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 따라 이어지는 비경 속으로
라구스


“포르투갈 남부 라구스는 365일 중 300일이 맑아요”라는 말을 들은 순간을 기억한다. 황금빛 해변을 상상하며 꼭 가보리라 다짐했던 것도. 그토록 벼르던 라구스에 마침내 도착한 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오늘이 연중 흐린 65일 중 하루인가? 방수 재킷의 모자를 쓰고 터덜터덜 펄 푸드 트레일러로 향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노천카페 같은 푸드 트럭에 앉아 신선한 굴과 스파클링 와인으로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자꾸 들이치는 비바람과 눈치게임을 하며 굴 한 접시를 비우고 나니,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가운 마음에 구시가 숙소에 짐을 던져 넣고 인판트 동 엔히크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햇살 속에 의연하게 앉아 있는 엔히크 왕자의 동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엔히크 왕자는 1419년 알가르브 지역 총독으로 부임해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그가 이끈 탐험대는 라구스를 기지로 아프리카 항해를 시작했다. 나 역시 미지의 세계를 찾아온 탐험가의 심정으로 도시 탐험에 나섰다. 광장 앞 산타마리아 드 라구스 성당을 기웃거리고 성당 옆 총독의 성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총독의 성 맞은편에는 17세기 후반 라구스 방어를 위해 지은 해군 요새, 포르테 다 폰타 다 반데이라가 늠름한 모습을 드러냈다. 요새 옥상에 오르자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라구스의 해안선이 펼쳐졌다. 해안선이 시야에 들어오니 어서 해변을 거닐고 싶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간 곳은 바타타 해변(Batata Beach). 감자 해변이란 이름처럼 해변에는 감자를 닮은 거대한 기암괴석이 총총 박혀 있었다. 기암괴석에 뚫린 동굴 터널을 통과하면서 걷자 조금 더 호젓하고 아담한 이스투단트스 해변(Estudantes Beach)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책하는 김에 도보 20분 거리에 있는 도나 아나 해변(Donna Ana Beach)까지 가볼까. 신나게 걷다 보니 구글맵은 목적지 주변에 왔다는데 해변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은 순간 절벽 사이로 나무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비로소 해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변에는 늦가을 햇살 아래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 수트까지 챙겨 입고 바다로 첨벙 뛰어드는 사람,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 등 저마다 이 순간을 즐기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저 파도 소리가 이끄는 대로 해변을 걸었다. 바다에서 솟아오른 기암괴석 사이로 파도가 끝도 없이 철썩였다. 해안을 따라 걸으면 걸을수록 독특한 모양의 암석과 세찬 파도가 치는 바다가 빚어내는 비경이 이어졌다.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낑낑대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한 청년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호의를 거절하긴 미안해 별 기대 없이 카메라를 건넸는데, 온갖 각도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생각보다 잘 나온 사진에 놀라 엄지를 치켜세우자 활짝 웃더니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다음 날엔 해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카밀루 해변(Camilo Beach)을 찾았다. 카밀루 해변은 포르투갈 남부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해변이다. 도나 아나 해변처럼 절벽 사이에 숨어 있어 약 200개의 나무 계단을 내려가야 도착하는데, 그 길마저도 드라마틱했다. 계단을 내려가자 절벽 사이 모래와 고운 해변이 반겼다. 해변의 망중한을 즐긴 후 오 카밀루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해산물이 맛있기로 이름난 레스토랑답게 와인 리스트도, 해산물 메뉴도 다채로웠다. 입구에 싱싱한 생선이 전시되어 있지만 내 선택은 꼴뚜기볶음. 올리브 오일에 살짝 볶았을 뿐인데 포르투갈 남부 특산물인 꼴뚜기의 야들야들한 식감과 감칠맛에 눈이 번쩍 뜨였다. 여기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니 환상의 조화를 이루었다. 그날 오후, 입안을 가득 채우는 대서양의 맛에 기운이 솟아 자연이 빚은 해안 절벽, 폰타 다 피에다드까지 걸었다.



Travel guide
이동 방법
리스본에서 라구스까지 기차 이용 시 약 3시간 40분, 버스 이용 시 약 3시간 50분이 걸린다. 단, 기차는 직행이 없어 갈아타야 하고, 고속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다.
머물 곳
구시가와 도나 아나 해변 주변에 호텔과 호스텔이 모여 있다. 젊은 여행자들이 찾는 여행지라 호스텔도 많은 편이다.
먹을 곳
구시가에 레스토랑과 와인 바가 즐비하다. 남부 특산물인 꼴뚜기볶음(Stir-fried baby squid)과 새우, 조개, 오징어, 가리비 등 싱싱한 해산물과 채소를 넣고 국물을 자작하게 끓여내는 스튜 카타플라나 (Cataplana)는 꼭 맛봐야 할 메뉴다.
액티비티
라구스에서 보트를 타고 베나길 동굴 투어를 다녀올 수 있다. 베나길 동굴은 해식 동굴과 기암괴석이 많은 포르투갈 남부에서 가장 신비로운 경관으로 꼽힌다.
거대한 파도가 이는 서핑의 성지
나자레


발리에서 서핑을 배운 적이 있다. 서핑을 배워서 포르투갈 대서양 바다에 진출하리라 생각하며. 파도에 뺨을 맞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날 이후 대서양에서 서핑을 하겠다는 꿈 대신 세상에서 가장 큰 파도를 보러 나자레에 가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 꿈을 이루려면 그저 나자레로 가기만 하면 된다. 서퍼들이 찾는 어촌 마을, 나자레에 도착한 날엔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졌다. 햇살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자레 해변(Nazare Beach)을 둘러보았다. 해변의 끝, 펼치다 만 병풍 같은 기암절벽 앞 전통 그물 낚시를 했던 고깃배와 전통 그물을 바지랑대로 받치고 생선을 말리는 어부들이 한국 어촌 풍경인 양 정겹게 다가왔다.
어쩐지 익숙한 풍경을 스쳐 지나 아센소르를 타러 갔다. 나자레는 해변이 있는 아랫마을과 110m 높이 절벽 위의 윗마을 시티우(Sitìo)로 나뉘는데, 둘 사이를 아센소르 다 나자레(Ascensor da Nazaré)가 잇는다. 아센소르 다 나자레는 로컬도 애용하는 교통수단이다. 나자레 해변에서 윗마을 시티우로 갈 때 아센소르 다 나자레를 타지 않으면 2시간 30분 이상 가파른 언덕을 걸어 올라야 하므로. 1889년 아센소르 다 나자레를 만든 이는 구스타브 에펠의 제자이자 리스본의 산타후스타 엘리베이터를 만든 라울 메스니에르 드 퐁사르. 유서 깊은 교통수단 아센소르에 오르자 스르륵 절벽을 오르는 승차감에 아찔했지만, 이내 창밖 너머 아름다운 나자레의 풍경에 마음이 갈매기 날갯짓처럼 팔랑거렸다.

아센소르 다 나자레에서 내리자 광장을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 성당과 메모리아 소성당이 있는 수베르쿠 전망대(Suberco observation deck)가 펼쳐졌다. 주말이라 수베르쿠 전망대는 인파로 붐볐다. 일곱 겹의 전통 치마를 입은 할머니들은 견과류를 파느라 분주했고, 전망대 담장에 빌트인 가구처럼 달린 벤치마다 온몸으로 바람과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빼곡했다. 전망대 너머로는 레이스 같은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해변을 쓰다듬고 있었다. 종일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을 청량한 풍경이었지만, 나자레 등대(Nazare Lighthouse)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어서 나자레의 명물을 보고 싶어서.
나자레의 명물은 바로 거대한 파도다.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곳은 나자레 북쪽 해변. 이곳에 높은 파도가 형성되는 이유는 지형 때문이다. 북쪽 해변 앞바다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5000m 깊이의 바다 협곡이 있는데, 이 해저 협곡이 파도를 증폭시켜 엄청난 높이의 파도를 만들어낸다. 2011년 11월 하와이안 서퍼 개릿 맥너마라(Garrett McNamara)가 이곳에서 31m 높이의 파도를 타 기네스북에 오르며 나자레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이후 매년 나자레 북쪽 해변에서는 서핑 대회 ‘투도르 나자레 토 우 서핑 챌린지(Tudor Nazaré Tow Surfing Challenge)’가 열린다.
거대한 파도를 감상할 수 있는 명당은 나자레 등대와 나자레 등대로 가는 내리막길에 자리한 온다스 뷰포인트(Ondas da Nazaré Viewpoint)다. 잠시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자레 북쪽 해변을 바라보았다. 서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자레의 높은 파도에 올라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부디 그 누군가의 꿈이 이루어지길 빌고 있었다. 이 순간 누군가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에 온기가 차올랐다. 파도를 타는 서퍼들을 한참 바라보다 나자레 등대 안으로 들어섰다. 등대를 이고 있는 건물은 상미겔 요새였는데, 지금은 전시관으로 변모했다. 전시관에는 나자레 서핑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나자레의 파도를 탄 서퍼들의 서프보드가 전시되어 있었다. 등대 위에 오르니 탁 트인 전망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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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방법
리스본에서 버스 이용 시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세트 히우스에서 출발하는 헤데 익스프레수스보다 오리엔트역에서 출발하는 플릭스버스가 더 저렴하고 빠르다.
머물 곳
나자레 윗마을 시티우보다 아랫마을 나자레 해변 근처에 묵는 편이 이동하기 편리하다. 나자레 해변을 따라 작은 호텔과 에어비앤비가 모여 있다.
먹을 곳
시티우에 정어리구이가 맛있기로 유명한 카자 피르스 아 사르디냐(Casa Pires a Sardinha)가 있다. 석쇠에 구워주는 정어리구이에 큼직한 아귀와 새우를 듬뿍 넣은 아호스 드 탐보릴(Arroz de Tamboril)을 곁들여보자.
태양의 해변에서 세상 끝까지
카스카이스 & 카보 다 호카


스페인에 ‘코스타 델 솔’이 있다면 포르투갈에는 ‘코스타 두 솔(Costa do Sol)’이 있다. 둘 다 ‘태양의 해변’이란 뜻. 코스타 두 솔의 중심에 카스카이스가 자리한다. 한겨울 태양의 해변은 어떤 표정일까 하는 호기심에 대서양을 따라 카스카이스까지 왔다.
두케자 해변(Duquesa Beach)으로 다가가자 청명한 하늘 아래 푸른 바다가 일렁이고, 잔잔한 파도는 해변을 간질였다. 늦가을에도 이토록 따사로운 햇살이라니. 정신을 차려보니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를 주문한 뒤였다. 야외에서 맥주 마시기 딱 좋은 날씨니까.
두케자 해변에 이어 찾아간 하이냐 해변(Rainha Beach)은 작지만 큰 암석에 둘러싸여 아늑한 분위기였다. 19세기 아멜리아(Amelia) 여왕의 전용 해변으로 쓰여 ‘여왕’이라는 뜻의 하이냐 해변으로 불린다. 여름에 와서 수영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해변을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수영복 차림의 남자가 나타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아. 용감한 자가 바다를 독차지하는구나. 용기도 수영복도 없는 나는 또 다른 해변을 향해 걷기로 했다. 하이냐 해변에서 5분쯤 걷자 페스카도르스 해변(Pescadores Beach)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부들의 해변’이라는 뜻과는 어울리지 않게 로컬들이 해변에서 비치발리볼을 즐기고 있었다. 에너지 넘치는 그들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토록 밝고 활기찬 카스카이스의 매력을 먼저 알아본 이는 포르투갈 왕족이었다.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1세는 이곳에 여름 궁전을 두었다. 당시 왕가의 별궁으로 쓰였던 카스카이스 해안의 카스카이스 요새가 그 흔적이다. 15~17세기에 리스본 방어 강화를 위해 세운 요새였으나, 1775년 대지진으로 무너져 주요 벽만 남아 있다. 서점과 레스토랑, 호텔이 둥지를 튼 요새 안은 밖과는 달리 감성을 충전하기 좋은 분위기였다. 다시 요새 밖으로 나오자 요트가 늘어선 카스카이스 마리나(Cascais Marina)가 눈길을 끌었다. 요트 650척을 수용할 수 있는 세련된 요트 정박지로, 마리나 옆으로 노천 레스토랑과 카페가 즐비했다. 노천카페의 유혹을 물리치고 카스카이스 해안선 끝에 자리한 등대 박물관(Santa marta lighthouse museum)까지 걸었다. 멀리서 보아도 시선을 끄는 파란 줄무늬 등대는 1868년에 세운 것으로, 등대 박물관은 이를 개조해 만든 곳이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정상에 오르자 그림 같은 카스카이스 해안선과 광활한 대서양이 펼쳐졌다. 등대지기가 되어서라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마냥 머물고 싶은 카스카이스를 뒤로한 채 다시 해안 도로를 달렸다. 한때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곳을 향해서. 북위 38도 47분, 서경 9도 30분에 있는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가 그 주인공. 호카곶이란 뜻의 이름처럼 대서양 쪽으로 돌출된 곶으로 유럽 대륙의 최서단이다. 14세기 말까지 포르투갈 사람들은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 여겼다. 카보 다 호카에 이르자 너머로 대서양이 넘실댔다. 언덕배기엔 등대가 서 있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ÇA.)” 거대한 기념비에 새겨진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시구를 읽기 전까지는. ‘끝’이란 ‘시작’의 또 다른 말임을 되뇌게 하는 구절을 읽고 나서야 카보 다 호카가 의미 있는 장소로 다가왔다. 세상의 끝에 있는 카페에 앉아 따듯한 커피로 차가워진 손을 녹이며 생각했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 막막한 시간을 마주하더라도 ‘시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야지. 루이스 카몽이스의 시에 용기를 얻어 망망대해로 나아간 포르투갈 탐험가들처럼.


Travel guide
이동 방법
리스본의 카이스두소드레역에서 기차를 타면 약 40분 만에 카스카이스역에 도착한다. 카스카이스에서 카보 다 호카로 갈 때는 카스카이스역 앞의 버스 터미널에서 1624번 버스를 타고 카보 다 호카 정류장에 내리면 된다.
약 40분 소요.
머물 곳
리스본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근교 여행지로 유명하지만, 여름이라면 카스카이스 구시가에 있는 호텔이나 에어비앤비를 잡고 해변에서 일광욕과 수영을 즐겨도 좋다.
먹을 곳
히베이라 해변에서 노사 세뇨오라 다 루스 요새로 가는 길에 자리한 레스토랑, 하이펀(Hifen)에서 해산물 요리를 즐겨보자. 아보카도와 완두콩을 더한 라가레이루 스타일의 문어 요리는 시그너처 메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