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 Rich Museums
슈퍼 리치 미술관들
더 브로드 3층. 1950년대의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션버그, 사이 톰블리를 지나 1960년대의 로이 리히텐슈타인, 에드 루샤,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데미안 허스트, 키스 해링에 이르렀을 때 바보 같아 보일 걸 알면서도 도슨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거 다 진짜 작품 맞는 거죠?” 내 헛소리의 의도를 간파한 그가 매끄럽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더 브로드는 설립자인 일라이(Eli)와 이디스(Edythe) 브로드 부부가 반 세기에 걸쳐 수집한 2천여 점의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둘은 LA를 세계적인 예술 도시로 만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헌신했죠.” 더 브로드 홈페이지에는 브로드 부부가 렌초 피아노(Renzo Piano)에게 건축을 의뢰하고 혁혁한 현대미술 작품을 사들이는 데 6천만USD를 썼다고 안내한다. 826억 5천만원. 예술을 논할 때 돈 얘기를 운운하는 것이 딱히 고상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도시를 예술로 부흥시키려는 원대한 뜻을 품은 억만장자의 방대한 컬렉션 앞에서 자본의 은총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호가 천문학적인 기부금과 정성스럽게 수집한 컬렉션 기증으로 세운 미술관들은 LA의 예술 생태계를 풍요롭게 채웠다. 석유왕 폴 게티와 기업가 아르망 해머는 각각 게티 센터(Getty Center) & 게티 빌라(Getty Villa), 해머 뮤지엄(Hammer Museum)을 설립해 LA의 예술 신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 LA의 아트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티엔 연간 180만여 명의 방문자가 찾아 고흐, 세잔, 드가, 마네, 모네, 피카소 같은 쟁쟁한 예술가의 작품과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로버트 어윈의 정원을 한 동선에서 감상하는 호사를 만끽한다. UCLA가 운영하는 해머 뮤지엄은 여성, 신인, 지역 예술가를 전폭 지원하는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LA의 아트 스펙트럼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2 게티 센터에선 미술뿐 아니라 건축, 정원을 주제로 한 도슨트 투어도 운영한다.
3 게티 센터엔 유럽 미술작품과 장식 예술품이, 게티 빌라엔 고대 미술품과 유물이 모여 있다.
4 루나 루나에서 만난 장 미셸 바스키아의 대관람차.
수치로 압도하는 미술관 중 으뜸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 오브 아트(Th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LACMA), 이하 라크마)다. 미국 서부에서 가장 큰 규모인 15만 점의 작품을 소장한 라크마는 1965년에 개관했지만 지속적인 개축과 신축, 진보적인 전시 큐레이션으로 젊음과 새로움을 갱신한다. 렌초 피아노가 개축한 레스닉 파빌리온(Resnick Pavilion)의 파사드와 마주하는 광장엔 1920~30년대 LA의 밤거리를 밝힌 가로등 202개로 만든 크리스 버든(Chris Burden)의 와 수많은 팬을 거느린 아이웨이웨이(Ai Weiwei)의 12간지 조각상 이 기념 사진을 남기려는 방문객들의 호위를 받으며 우뚝 서 있다.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가 설계해 유명세를 탄 신축 전시관은 올해 중 개관을 목표로 막바지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루나 루나(Luna Luna)는 LA에 오기 전에 가장 기대했던 장소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그림으로 가득한 대관람차, 키스 해링이 만든 회전목마, 데이비드 호크니의 파빌리온, 살바도르 달리가 만든 미로를 만날 수 있는 놀이 공원”이라는 소개말에 혹하지 않을 이가 있을까? 1987년 오스트리아 예술가이자 작가, 팝스타인 안드레 헬러가 친구들과 함께 만든 이 테마파크는 자금난, 소유권 등 복잡한 문제로 개장 13주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잊혀진 작품을 세상 밖으로 다시 꺼낸 구원자는 힙합 뮤지션 드레이크(Drake). 5월 12일을 마지막으로 LA를 떠나는 이곳에서 달리가 치밀하게 설계한 미로 ‘거울의 방’과 호크니가 만든 ‘마법의 나무 숲’같은 공간을 부지런히 들락이며 미련과 흥분으로 뒤엉킨 시간을 보냈다. 루나 루나는 사라지지만, LA의 돈 많은 예술 애호가들이 만든 뮤지엄들은 쌓이는 기부금, 기증작과 함께 날로 번창하고 있다.
Meeting the Movie Moment
영화 같은 순간을 만나는 장소들
LA의 역사적인 건축물·장소·지역을 지키고 활성화시키는 로스앤젤레스 컨서번시(The Los Angeles Conservancy)는 할리우드 동쪽, 선셋 드라이브에 위치한 비스타 시어터(Vista Theatre)를 “저명한 극장 건축가 루이스 A. 스미스가 설계했으며 스페인 양식의 외관, 이집트를 테마로 꾸민 내부가 독특한 조화를 이루는 역사적인 장소로 1923년에 문을 열었다”고 소개한다. 비스타 시어터의 공식 홈페이지엔 이런 정보 대신 현재 상영작 목록과 티켓 예매처만 대문짝만 하게 내걸려 있다. 이 공간이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가 2021년에 인수해 2023년 11월에 새롭게 개관한 곳이라는 정보는 왜 대놓고 알려주지 않는 걸까? 극장 앞에서 만난 LA관광청의 부청장 빌 카즈가 이 사실을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옛 모습을 간직한 빈티지 극장’이라는 감상만 갖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개관 100주년을 갓 넘긴, 할리우드의 역사를 거의 전부 지켜본 이 상징적인 장소에서 옛날 영화 마니아로 이름 높은 타란티노는 필름 영화만 상영한다는 선언을 했다. 그가 파리에 갈 때마다 종종 찾았던 시네마 클럽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비디오 아카이브 시네마 클럽’은 타란티노가 소장한 VHS 테이프와 16mm 프린트로 쉽게 접하기 힘든 옛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커뮤니티다. 빈티지 극장의 세계에 좀 더 파고들고 싶은 이에게 LA는 풍부한 선택지를 제시한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자신의 취향을 100% 반영해 상영작을 프로그래밍하는 뉴 베벌리 시네마(New Beverly Cinema), 1940년대부터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할리우드 영화인의 사랑을 받아온 에어로 시어터(Aero Theatre), LA의 유서 깊은 영화 커뮤니티가 이글 록(Eagle Rock)의 100여 년 된 극장을 인수해 문 연 비디오츠(Vidiots) 등이 취향 깊은 시네필의 선택을 기다린다.
2 1923년에 문 연 비스타 시어터의 레트로 스타일 간판
예전엔 영화를 주제로 하는 여행을 배우 이름을 새긴 별이 펼쳐진 워크 오브 페임(Walk of Fame)을 걷거나 유니버셜 스튜디오 할리우드, 파라마운트 픽처스 스튜디오에서 영화 세트장과 소품 창고를 구경하는 일정으로 채웠지만 지금 이 도시를 방문한 이들은 새 랜드마크로 향한다. 2021년 다운타운의 뮤지엄 로(Museum Row)에 들어선 아카데미 뮤지엄 오브 모션 픽처스(Academy Museum of Motion Pictures)는 영화와 관련한 모든 것을 모아둔 박물관이자 극장, 체험관이다. 효율적인 동선을 추구하는 관람객들은 5층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뮤지엄을 설계한 렌초 피아노 건축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며 할리우드 사인, 게티 센터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돌비 패밀리 테라스가 꼭대기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2층에서 4층 사이 공간에선 감독과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다양한 미디어로 표현하는 특별전, 영화 제작기법과 장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품, 세계관 등을 탐색하는 전시가 펼쳐진다. 전시에 집중하다 뇌가 피곤해진 이들은 오스카 익스피어리언스(The OscarsⓇ Experience) 섹션으로 피신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할리우드 돌비 극장을 재현한 무대에서 금빛 오스카를 들어올리는 배우의 짜릿한 기분을 경험할 수 있는 몰입형 체험 시뮬레이션이다. 뮤지엄에서 긴 시간을 보낼 여유가 있다면 첨단 상영 장비와 시스템을 갖춘 데이비드 게펜 극장(David Geffen Theater), 아트 하우스 스타일로 꾸민 테드 만 극장(Ted Mann Theater)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도 놓치지 말자.
Exploring the Analog & Digital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경험하는 음악 세계
미국음반산업협회(RIAA)가 지난 3월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3년 미국에서 레코드판 판매량은 CD 판매량을 완전히 넘어섰으며 총 4천300만 장의 레코드판이 팔렸다. LP판이 14억 USD 규모의 시장을 거느리고 있다는 뉴스를 찾아낸 덕에 LA에서 끝내 찾지 못한 답이 속시원하게 해결됐다. 이 도시에 옛 유물이 된 레코드숍이 왜 그렇게 많은지 말이다. 그와 동시에 바이닐 디스트릭트에서 11년간 자리를 지켜온 더 레코드 팔러(The Record Parlour)의 대표 채드윅 헤머스(Chadwick Hemus)가 한 말이 뇌리 위로 겹쳤다. “저는 신뢰하기 어려운 출처의 음반 판매량 숫자보다 바이닐이라는 포맷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LP플레이어와 바이닐 제조공장의 급성장은 이 시장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지표였죠.” 매장을 빈틈없이 채운 10만여 장의 LP판은 대부분 그가 직접 수집한 컬렉션으로 레드 제플린, 너바나, 쳇 베이커, 크라프트베르크, NWA 등 록, 재즈, 일렉트로닉, 힙합 등을 아우르는 명반부터 희귀 컬렉션, 소량의 신보로 구성되어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1950~60년대 빈티지 앰프와 마이크, 테이프 머신과 레코드 녹음 장비 등은 이곳이 LA의 음악애호가, 뮤지션들 사이에서 10년 넘게 꾸준히 사랑받는 결정적 이유다. “이곳은 레코드판을 사러 올 뿐 아니라 뮤지션을 만나고 공연을 보고 음반을 만드는 등 음악이라는 개념 안에 포함된 모든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할리우드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일대에 자리한 바이닐 디스트릭트(Vinyl District)를 비롯해 LA 시내 곳곳엔 더 레코드 팔러처럼 고유한 개성이 넘치는 레코드숍이 무수하다. 하이랜드 파크(Highland Park)의 아로요 레코드(Arroyo Records), 리틀 도쿄의 고잉 언더그라운드 레코드(Going Underground Records), 산타모니카 지역의 레코드 서플러스(Record Surplus) 등이 그 예. 아메바 뮤직(Amoeba Music)은 그중 랜드마크이자 구심점이다. 당신이 ‘음악’이라는 예술 장르 안에서 무엇을 ‘구매’하길 원하든 이곳에 다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약 100만 장으로 추정하는 최신 팝 음반과 빈티지 클래식 바이닐, 영화 DVD, 음악 잡지와 아트 포스터, 록, 재즈, 캘리포니아 사운드, 팝, 힙합 등 각 신을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새겨진 티셔츠나 소품 등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레코드숍을 찾은 이들과 함께 공간 구석구석을 꽉 채운다.
4,5,6 바이닐 디스트릭트의 랜드마크 아메바 뮤직.
레코드판으로 둘러싸인 음악 공간에서 ‘아날로그’에 충분히 심취했다면 ‘디지털’ 세계로 넘어갈 차례다. 그래미 뮤지엄은 그래미 어워즈의 역사와 수상 뮤지션의 세계를 아우르는 전시 외에도 음악이라는 매체와 산업의 ‘A to Z’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다채로운 워크숍과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LA를 음악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 수많은 이유 가운데 ‘감상 이상의 경험’이야말로 가장 설득력 높은 근거가 아닐까? 음악이 탄생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음악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커뮤니티, 온갖 장르를 구애 없이 접할 수 있는 인프라 등은 확실히 LA가 가진 매력적인 자산이다.
Guide for Roaming Reader
문학의 낭만을 찾아서
“뭘 기다리나요? 우리는 영원히 여기에 있지 않을 거예요.” 라스트 북스토어(The Last Book Store)의 웹사이트 대문에 걸린 이 문구를 보고 빠듯한 일정을 쪼개서라도 꼭 들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약 2천44m²(620평) 규모의 공간을 책으로만 가득 채운,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책방이 당장 다음 주에 사라져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서점’이라는 비장함이 느껴지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다운타운 한복판, 목 좋은 곳에만 들어선다는 옛 은행 자리에 위치해 있다. 스물한 살에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창립자 조시 스펜서(Josh Spencer)의 인생처럼 다락방에서 시작한 라스트 북스토어는 불황, 무관심, 온라인 서점, 팬데믹 같은 좌절을 극복하며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서점이 내세우는 자랑은 ‘엄청나게 많은 책 보유량’이지만 방문객들은 다른 걸 더 좋아한다.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눈길을 빼앗는, 책으로 빚은 장엄한 터널과 조형물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 말이다. 스스로를 괴짜라고 말하는 조시는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호그와트와 빼닮은 이 공간에서 100년 된 건물 구석에 숨은 귀신과 옛 은행의 금고를 찾아보라는 당부로 디지털 중독자(혹은 독서불능자)들의 메마른 상상력을 자극한다.
2 멜로즈 트레이딩 포스트에도 ‘문학’을 주제로 한 부스가 많다. 중고책방에서 독서에 열중한 로컬.
책방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있는 독립 서점 스카이라이트 북스토어(Skylight Book Store)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로컬들을 보며 문학과 LA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을 접었다. 구글을 조금만 뒤져보면 이 도시에도 런던의 셰익스피어, 프라하의 카프카처럼 근사한 짝꿍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문학 팬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이름은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할리우드 대로의 판타지 극장 옆에 자리한 프롤릭 룸(Frolic Room)은 부코스키의 아지트다. 드 롱프레 애비뉴(De Longpre Avenue)의 월 임대료 29USD짜리 낡은 아파트에 살던 그는 집에서 3km 거리에 위치한 이 바에서 종종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그가 ‘빨리 취한다’는 이유로 좋아한 칵테일 보일러메이커를 주문한 후 등단작 <우체국>을 읽는 시간을 가져보자. 레이먼드 챈들러의 팬들은 그의 작품에 페르소나처럼 등장하는 필립 말로의 사무실, 카후엔가 빌딩의 실제 무대를 찾아간다. ‘레이먼드 챈들러 스퀘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할리우드 대로(Hollywood Blvd)와 카후엔가 대로(Cahuenga Blvd) 사이에 위치했다. 1919년에 문을 연 무소 앤 프랭크 그릴(Musso & Frank Grill)은 챈들러가 즐겨 찾던 식당으로 할리우드 배우들의 단골집, 그리고 완벽한 마티니로 유명하다.
도서관은 LA가 숨겨둔 보물이다.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그린 벽화로 뒤덮인 아름다운 로툰다를 가진 LA 센트럴 라이브러리(LA Central Library), 120에이커에 달하는 정원 곁에 위치한 헌팅턴 도서관(The Huntington Library), 오스카 와일드를 비롯한 동시대 작가를 중심으로 유럽의 희귀 도서와 필사본 컬렉션을 소장한 윌리엄 앤드루스 클라크 메모리얼 라이브러리(William Andrews Clark Memorial Library) 등 매력적인 책의 성전이 가득하다. 이곳을 충분히 경험하고 싶다면 코리아타운에서 순두부 찌개를 먹거나 멜로즈 애비뉴에서 브런치 카페를 찾는 관광객의 일정을 포기하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