명을 켠 상점들이 작은 산악 도시의 저녁을 물들였다.
거리의 중심에 자리한 파크시티 뮤지엄에 들어섰다. 작은 건물이지만, 내부엔 도시의 전체 연대기가 걸려 있다. 은광의 굉음, 대형 화재로 잿더미가 된 중심가, 그리고 스키의 도시로 다시 태어난 역사까지. 오래된 광부의 헬멧과 초기 스키 장비, 커다란 케이블까지 알차게 전시돼 있다. 그 사이사이, 유리 케이스 속 오래된 신문의 “From Silver to Snow(은에서 눈으로)”라는 문구에 눈이 갔다. 한 문장이 도시의 역사를 압축하고 있었다.
늦은 오후까지 메인 스트리트를 천천히 산책했다. 반려견과 함께 걷는 노인, 장난감 같은 색의 코트를 입은 젊은 커플, 손에 아이스크림과 풍선을 든 아이들이 뒤섞였다. 골목 한쪽엔 뱅크시의 벽화 〈카메라맨과 꽃〉이 보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맥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거리를 감쌌다. 부유하면서 평화롭고, 세련되면서도 꾸미지 않은 파크시티의 저녁이 흘러갔다.
해가 완전히 기울자 식사를 하기 위해 디어밸리 쪽으로 향했다. 파크시티 마운틴 인근, 펜트리 호텔에 자리한 키타(KITA)는 일식 다이닝이다. 검은 대리석과 목재로 꾸민 아늑한 내부에서 바라본 창밖 스키 슬로프가 어둠 속에서 미묘한 곡선을 그렸다. 참치 사시미를 시작으로 농어구이, 캘리포니아 롤, 일본 와규 스테이크가 테이블을 채웠다. 완벽한 미디엄 레어로 구운 와규 스테이크 사이에서 낯익은 소스가 보였다. 달콤짭쪼름한 쌈장이었다. “수석 셰프가 한국인이거든요.” 펜트리 호텔의 마케팅 디렉터 크리스 로잉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서양의 미식 구조 안에 녹아든 동양의 리듬, 미묘한 짠맛과 단맛의 균형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솔트레이크시티가 신앙과 절제로 도시의 균형을 잡았다면, 파크시티는 자유로운 거리와 올림픽으로 진면모를 드러냈다. 은광에서 눈으로, 지금은 자유와 미식의 도시가 된 파크시티.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꺼질 때까지, 파크시티의 시간이 잔잔히 흘렀다.

파크시티에서 놓치기 아까운 스폿

  1. 스워너 자연보호구역은 5km² 정도의 습지와 개활지, 약 16km의 트레일을 품은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친환경 건축제도인 LEED 플래티넘 등급의 에코 센터다. 이곳에선 철새의 동선과 비버의 흔적, 계절마다 바뀌는 수위와 식생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2. 디어밸리 리조트 인근, 작은 운하를 따라 자리한 디어밸리 카페는 고요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야외 덱에는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주변에 잔잔한 호수가 펼쳐진다. 메뉴는 현지 재료를 살린 미국식 브런치와 샐러드, 수프, 샌드위치가 중심이다. 특히 홈메이드 치킨 샐러드와 스모크드 연어 베이글이 인기다.
  3. 올림픽 종목 트레이닝과 주민들의 주말 액티비티는 도심 외곽에 자리한 우드워드 파크시티가 주로 담당한다. 사면을 깎아 만든 점프 라인과 파크, 실내 허브의 트램펄린·스케이트·BMX·파쿠르 존, 에어백으로 마감된 빅에어 훈련 시스템은 사계절 가동된다. 이 시설은 2022년부터 미국 국가대표가 소속된 U.S. 스키&스노보드의 공식 트레이닝 센터로 지정됐다. 올림픽 대표 선수가 아니어도 누구나 이곳에서 놀이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