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디자인 여행 - 헤이트래블 - hey!Travel


밀라노 디자인 여행

Milan: a City of Design

유쾌하고 도발적인 미로를 탐험하는 즐거움, 밀라노 디자인 워크에 다녀왔다.
  • WRITING & PHOTOGRAPHY BY LEE KYOUNGJIN
2025년 05월 02일

올해로 3년째, 4월이 되면 밀라노로 향한다. 디자인 축제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시기의 밀라노는 유난히 매혹적이다. 거리마다 색과 소리, 형태와 아이디어, 사람과 물건이 뒤섞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나는 그 역동적인 흐름에 몸을 실은 채 30분 간격으로 이 전시장에서 저 전시장으로 뛰어다닌다. 올해 나의 디자인 워크 일정표에는 하루 최대 20개의 전시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일주일간 펼쳐지는 이 연례행사는 1961년부터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고 중단 없이 이어져왔다. 중심에는 국제가구박람회 ‘살로네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가 있다. “약 40만 명을 밀라노로 끌어들이는 생태계죠.” 살로네의 회장 마리아 포로는 이 박람회의 역할이 ‘상호 연결된 플랫폼’을 만드는 데 있다고 늘 강조한다. 디자인과 리빙 산업이 고도화된 네트워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일찍 간파한 결과, 살로네는 이제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박람회가 됐다. 거미가 줄을 엮듯, 전 세계의 디자이너, 브랜드, 아티스트, 저널리스트, 건축가, 큐레이터, 바이어, 디자인 학도들을 하나로 연결해온 결과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 때마다 도시는 디자인으로 만든 미로가 된다. 나는 그 미로 속에서 마음껏 길을 잃는다. 보고, 놀라고, 감탄하고, 가끔은 당황하면서 일주일을 보낸다. 호화로운 소파에 앉아보고, 평소 공개되지 않던 보석 같은 건축물과 빌라도 방문한다. 전시장에서 제공하는 네그로니도 홀짝이며 걷는다. 올해도 시작부터 마음을 다잡았다. 밀라노에서 필요한 건 오직 지치지 않는 체력이며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모든 감각을 활짝 여는 것!

세계적 브랜드의 살아 움직이는 디자인 쇼
올해 일정은 가구 브랜드 까시나(Cassina)가 디자인 듀오 포르마판타스마(FormaFantasma)와 함께 연 공연을 보는 것으로 시작됐다. 무대는 리리코 조르조 가버 극장(Teatro Lirico Giorgio Gaber). 연극적 퍼포먼스와 설치예술이 결합된 ‘스테이징 모더니티(Staging Modernity)’는 까시나가 모더니스트 운동에 참여한 지 6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젝트다. 오페라 연출가 파비오 체르스티히(Fabio Cherstich)와 협업해 만들었다. 1929년, 르코르뷔지에가 피에르 잔느레, 샤를로트 페리앙과 함께 ‘살롱 도톤’에서 ‘삶을 위한 기계(Machine à Habiter)’라는 모던 라이프 비전을 제시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이 무대에선 동물을 의인화한 배우들이 등장해 “우리는 동물이다. 우리와 함께 다시 현대적인 존재가 되어라”라고 외치며 ‘삶을 위한 기계’를 애도했다.
포르마판타스마는 극장 안에 살롱 도톤의 바닥을 재현했고, 그 위에 멧돼지와 여우, 새들이 움직이는 무대를 만들었다. 까시나가 제작해온 르코르뷔지에, 잔느레, 페리앙의 컬렉션 가구도 함께 설치됐다. 배우들은 산문과 노래를 오가며 동물의 목소리를 전했고, 인간의 삶과 도시 이주가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줬다. 포르마판타스마는 뛰어난 인사이트, 논리적 사고, 시대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듀오다. 살로네 델 모빌레의 가능성은 이들처럼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 다른 분야로 진입하려는 디자이너들의 질문으로 확장돼왔다. 이 기간 밀라노에선 우리 모두, 그들의 아이디어로 공들여 만든 무대 위에 함께 설 수 있다.

마리메꼬(Marimekko)와 라일라 고하르(Laila Gohar)가 협업한 아침 식사 이벤트는 귀엽고도 혼란스러웠다. 침대 위에 치즈가 놓여 있었고, 베개는 딸기 케이크처럼 생겼다. 정말로 누군가 베개를 먹으려다 멈칫하는 모습도 봤다. 마리메꼬가 펼쳐낸 이 작은 세계는 어릴 적 상상했던 소풍을 다시 꺼내놓은 것 같았다. 손끝으로 닿지 않는 과거의 감정들이 천과 색, 형태로 구현되어 있었다.
로에베(Loewe)의 전시는 늘 물건과 디자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드럽게 깨뜨린다. 지난해엔 전 세계 스물다섯 명의 작가와 함께 만든 조명 컬렉션이 화제가 됐다면, 올해의 주제는 티포트였다. 건축가 조민석의 티포트부터 아티스트 로즈 와일리의 작품까지, 개성 넘치는 찻주전자 20여 점이 모여 조용히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뜨거운 물을 담는 그릇이 이렇게 깊고 유쾌한 오브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행사, 미우미우(Miu Miu)의 문학 클럽에도 올해 다시 출석했다. 누가 디자인 위크에 와서 책을 읽을 거라 생각했을까? 낯선 이들과 나란히 책을 읽는 그 시간은 고요한 환희였다. 올해의 주제는 ‘A Woman’s Education’. 시몬 드 보부아르와 엔치 후미코의 작품을 함께 읽었다. 엄청난 속도와 발화량을 자랑하는 패널들의 낭독을 해석하느라 진땀을 뺐지만, 유서 깊은 도서관에서 1957년 일본 소설의 발췌문을 듣는 그 순간은 가슴 두근거리는 지적인 경험이었다.
매해 라 펠로타에서 열리는 에르메스(Hermès)의 전시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다. 올해 에르메스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절제된 장면을 연출했는데 나에겐 역대 가장 쿨하고 인상적인 시노그래피였다. 예술감독 샤를로트 마코 페렐망과 알렉시 파브리는 과거의 수공예 중심 설치물에서 벗어나 거대한 흰색 상자를 무대장치로 선택했다. 천장에 매달린 흰 상자들은 형광처럼 밝은 후광을 흰 바닥에 투사했고, 각 상자 안에는 에르메스의 최신 홈웨어 컬렉션이 담겨 있었다. 시각 요소를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공간 속에서 사물, 가구, 직물은 마치 생명을 얻은 듯 보였다. 좋은 디자인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푸오리 살로네의 놀라운 독립 플랫폼
까시나의 극장 공연부터 에르메스의 라 펠로타 전시까지, 앞서 이야기한 모든 쇼는 공식 행사인 살로네 델 모빌레 외부 프로그램인 ‘푸오리 살로네(Fuorisalone)’에 해당한다. 밀라노 전역은 물론 시내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인 바레도 지역까지 다양한 전시가 펼쳐지는데 그 수만 해도 수백 가지에 이른다. 그중 특히 눈에 띄는 플랫폼이 있다. 올해로 아홉 번째 에디션을 맞은 알코바 밀라노(Alcova Milano)다. 알코바는 밀라노 외곽 바레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 처음 마주했을 땐 “이게 뭐지?” 싶은 낯선 감정이, 곧 “어쩌면 이렇게 멋지지?”라는 탄성으로 바뀌는 순간이 반복된다.
알코바는 쇠퇴했거나 미완의 역사적 건물을 배경으로 삼는다. 큐레이터 발렌티나 치우피와 조지프 그리마가 공동 창립한 이 플랫폼은 “전시가 아니라 동시대 디자인을 포착한 하나의 스냅샷”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올해는 SNIA 공장, 파시노 온실, 빌라 보르사니, 빌라 바가티 발세키 등 네 곳에서 전시가 열렸다. 각기 다른 시대에 지어진 공간들은 분위기도 달랐다. 폐허에 가까운 파시노 온실에서는 시간의 흔적과 자연이 뒤섞이며 식물들이 전시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빌라 보르사니와 빌라 바가티 발세키는 작년에 이어 다시 알코바의 베뉴로 사용됐다.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현대 디자인의 조화는 쇠퇴한 도시의 미감을 더욱 부각시켰다. 알코바보다 1년 앞선 2005년, 또 다른 전시가 시작됐다. 바로 닐루파(Nilufar)다. 밀라노 디자인계의 대모로 불리는 갤러리스트 니나 야샤르(Nina Yashar)가 이끄는 스튜디오 닐루파의 창고형 갤러리 ‘닐루파 데포(Nilufar Depot)’는 시간 여행자가 수집한 보물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니나 야샤르의 뛰어난 안목으로 고른 빈티지 오브제와 현대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우아하면서도 미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매해 중앙 중정에서 열리는 특별 기획전도 놓칠 수 없다. 올해는 1970년대 금속 미학을 재조명한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이 그 주제였다.
내가 요즘 가장 즐겨 찾는 신생 플랫폼은 올해로 세 번째 에디션을 맞은 ‘캡슐 플라자(Capsule Plaza)’다. 캡슐 플라자는 전통 전시 형식에서 벗어난 실험실 같은 공간이다. 디자인과 문화, 산업을 아방가르드하게 융합하며 디자인 위크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작년 주제였던 ‘급진적인 감각(Radical Sensations)’은 이 플랫폼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파운더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레시오 아스카리는 공동 큐레이터이자 건축가인 폴 쿠르네와 함께 다양한 디자이너들을 초대해 서로 다른 시각과 아이디어가 충돌하는 장을 만든다.
밀라노의 상징적인 장소인 10 꼬르소 꼬모(10 Corso Como)에서 베르너 팬톤의 유산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렸다. 동시에, 서울의 디자인 스튜디오 ‘나이스워크숍(Niceworkshop)’과 ‘포맷(Format)’이 협업한 헤르조그 & 드 뫼롱의 작품을 선보이는 식이다. 전설적인 이름들과 새로운 세대의 이름을 나란히 한 무대에 올렸다.

바 바소의 네그로니
밀라노에서 보내는 일주일 동안 점심을 제대로 챙기긴 어렵다. 쇼에서 제공하는 간단한 핑거 푸드, 물, 네그로니, 약간의 샴페인으로 허기를 달래며 전시장을 바쁘게 오간다. 그 와중에도 꼭 들르는 바가 하나 있다. 바로 ‘바 바소(Bar Basso)’다. 바 바소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찾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전설적인 공간이다. 밀라노 중심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동네에 자리한 이 술집은 1933년 처음 문을 열었고, 지금도 옛 방식의 바텐딩을 고수한다. 밤 11시가 넘으면 바 바소는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 찬다. 여름날 을지로의 만선호프를 연상시킨다. 무려 1000명이 넘는 스탠딩 인파가 바 앞 보도와 원형 교차로까지 빼곡히 메운다. 내부로 진입해 “네그로니!”를 외치려면 매번 마음을 단단히 먹고 퇴로 따윈 없는 경주마처럼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망설이는 순간 술이 다 떨어져버릴 수 있으니까.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전설적인 바, ‘바 바소’. © LEE KYOUNGJI

바 바소의 시그너처는 사실 ‘네그로니 스발리아토(Negroni Sbagliato)’다. ‘잘못된 네그로니’라는 뜻이다. 1960년대, 바텐더가 진 대신 실수로 프로세코를 넣었는데 그게 오히려 대히트를 쳤다. 그때부터 이 칵테일은 바 바소의 대표 메뉴가 됐다. 1980년대, 영국 디자이너 제임스 어빈이 이 전설을 듣고 바 바소를 자주 찾기 시작했고, 이내 디자인계에 입소문이 퍼졌다. 어빈, 마크 뉴슨, 재스퍼 모리슨 등이 함께 이곳에서 파티를 열며, 바 바소는 ‘디자이너가 모이는 바’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까지도 디자인 위크 기간이면 수많은 디자인 관계자들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올해 우리 일행은 바 바소의 내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각자 네그로니 두 잔과 디저트를 먹으며 이 기록적인 밤을 마무리했다. 이 일주일의 여정 중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4월의 밀라노를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건 디자인은 단순히 형태나 색, 질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과 공간이 어우러진 예술이고, 사람들의 감정과 감각을 움직이는 힘이다. 이 도시를 걸으며 전시를 보고, 감탄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더라도 ‘깨달은 척’이라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디자인은 결코 큰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다가와 속삭인다. “봤어? 이렇게도 느껴볼 수 있어.”

글을 쓴 이경진은 매거진의 피처 에디터로 일하다가 <엘르 데코> 코리아의 재창간을 도맡으며 디자인과 사랑에 빠졌다. 스타일과 데커레이션을 넘어 무한한 범주로 표현된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일에 재미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