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평야 한가운데 4500만 원짜리 115년 된 폐가를 산 지 3년. 그사이 무궁무진하게 발전해온 나만의 ‘집의 쓸모’를 돌아본다. 3년 전만 해도 서울에서 도망치듯 이곳으로 내달려온 나에게 남아 있는 마음이란 그저 한없이 깊은 잠식. 특별히 슬픈 일이 있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엄청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당장 삶의 의미를 잃은 것처럼 멍해지곤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 도시는 나에게도 꽤나 차가운 격전지. 한동안 쉼 없이 달려왔던 바쁜 인생의 부작용으로 한순간에 마음이 경직되어 ‘모든 것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고 싶다. 한없이 혼자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여기다. 여기가 나의 쉴 곳이다’ 싶었던 곳이 지금은 사람들의 쉼터로, 마을 책방으로 사랑받고 있는 평야 위의 나의 집, 4500만 원짜리 농가주택. 10여 년간 비어 있던 이 집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버려진 집의 모양새가 마치 바쁘게 달려온 사이 방치된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의 방을 만난 느낌이랄까. 그래서 얼마가 들든, 언제 완성이 되든 포기하지 않고 이 집을 한번 고쳐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지금 이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으로.
그 무모한 마음먹기 한 번으로, 나의 인생은 백팔십도 달라졌다. ‘집을 고쳐보겠다’는 마음은 ‘내 마음을 고쳐보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고, ‘집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나를 포기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확장됐다. 그냥, 마음만 먹었을 뿐인데 놀랍게도 당장 그날부터 희한한 힘이 솟아났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 서른두 살의 직장인이었던 내 수중에 집값으로 지불해야 할 현금 4500만 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집을 사는 일이 엄청 희망찬 행동이었다기보단 자포자기에 더 가까운 심정이었다. 어차피 마이너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인생. ‘여기에 마이너스가 더해져봤자, 그러니까 망해봤자 뭐 크게 달라질 게 있겠어?’ 생각하니 덜컥 용기가 생겼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대출을 끼고 집 고치는 작업을 시작했다. 시작하고 나니 막상 못 할 게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의 모습이 바뀔 때마다 마음에서도 하나씩 희망이 자라났다. 버려진 장롱과 집기들을 주워다 어지럽게 늘어놓은 이곳에 나만을 위한 침실을 꾸며야지, 작은 방 하나엔 나를 위한 넓은 욕조를 만들어야지…. 남들이 말하는 효율, 쓸모 같은 요소 대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공간들을 하나씩 완성하다 보니 걱정이 쌓였던 자리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내가 나를 꽤 사랑하고 있구나.’ 평생 모르고 살아온 생각이 들며 나를 믿는 마음이 집과 함께 커져갔다.
김제의 폐가를 고쳐 삶의 터전으로 삼은 지 3년, 달라진 것은 집 한 채가 아니라 마을 전체 그리고 나의 삶이다. 버려진 집에서 내 집을 거쳐 이제는 구색을 갖춘 서점이 된 이 공간은 열두 가구가 섬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서 매일 새로운 손님을 맞는다. 서울, 분당, 울산, 부산… 전국 각지에서 이 외딴 시골까지 찾아오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쉼이, 삶 속 여백 같은 시간이 필요한 이들이 이렇게 많구나 새삼 느낀다. 오로지 홀로 있는 시간이 간절했던 나는 어느새 이 마을과 나의 집에 매일 새로운 이가 찾아오는 일상에서 치유를 받고 있다. 굳이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같은 감정을 품고 사는 이들과 통하는 느낌이랄까. 우리는 ‘나도 그렇게 힘든 때가 있었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만으로 공감과 위로를 주고받는다.
멀리서 우리 집에 찾아온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있다. “이 서점에선 도무지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기껏 마련해둔 ‘책 읽는 자리’에 앉으면 창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의 풍경이 계속 다정한 말들을 건넨다. “괜찮아?” “잘 지냈어?” “좀 쉬어 가.” 우리 집 강아지, 리본(3세)이도 그걸 아는지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그 검은콩 같은 눈을 반짝이며 창밖을 바라본다. 책방 문을 연 지도 벌써 석 달째. 지난번엔 동네 어머님 한 분을 모시고 한글 교실을 시작했다. 이제 나의 집은 마을에 없으면 안 될 사랑방이 되어가는 중이다. 처음엔 ‘이 촌에 뭐 볼 게 있어서 내려왔을까?’ 하고 바라보던 마을 어르신들의 시선도 꽤 달라졌다. 시시하고 심심한 시골, 그런데 왠지 사람들이 자꾸만 찾아와 좋아하는 이곳, 아마도 당신들이 태어나 평생 살아온 별 볼일 없는 동네가 꽤 어여쁘고 근사한 곳이었구나, 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3년 사이, 만나는 사람마다 인상이 한결 순해졌다는 칭찬과 함께(풍채가 달라져서일 수도 있지만) 이런 질문을 건넨다. “언제 서울로 돌아와요?”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아직, 아직이오. 할 일이 많이 남았거든요.” 집은 일찌감치 다 고쳤는데, 이 시골, 논밭만 덩그러니 있는 동네에서 나는 무슨 할 일이 더 남은 걸까? 이제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세 살 아기 같은 집을 홀로 두고 훌쩍 도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진한 미련? 등기부등본상으론 118년이나 된 고택 중 고택이지만, 내가 이 집을 돌보기로 마음먹은 건 고작 3년. 이제 이 집은 나와 맺은 깊은 관계를 넘어 바깥 세계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좋은 쓸모와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 세기하고도 10년이 더해지는 긴 세월 동안 수도 없이 주인이 바뀌고 버려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리를 지킨 이 집의 변화와 성장이 내겐 꽤나 눈물겹다. 그리고 오늘도 위로를 받는다. 아무리 오래되고 낡은 것이라도, 손보고 매만지고 아껴주다 보면 제 나름의 쓸모를 찾아간다. 모든 물건이, 모든 생명이 그렇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 나도 그렇다. 이 집이 앞으로도 계속 사랑받는 책방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와 내가 선택한 두 번째 터전, 거기에서 만난 나를 담은 집의 성장기는 나와 우리를 끊임없이 위로한다.
최별은 시골살이 유튜브 채널 ‘오느른’을 만들었다. MBC PD라는 직업의 장점을 십분 살려 집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일을 벌이는 중.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유키 구라모토를 김제로 초대하고 집을 서점으로 바꾸는 등 그의 주거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