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인 예술 실험실, 렌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RYU JIN
  • PHOTOGRAPHY BY CHO SOOMIN
  • SUPPORTED BY LE VOYAGE A NANTES, DESTINATION RENNES, Atout France

창의적인 예술 실험실, 렌

Laboratoire d’art et de créativité, Rennes

22만 명의 인구 중 7만 명이 학생인 대학 도시 렌은 도시 전역이 캠퍼스다. 젊은 도시 특유의 활기와 실험정신, 호기심과 열의는 렌의 독립 예술과 비주류 예술 신을 활성화시켰다. 프렌치 스타일의 창의를 보여주는 렌의 개성 넘치는 로컬과 매력적인 공간들을 만났다.
  • written by RYU JIN
  • PHOTOGRAPHY BY CHO SOOMIN
  • SUPPORTED BY LE VOYAGE A NANTES, DESTINATION RENNES, Atout France
2025년 07월 01일

Pourquoi Rennes?

예술로 렌에 스며들기

렌은 실험적인 예술가들, 독립 서점과 갤러리, 크고 작은 인디 음악 페스티벌로 이름 높은 도시다. 디자이너, 사진가, 여행 가이드가 추천하는 예술로 렌의 정수를 만나는 방법.

모레앙 로뱅 Maureen Robin | 디자이너 Designer

“빈티지 숍과 카페를 운영하며 옷을 디자인하고,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을 큐레이션해 소개하고 있어요. 렌은 이런 일을 제대로 해볼 수 있는 도시죠. 이 도시 사람들은 독립 예술을 사랑하고 새로운 것에 열려 있으며 지속가능성에 아주 관심이 높거든요. 그래서 지역에서 탄생한 브랜드, 저탄소, 지역 제철 식재료로 만든 음식의 문화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요. 렌다운 분위기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매주 토요일 리스(Lices) 광장에서 펼쳐지는 리스 시장(Le Marché des Lices)에 가보세요. 각자의 산물과 작품을 가지고 나타나는 250여 명의 장인, 농부, 셰프, 디자이너와 공예가들을 만날 수 있는 시장으로,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이란 수식어를 가진 곳답게 활기가 넘쳐요.
제가 렌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수영장, ‘피신 생 조르주(Piscine Saint-Georges)’인데요. 정말, 말도 안 되게 멋진 공간이에요. 1920년대에 지어진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물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아르데코 시대 장인 오도리코(Odorico)의 모자이크 타일이 벽과 바닥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어요. 수영장 물 위에 둥둥 뜬 채 햇살이 스며드는 창,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 타일을 보고 있으면 한 세기 전 시대에 살고 있는 기분마저 들죠. 바캉스 시즌이나 주말엔 이곳에서 콘서트, 영화 축제, 전시도 열리는데 다른 데선 해볼 수 없는 정말 특별한 경험이에요.”

조르주 지지-보냉 George Ghighi Bonnin | 사진가, 갤러리스트 Photographer, Gallerist

“저는 사진가이자 수집가로 활동하며 렌에서 GGB라는 전시 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나고, 자라고, 살았죠. 렌으로 온 건 3년 전쯤이에요. 지금도 내가 그랬다는 사실이 믿기진 않지만, 어느 날 문득 파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왜 파리를 떠났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곳은 이제 ‘살기 좋은’ 도시는 아니잖아요. 적어도 내게는 그래요. 붐비고, 시끄럽고, 아무튼 예민해질 일이 많은 도시죠. 렌은 파리에서 불과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지만 완전히 다른 분위기예요. 특히 사람들. 친절하고 여유가 넘치고, 자주 웃어요. 파리에선 못 느껴본 ‘잘 사는 삶(good life)’을 렌에서 얻은 것 같아요.
렌다운 공간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제가 운영하는 GGB에 꼭 와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작은 갤러리를 여는 것이 꿈이었어요. GGB에선 예술, 음악, 영화 등의 장르에서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매력적인 아티스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대의 명반, 유명 인사의 사인과 메시지가 새겨진 악기, 포스터, 사진 등을 보거나 구매할 수도 있고요. 물론 지역 예술가들과 협업해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예술가와 애호가를 연결하는 작은 사랑방 같은 공간이죠. 시내에 위치해 찾아오기도 쉽고, 문턱이 낮아 발 들이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을 거예요. 언제든 와서 제게 말을 걸어주세요.”

마들렌 기요 장드롱 Madeleine Guyot-Gendron | 문화유산 해설사 Tour Guide

“렌의 거리를 걷다 보면 당신의 눈을 사로잡는 게 있을 거예요. 첫 번째는 옛 건축물의 안팎을 아름답게 꾸민 모자이크 장식입니다. 렌의 모자이크 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선 오도리코라는 이름을 꼭 알아야 해요. 1920년대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지방에서 유행했던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에 화려한 색감, 정교한 디자인의 모자이크 아트를 더한 예술가 집안이에요. 이들이 남긴 걸작 중 피신 생 조르주나 장-장비에르(Rue Jean Janvier) 거리에 있는 이뫼블 푸아리에(Immeuble Poirier) 같은 역사 유산도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론 렌의 아르데코 건축물 안에 들어선 상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자이크 패턴의 바닥을 좋아합니다. 대부분 상점 주인들이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 위해 바닥을 교체하다가 발견한 것들인데, 새 건축자재나 카펫으로 그 모자이크 타일을 덮어버리는 대신 복원 작업까지 해서 자발적으로 유산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도 감명 깊고요.
두 번째는 스트리트 아트예요. 렌은 프랑스에서 스트리트 아트 신이 발달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혹시 인베이더(Invader)를 알고 있나요? 뱅크시, 셰퍼드 페어리와 함께 글로벌 스트리트 아트 1세대의 주요 인물이죠. 구시가지의 팽호에(Penhoët) 거리에서 17세기에 지어진 목조 건축물을 둘러보다 보면, 그의 상징적인 캐릭터인 픽셀 모자이크 캐릭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렌에서 가볍게 산책하며 옛날과 지금의 거리 예술을 한눈에 담는 색다른 경험을 놓치지 마세요.”

L’art au quotidien

매일이 예술, 렌

비주류가 주류인 도시, 렌에서 발견한 일상 속 예술의 순간들.

길거리에서 만난 전위적인 비너스 상. 발칙한 예술을 사랑하는 렌에선 흔한 풍경이다.
100년 서점, 르 파예의 안쪽 풍경.

17세기에 지어진 목골 구조 건축물, 메종 아 콜롱바주(Maison à Colombages)에 들어선 르 파예(Le Failler) 서점은 무려 1925년에 문 연 독립 서점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온 이곳은 렌에서 나고 자란 이들, 지금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자부심과 애향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간. “저는 이곳이 대학 도시로 유명한 렌의 정체성을 함축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첫 일정으로 우리를 이곳에 데려온 렌 관광안내사무소의 라파엘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읽지도 못하는 프랑스어로 쓰여진 책을 뒤적이는 대신 서가 앞에서 독서에 열중한 사람들을 관찰한다. 햇살 아래에서 만난, 어딘가 밝고 화사한 낭트 사람과 달리 렌 사람들은 검박하고 수수하며 조금은 무뚝뚝해 보인다. 몇 년 전, 이런 느낌과 꼭 닮은 장소에 서 있던 기억이 난다. 미국 서부, 버클리(Berkely)의 상징과도 같은 모스 북스(Moe’s Books)다. 모스 북스는 1959년에 문 연 버클리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 서점으로 진보적인 지식인과 비트 세대의 아지트, 권위주의와 소비주의 등 주류 문화에 저항하는 반문화운동의 거점으로 유명하다. 렌도 그런 도시일까?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튼, 자신을 렌 1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소개한 로컬에게 물었다. “글쎄요. 버클리에 가본 적은 없지만 얘기를 듣고 보니 비슷한 것 같네요. 이곳 역시 프랑스 진보운동의 주요 도시 중 한 곳이고, 온갖 시위와 각종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거든요.”
그의 동의에 힘입어 ‘렌은 어떤 분위기냐’고 메시지를 보내온 친구에게 으스대며 이런 답을 보냈다. “어, 여긴 진보주의자, 좌파, 그리고 식자층들의 도시야. 나랑 아주 잘 맞을 것 같아.”
렌을 떠돌며 떠오른 또 다른 도시 이름이 있다. ‘히피’의 도시에서 ‘힙’한 도시로 변화하기 직전의 포틀랜드. 로컬 브랜드, 개성 강한 부티크 호텔, 제철 지역 식재료를 으뜸으로 치는 미식 신, 지속가능한 소비, 스페셜티 커피와 크래프트 브루어리의 세계를 내게 처음 알려준 2000년대 중·후반의 포틀랜드는 이데아이자 오랜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카페 겸 갤러리이자 빈티지 숍 바카름(Vacarme)에서 추측은 확신이 됐다. 그곳을 운영하는 모레앙의 말 때문이다. “우리는 패스트 패션보다는 유즈드 패션을, 대기업보다는 지역 브랜드를, 편리보다는 지속가능성을 추구합니다. 어디나 그렇듯 독립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꿈과 비즈니스를 펼치기란 쉽지 않지만 적어도 렌에선 ‘함께 투쟁한다’는 분위기가 있어요. 이웃들의 지지도 큰 힘이 되고요. 바카름 역시 제로 웨이스트 브랜드와 함께 일하며 브르타뉴 지역의 창작자들을 위해 공간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렌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아준 존재는 오텔 파스퇴르(Hôtel Pasteur)였다. 시청사, 오페라하우스, 성당 같은 고전적인 장소를 건너뛰고 렌의 ‘지금’을 만나고 싶다는 말에 가이드 마들렌이 우리를 데려다 놓은 공간이다. 19세기에 건축된 네오클래식 양식의 육중한 석조 건물은 원래 과학·치의학 대학, 병원으로 쓰였다. 2013년 프랑스 건축가 파트릭 부솅(Patrick Bouchain)이 주도한 ‘움직이는 대학교’ 프로젝트, 유니버시테 포렌(Université Foraine)의 일환으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오텔 파스퇴르가 특별한 건, 이곳이 단순히 사람들을 모으는 마을 회관의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프로젝트 호텔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렌 시민이라면 누구나 무엇이든 제안하고 실행할 수 있는 실험실이에요. 옛 건축 유산을 지키기 위해 공간에 고정된, 특정한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쓰임새로,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죠.” 온갖 종류의 공유 공간을 취재해봤지만 이런 곳은 본 적이 없어서, 그의 설명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그럼 여길 뭐라고 정의하면 될까요? 커뮤니티 스페이스?”대답 대신 마들렌이 벽에 붙은 문구를 가리킨다. “당신이 실험가든, 창작자든, 이제 막 뭔가를 시작한 사람이든, 혹은 포스터를 만들고 싶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거나, 그냥 무언가가 궁금하다면 오픈 랩의 문을 열고 우리와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통역을 마친 마들렌이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이어갔다. “누구나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은 순간이 있잖아요. 어느 날 문득 애니메이션을 만들거나 춤을 추고 싶을 때, 혹은 여행에서 찍은 영상을 편집해 브이로그를 제작해보고 싶을 때 렌의 주민들은 여기에 오면 돼요. 글을 쓸 작업실이 필요하면 넓은 방 안 빈 책상에 앉으면 되고, 뭔가를 함께 해볼 구성원을 구하면 칠판에 공고를 붙이면 되고요. 이곳에선 누구나 창작자, 기획자,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이, 직업 같은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한마디로 쓰는 사람이 공간을 정의할 수 있는 살아 움직이는 플랫폼이죠.” 누구나 식재료를 가져와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공유 주방과 노숙자든 부자든 모든 아이들이 차별 없이 돌봄과 교육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에콜 파스퇴르까지 둘러본 후 부러움과 질시를 가득 안고 바깥으로 나왔다.
내가 렌에서 찾은 건 각과 형태가 번듯한 예술적 장소와 순간들이었지만 이 도시가 내게 보여준 건 이런 장면들. 시청사와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메리(Mairie) 광장 한복판에서 와인 박스에 대충 책을 쌓아두고 독서에 여념 없는 거리 서점 주인, 100년 된 아르데코 건축물 안, 오도리코 가문의 모자이크 작품 위에서 방과후 수영을 즐기는 동네 아이들…. 렌 사람들에게 예술은 이런 것이다. 삶 속에서 숨 쉬듯 접하며 거창한 의욕이나 심오한 결단 같은 것 하나 없이 평범하게 즐기는 일상. 수세기를 건너온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에 입주한 100년 된 주민 센터 수영장에서 “이번 주 토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 일렉트로닉 밴드 쿠르투아지(Courtoisie)가 콘서트와 파티를 열 예정입니다” 라는 내용의 벽보를 보고 나는 진짜 ‘쿨(cool)’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했다.

오도리코 가문의 모자이크로 장식된 라 크리에. 지금은 갤러리와 시장으로 쓰인다.
렌의 젊고 활기찬 분위기를 만드는 대학생들.

렌의 ‘쿨’을 만나고 싶다면

17세기 목조 건축물, 메종 아 콜롱바주가 들어선 거리.

스트리트 아트 탐험
렌은 프랑스에서 힙합 문화가 비교적 일찍 유입된 도시 중 하나. 1990년대부터 ‘WAR!’, ‘인베이더’ 같은 세계적인 스트리트 아티스트가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폐공장 부지의 담벼락, 낡은 건축물의 외벽에 게릴라처럼 흔적을 남기는 예술가들이 많아지자 2002년부터 시 차원에서 합법적인 캔버스를 제공하고 거리 예술 축제를 열면서 스트리트 아트 신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거리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900m에 달하는 담벼락을 캔버스로 만든 콜롱비에(Colombier) 대로나 시내의 빅토르 위고(Victor Hugo) 거리를 찾을 것. 정확한 위치는 거리 예술 축제 ‘틴 에이저 킥스 비엔날레(Teenage Kicks Biennale)’의 공식 홈페이지(www.teenagekicks.org)에서 제공하는 지도를 참고하면 된다. 시청사 앞 관광 안내소 ‘데스티네이션 렌(Destation Rennes)’에선 90분~2시간 코스의 스트리트 아트 투어도 진행한다.

음악 축제 찾기
실험, 독립성, 비주류를 추구하는 분위기는 이 도시의 다채로운 음악 신에도 영향을 미쳤다. 매년 12월 초에 열리는 ‘트랑스 뮈지칼 드 렌(Trans Musicales de Rennes)’은 록, 일렉트로닉, 힙합, 레게,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세계적인 뮤지션이 방문하는 페스티벌. 47회인 올해는 12월 3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다. 그 밖에 음악이 시, 연극과 함께 어우러지는 ‘페스티발 미토스(Festival Mythos)’, 재즈, 스윙 등의 선율이 가을밤을 채우는 ‘자즈 아 뢰스트(Jazz à l’Ouest)’, 도시 곳곳이 댄스 플로어가 되는 일렉트로닉 축제 ‘메이드 페스티발(Made Festival)’ 등이 렌의 사계를 채운다.

차원 다른 갈레트 맛보기
프랑스를 여행할 때 한번쯤 꼭 맛보는 갈레트는 브르타뉴 지역의 전통 음식이다. 렌은 브르타뉴의 주도로 정통 갈레트의 본고장. 메밀 가루 100%인 렌 스타일의 갈레트 중 쌉쌀한 고소함이 특징인 갈레트 콩플레트(galette complete)를 꼭 맛볼 것. 반죽을 넓게 펴서 익힌 후 신선한 달걀과 에멘탈 치즈를 얹어 만든다. 산미가 강하고 드라이한 풍미를 가진 로컬 시드르(사과주)를 곁들이면 완벽한 브르타뉴식 한 끼를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