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단골집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RYU JIN, LEE JIHYE
  • PHOTOGRAPHY BY JEON JAEHO

이방인의 단골집

A Home Away from Home

이방인과 현지인의 중간에 선, 한국에서 오래 산 외국인들은 어디에서 향수를 달래고 추억을 쌓고 소속감을 느낄까? 서울을 여전히 낯선 눈으로 경험하는 이들에게 ‘단골’이란 단어의 뜻을 소상히 알려준 후, 그 의미에 가장 가까운 공간을 물었다.
  • written by RYU JIN, LEE JIHYE
  • PHOTOGRAPHY BY JEON JAEHO
2025년 05월 07일

엠마의 작업실, 이리 카페

엠마 주노 스파크스 Emma Juno Sparkes, 한국살이 15년 차, 콘텐츠 에디터
상수동 ‘이리 카페’의 SNS 피드에 가장 최근 올라온 문장. “매일 낮과 밤, 이리 카페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낮에는 조용히 홀로 작업하는 분들이 많고, 밤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이 많습니다. 낮에는 멜로디 위주의 노래가 흐르고, 밤에는 그루브 위주의 노래가 흐릅니다. 그렇게 이리는 21년 동안 흐름을 이어왔습니다.” 2014년부터 한 번도 이 동네를 떠난 적 없는 순정 마포구민, 엠마 주노 스파크스가 이리 카페를 단골집으로 꼽은 까닭도 이와 같다. “이리 카페(이하 이리)를 처음 알게 된 건 일러스트레이터 ‘무나씨’와의 인터뷰 때였어요. 그 작가가 좋아하는 작업 공간으로 여기를 추천했거든요. 안으로 들어섰는데 제가 열광하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온갖 예술·건축·디자인 책들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 저마다 자기 작업에 열중한 사람들의 모습에 마음을 뺏겼죠.” 영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후 2010년 한국에 처음 발을 내딛은 엠마에게 이리는 많은 것을 내어줬다. “서울에서 내 삶을 쌓기로 결심한 후 한국어를 공부하는 게 가장 급선무였죠. 이 책장 앞에 앉아 한국어를 공부하고, 마음이 적적할 땐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영어 교사에서 기자로 직업을 바꿀 때, 그 밖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을 때마다 이곳에서 무수한 시간을 보냈죠. 말하고 보니 이리는 제가 생각보다 실험적인 도전을 꽤 즐긴 사람이란 걸 알게 해준 곳이네요.” 이리의 추억을 줄줄이 읊던 엠마가 보여준 팔 안쪽엔 오얏꽃 타투가 선명하게 만개해 있었다. “한국의 전통 무늬를 정말 좋아해요. 공예 박물관에 가는 걸 즐기는 이유죠. 이리에도 고가구와 창살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 오래된 것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제 향수를 자극한 것 같아요. 여기에 있으면 런던에서 보낸 대학 시절이 떠오르거든요.” 공간도, 가구도, 사람도, 파는 것도 다르지만 느낌은 꼭 닮은 곳. 엠마에게 이리는 사랑하는 런던과 그리운 시절을 불러오는 촉매다.
주소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3길 27


엠마의 단골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저는 이곳을 ‘한국의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장인들이 만든 수준 높은 공예 예술품에서 정말 많은 영감을 받았거든요. 무료 입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주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4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완전히 과소평가된 박물관이에요. 가톨릭 역사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지만 건축미, 전시 공간의 미디어아트 등 수준이 정말 높습니다.”
주소 서울시 중구 칠패로 5

스코프
“런던이 그리울 때 가는 곳이에요. 튜브 노선 포스터가 붙은 벽, 빅토리아 스펀지 케이크 등이 향수를 자극하죠. 2층에 앉아 창밖으로 한옥 지붕을 바라보며 영국식 디저트를 맛볼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태어난 고향과 내가 선택한 고향이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
주소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49 1층

해미의 안식처, 라몽림

해미 클레멘세비츠 Rémi Klemensiewicz 한국살이 12년 차, 사운드 아티스트
마포구 합정동의 간판 없는 식당 ‘라몽림’. 인근에서 오래 산 주민들조차 “그런 데가 있었어?”라고 할 만큼 생경한 이름이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반대의 말이 나온다. “어떻게 이런 데를 몰랐지?” 탁 트인 합정역 대로변 한가운데라는 입지가 ‘숨은 맛집’이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의 사운드 아티스트 해미 클레멘세비츠는 바쁜 일상 때문에 매끼 신경 써서 챙겨 먹지 못한다. 올리브유를 곁들인 샐러드, 가까운 분식집의 김밥,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자장면 같은 것이 식사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그가 ‘아 오늘은 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바로 라몽림이다.
“공연과 전시로 항상 바쁩니다. 성격상 식사에 적극적인 편도 아니죠. 약 5년 전 친구가 라몽림을 처음 소개해준 뒤 기운을 북돋워주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마다 와요. 거리에선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마치 누군가의 집에 초대된 듯한 아늑한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일부러 꾸민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곳 같죠. 음식도 가정집에서 먹는 것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맛있습니다. 뭔가 많이 시도해보고, 실패하고, 다시 만들어보는 과정이 상상되는 맛이죠. 그래서 더 매력 있고요.”
라몽림은 2015년 문을 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인스타그램에 오픈 시간을 공지한다. 어느 날엔 5시, 어느 날엔 7시에 문을 열고 닫는 시간도 제각각이다. 메뉴는 바질페스토소고기, 새우크림커리, 볼로네제치즈밥, 버섯크림리소토, 소고기고추잡채, 시금치프라타타, 굴라시 등.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여닫는 게 성격과 안 맞다”는 쿨한 라몽림의 주인장은 사실 10여 년간 홍대 인근에서 카페 겸 술집을 운영했다. 홍대를 거점으로 두고 활동하는 음악가들의 참새 방앗간 같은 곳이어서 공연 후 뒤풀이도 종종 열렸다. 덕분에 라몽림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음악가들의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된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전날엔 인디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공연 뒤풀이가 새벽 5시까지 이어졌고, 며칠 뒤엔 가수 하림이 불쑥 찾아와 음식을 먹고 기타를 연주하고 갔다.
“이렇게 재미있는 곳인 줄 몰랐습니다. 그저 라몽림의 분위기와 음식을 즐기고 나서면, 마음이 가라앉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았거든요. 알고 보니 음악의 기운이 흐르는 곳이었네요. 어쩌면 그게 저를 끌어당긴 이유였나 봐요.”
주소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13 204호


해미의 단골 공간

을밀대
“평양냉면은 면을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로 꼽는 제 소울 푸드입니다. 을밀대는 상수동이나 합정동 등 마포구에서만 살았던 제가 평양냉면을 먹고 싶을 때마다 가장 익숙하게 찾는 곳이죠.”
주소 서울시 마포구 숭문길 24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실험적이고 영감 가득한 공연과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만큼이나 광주에도 자주 머뭅니다. 현재 제 전시 «Crossing the Line: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도 6월까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답니다.”
주소 광주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닻올림
“즉흥·실험 음악 중심의 소규모 공연장으로, 매달 1~2회 공연을 통해 국내외 아티스트들의 실험적 사운드 퍼포먼스를 선보입니다. 한국 생활 초기엔 저도 이곳에서 자주 공연했고, 지금도 시간 날 때마다 들르는 곳이에요.”
주소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 29 지하

나리카와의 고향의 맛, 쯔루하시 후게츠


나리카와 아야 Narikawa Aya, 한국살이 8년 차, 영화 칼럼니스트 & 작가
웃기고 호쾌한 오사카 사람들이 까다롭게 구는 분야가 있다. 미식. 일본의 부엌으로 불리는 맛의 고장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합격 목걸이를 받으려면 고품질 식재료는 기본 중 기본, 저렴한 가격과 유머 감각, 활기찬 분위기까지 갖춰야 한다. 이 도시 사람들의 미식에 대한 집념은 일본의 속담이나 풍설이 증명한다. “오사카 사람들은 먹다가 망하고 교토 사람들은 입다가 망한다” “맛있는 건 (다) 오사카에 있다” 나리카와 아야는 그 유명한 오사카 출신으로, ‘단골’을 물어봤을 때 두말없이 맛집을 내놨다. “아무래도 오코노미야키를 빼놓을 수 없죠. 오사카에서도 즐겨 먹었던 전문점이 서울에도 있거든요. 거기에서 만날까요?” 명동에 있는 ‘쯔루하시 후게츠’ 입구에서 그를 처음 마주한 지 10분 만에 우리 앞엔 후게츠 정통 오코노미야키와 야키소바, 숙주나물말이가 신속하게 부려졌다. 첫 대면의 어색함을 풀 대화 하나 없이 본론으로 진입했다. “왜 여기인가요?” 후게츠에 부치는 그의 예찬은 양배추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에선 양배추를 아낌없이 써요. 밀가루를 많이 쓰는 곳도 있는데, 그러면 식감이 거칠거든요. 얇게 저미듯 채 썬 양배추를 얼기설기 쌓아 뚜껑을 덮는 대신 철판의 열기만으로 속까지 부드럽게 익히는 조리법이 본토 맛을 내는 비결이죠. 합리적인 가격도 빼놓을 수 없고요.” 아사히신문에서 9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가 2017년, 한국 영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한국에 정착한 그는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까지 마친 영화인이다. 그가 나눠준 단골집 목록엔 ‘혀’와 ‘위’가 솔깃한 맛집이 즐비했지만 눈길을 끈 건 나중에 차리고 싶은 꿈의 공간이었다.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 <재미있는 색이름 탄생 이야기> 등의 책을 내며 일본에 한국 영화와 문화를 전파하고 있는 그는 가까운 미래에 그 반대의 일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책과 영화를 소개하고 독립영화도 상영하는 북 카페를 열고 싶어요.” 그곳이 자신의 진짜 단골집이자 영화와 일본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단골집이 될 날을 기대하는 나리카와의 눈이 손에 든 맥주잔에 부딪히며 반짝 빛을 냈다.
주소 서울시 중구 명동8길 21-5 해암빌딩 2층


나리카와의 단골 공간

동아리 정동본점
“스키야키, 호르몬 나베, 우나기동 등을 파는 이자카야예요. 가격이 조금 비싸 자주 가진 못하고 특파원이나 선배님이 ‘식사를 쏜다’고 하실 때 모시고 가는 곳입니다.”
주소 서울시 중구 정동길 12-6

텟판타마고
“홍대에 사는 일본인 기자 친구가 자신의 단골집이라고 데려가줘서 알게 된 곳이에요. 야키소바에 대창을 넣어 조리한 대창 야끼소바가 인상깊었어요. 일본에선 못 먹어본 일본 음식이거든요. 명란젓 구이도 좋아하고요.”
주소 서울시 마포구 잔다리로6길 34-12

라이카 시네마, 카페 MO9
“‘스페이스 독’이라는 복합 문화 공간 안에 자리한 독립 영화관 ‘라이카 시네마’와 그 위에 있는 ‘카페 MO9’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특히 별의 궤도를 이미지화해서 만들었다는 회전 컨베이어로 공간을 꾸민 카페가 아주 독특해요. 라이카푸치노, 인절미 크림라떼도 맛이 좋고 저녁엔 주류 메뉴도 즐길 수 있어요. 술 한잔 걸치고 1층으로 내려가 영화에 흠뻑 취해보세요.”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로 8길 18

마이클의 추억 보관소, 부원면옥


마이클 울린 Michael Wolin 한국살이 13년 차, 셰프
강한 자극 없이 은은한 육향과 메밀 면의 질감이 입안에 오래 머무는 평양냉면. 깊고 절제된 이 맛은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재료의 균형과 조합을 중시하는 외국인 셰프라면 더욱 매력을 느낀다. 서울 망원동에서 미국식 가정식 레스토랑 ‘마이클 식당’을 운영 중인 마이클 울린 셰프 역시 평양냉면을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로 꼽는다. 그의 단골집은 남대문 ‘부원면옥’이다. “이곳은 평양냉면 마니아인 제 입맛에 가장 잘 맞는 곳이에요. 특히 국물이 좋아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감칠맛이 있거든요. 시장 한복판이라 북적이는 분위기도 좋고, 가격까지 저렴하니까요.”
그에게 부원면옥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아내 김나무 씨다. 연애 시절, 그녀가 먼저 이곳의 평양냉면을 맛본 뒤 마이클을 데려갔고, 그날 이후 마이클이 더 자주 찾는 식당이 됐다. 맛있는 집을 발견하면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 부부는 친구, 동료 누구든 이곳으로 데려와 함께 식사하고 반주도 곁들였다. 마이클이 자주 주문하는 메뉴는 평양냉면과 빈대떡 그리고 닭무침이다. “빈대떡이나 닭무침은 사이드 메뉴지만, 냉면과 함께 먹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조합 같아요. 물론, 가끔은 소주 한잔도 빠질 수 없고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마이클은 어릴 적부터 한국 음식에 거부감이 없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잡채, 갈비찜 같은 음식은 모두 어머니의 손맛으로 접해 익숙했다. 차가운 면 요리가 낯선 외국인도 많지만, 마이클에겐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다만 평양냉면만큼은 조금 달랐다. 사진작가로 일하며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을 찾았을 때 처음 맛본 그 음식은, 익숙함 속의 낯섦을 품고 있었다. 그 깊은 맛은 마이클을 새로운 미식 세계로 이끌었다.
“부원면옥은 아내와 함께 서로의 지인을 만나고, 자연스럽게 추억을 쌓아온 공간이에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아내와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에게 평양냉면과 부원면옥은 입맛보다 마음에 먼저 각인된 음식이자 장소다. 한 그릇 안에 연애 시절, 사람들과의 따뜻한 순간이 저장되어 있다. 다시 찾을 때마다 그 맛은 그 시절의 추억을 함께 불러낸다.
주소 서울시 중구 남대문시장4길 41-6 2층


마이클의 단골 공간

Slow Supper Club
“레스토랑 겸 바인 이곳은 한국에서 가장 맛있는 말레이시아 음식 전문점이에요. 무슬림 명절인 이드(Eid) 시즌에만 선보이는 특별 메뉴는 매년 제 기대 리스트에 올라 있죠.”
주소 서울시 마포구 포은로6길 39 , 104호

맛있는 칼국수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에요. 투박하지만 진한 육수, 탱글탱글한 면발, 넉넉한 양까지 제 취향에 딱 맞아요.”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천길 150 1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여전히 사진작가의 꿈을 품고 있는 제게 이곳은 창작의 감각을 다시 깨우는 장소예요. 쉬는 날이면 아내와 들르기도 하고, 가끔은 그저 오래 머물기도 해요.”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