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터의 기억법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LEE JIHYE
  • PHOTOGRAPHY BY JEON JAEHO

컬렉터의 기억법

Travel Mementos

조인숙 작가에게 물건은 여행의 순간을 다시 소환하는 도구다. 잘 드는 가위, 질 좋은 패브릭… 낯선 도시의 직물 상점에서 시작된 수집 이야기.
  • written by LEE JIHYE
  • PHOTOGRAPHY BY JEON JAEHO
2025년 05월 07일

일산의 한 조용한 동네에 자리한 버튼티 하우스에 들어섰을 때, 이곳이 26년 된 구옥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감각적인 공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집의 주인은 소규모 출판사 ‘버튼티’를 운영하면서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는 조인숙 대표다. 그는 10년 넘게 버튼티를 운영해왔다. 버튼티는 말 그대로 아주 작은 단추 하나 같은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철학을 담은 이름이다. 그는 버튼티를 통해 패브릭, 수공예, 여행을 테마로 한 책을 직접 기획하고 쓰고 만들고 유통까지 한다. 이 집은 그가 다녀온 수많은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공간이다. “핀란드 건축가 알바르 알토의 하우스를 보며 꿈을 꿨고, 프랑스의 국민 캐릭터 <가스파르와 리자> 시리즈를 쓴 작가 부부처럼 숲이 보이는 큰 창이 있는 작업실을 동경했죠.” 여행이 곧 휴식이자 일인 그의 집 곳곳엔 여행지에서 산 것, 벼룩시장에서 찾은 것들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2층의 집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른쪽 벽을 가득 채운 감각적인 가위 컬렉션이다. 런던, 파리, 도쿄 등에서 사 온 것으로 서른 개가 넘는다. 패브릭 제품을 만드는 것이 직업인 만큼 첫 여행부터 자연스레 가위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절삭감이 부드러워 계속 손이 가는 핀란드의 피스카스(Fiskars), 작고 정밀한 패브릭 전용 재단 가위인 클로버(Clover), 영국의 텍스타일 브랜드 리버티(Liberty), 뾰족한 부분을 자르는 머천트 앤 밀스(Merchant & Mills), 일본 교환학생을 다녀온 딸이 선물한 체크 앤 스트라이프(Check & Stripe) 등 브랜드도 다양하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실루엣, 왼손용 가위라는 희소성, 에펠탑을 닮은 귀여운 모양 등 사 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많았다.
“핀란드에서 피스카스 가위를 가져올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대부분의 유럽 공항에서는 실물 검사 없이 텍스 리펀을 받잖아요. 헬싱키 공항에서 텍스 리펀을 받고 티케팅을 한 뒤 밀봉한 상태의 가위를 가지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공항 검색대에서 걸린 거예요. 고민 끝에 천 가방에 가위를 돌돌 싸서 부쳤어요. 돌아오는 내내 가위가 괜찮을지, 가위를 넣은 (무척이나 아꼈던) 미나 페르호넨(Minä Perhonen) 천 가방이 무사할지 걱정했죠. 다행히 둘 다 무사했고요.”
가위만큼 조인숙 작가에게 필수적인 아이템은 패브릭이다. 여행지에서 사 온 패브릭으로 옷, 인형, 커튼, 이불을 만드는 건 그의 큰 기쁨이다. 가족 여행을 앞두고 모아뒀던 패브릭으로 아이들 옷을 바느질하는 것도 그만의 경건한 의식 중 하나다. 최근 다녀온 프랑스 남부 여행을 앞두고는 남편과 함께 입을 옷을 만들었다. “아이들과 커플 룩을 입고 여행지에서 사진으로 남겼어요. 아이들은 뭘 입혀도 귀엽잖아요. 우리만의 추억이고 행복이었죠. 그런데 요즘엔 다 컸다고 옷을 만들어줘도 시큰둥하더군요. 대신 오랜만에 남편 옷을 만들어줬더니 남편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어요.

애정하는 패브릭 브랜드도 다양하다. 영국에선 실켓 가공이 독보적인 리버티를, 일본에서는 체크 앤 스트라이프와 미나 페르호넨 매장을 빼먹지 않는다. 산리오(Sanrio)와 리버티 재팬의 협업 제품은 아끼는 아이템 중 하나. 질 좋기로 유명한 리투아니아의 리넨을 쓰는 일본의 포그리넨 워크(Fog Linen Work)도 그녀의 작업에 자주 쓰였다. 색감이 밝고 직조가 섬세한 북유럽 패브릭 브랜드도 많다. 핀란드의 유명 브랜드 마리메꼬(Marimekko)나 클래식한 패턴의 스웨덴 브랜드 보로스 코튼(Borås Cotton)도 한편을 차지한다.
“북유럽 패브릭은 주로 인테리어 용도로 사용해요. 스웨덴이나 핀란드 패브릭은 가격이 무척이나 비싸지만, 가능한 한 사 오려고 노력하죠. 그러지 않으면 한국에 돌아와서도 눈에 아른거려 다시 가게 될 게 분명하니까요.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과 공동 제작한 패브릭을 샀을 때 너무 기뻐 날아갈 것 같았어요. 사 왔지만 아까워서 쓰지 못하는 패브릭도 있죠. 미나 페르호넨에서 사온 원단은 인형을 만들 때 귀 부분에만 썼어요.”
아기자기하면서도 핸드메이드풍 패브릭이 필요할 땐 도쿄행 티켓을 끊는다. 동대문 종합상가처럼 직물 가게들이 모여 있는 닛토리 패브릭 타운은 조인숙 작가에게 참새 방앗간 같은 곳이다. 이곳엔 가죽, 액세서리, 단추, 패턴, 봉제 등 약 90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다. “일본은 가정에서 엄마가 아이들 옷을 만들어주는 것이 보편화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보다 원단 구매가 활발하죠. 덕분에 닛포리 패브릭 타운은 소매라고 거부하는 곳도 없어요. 여행자가 접근하기에도 좋죠.” 최근 20년간의 도쿄 여행을 기록한 <틈틈이 도쿄>를 통해 좋아하는 패브릭 상점과 제품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조인숙 작가의 컬렉터 기질은 성냥갑을 차곡차곡 모으고 오래된 옷을 마치 세탁소 진열대처럼 각 잡아 정리하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릴 적엔 아빠를 닮았다는 말이 싫어서 털털한 엄마를 닮은 척했어요. ‘나 털털한 사람이야’ 하면서요. 그런데 디자인을 전공해보니 털털한 게 자랑이 아니더라고요. 일과 여행을 하면서 제 안에 숨어 있던 (사실은 원래 기질이었던) 꼼꼼함과 컬렉터의 DNA가 발현된 거죠.” 그는 낯선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거나 삶의 의미를 거창하게 찾지 않더라도, 똑같은 집과 일상을 잠시 벗어나는 것만으로 반복된 생활로 마모된 부분이 메워진다고 믿는다.
“여행이 끝나면 이상하게 당시의 기억이 흐려져요. 시간이 지나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때 샀던 물건을 보면, 마치 일기처럼 여행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져요.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죠. 수집품이 쌓일수록 제 여행은 더 또렷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