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나의 두번째 집 - 헤이트래블 - hey!Travel

  • written by yeo hayeon
  • writing & photography by sohn mina

스페인, 나의 두번째 집

Spain, My Second Home

1년의 반은 한국에서, 나머지 반은 스페인에서 보내는 삶을 살고 있는 손미나에게 스페인은 또 다른 고향이다. 고향에 가족이 있듯, 스페인에는 가족 같은 친구들이 있다. 손미나식 스페인 사랑법.
  • written by yeo hayeon
  • writing & photography by sohn mina
2024년 01월 29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순도 높은 햇살과 기분 좋은 공기,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바이브. 익숙한 스페인어가 들리기 시작한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의 다른 집에 왔구나.” 고향에 온 듯한 안도감이 든다. 어쩌다 보니 언젠가부터 1년의 반은 한국에서, 나머지 반은 스페인에서 보내는 삶을 산다. 유목민처럼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스위트홈’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나에게는 두 군데인 것이다. 스페인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언어가 통하고 친구들이 있기에, 비행기 안에서 한숨 자는 사이 순간 이동을 할 뿐, 나라가 바뀌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아나운서로 일을 하던 2004년 스페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만 해도, 이곳에서 보낸 1년 여의 시간이 내 삶을 이렇게 바꿔 놓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2023년 10월 나의 첫 책인 <스페인, 너는 자유다>의 개정판이 나왔다. 2006년에 나왔으니 17년 만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확실한 건, 이 책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란 것. 스페인을 사랑하는 이유를 말하라면 백 가지를 댈 수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다. 스페인에 스페인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가 이곳과 이렇게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 팬데믹을 겪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스페인 사람들의 슬픔을 보았다. 밝기만 했던 스페인 사람들의 슬픔에 가득 찬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극장 주차장은 코로나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으로 덮였고, 한 다리 건너면 코로나로 가족을 잃은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힘든 시기를 통과했지만 유쾌하기만 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180도 변화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팬데믹 이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스페인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긍정적이다. 한 번이라도 스페인 여행을 해봤다면 혹은 스페인 사람을 만나봤다면 익히 알겠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밝고 유쾌하다. 삶의 유머가 있다. 열정적이고 다혈질적인 모습은 한국인과 닮았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한국인처럼 성공에 집착하거나 과도하게 경쟁하면서 획일화된 행복의 기준에 자신의 가치관을 끼워 맞추지 않는다. 속전속결하지 않고, 밥 먹을 때도 천천히, 삶의 여유, 마음의 여유가 있다. 완벽해 야만 인정받는 게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여주는 스페인 사람들 때문에 나도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음을 열게 되었다. 삶이 버거워서 힘들 때나 고민이 있어 털어놓을 때마다 나의 스페인 친구들은 어깨를 툭툭 치며 조언해주곤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면 슬퍼하지 말것이며 인생을 뒤흔드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웃어버려. 걱정을 왜 해?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고 해결이 안되면 그냥 포기해.” 그들의 삶의 논리는 그렇게 단순하다. 모든 일에 같은 원리를 적용해 무조건 웃어 넘기든지, 아니면 바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죄다 잊어버리든지. 체념이나 무책임이 아닌 희망과 긍정의 마인드를 스페인 친구들로부터 배웠다.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친구가 있는 도시와 친구가 없는 도시는 느낌부터 다르다. 고향에는 가족이 있다. 스페인에는 또 하나의 가족인 내 친구들이 있다. 소중한 한 시절을 함께 해준 친구들은 내 인생의 커다란 선물이다. 2004년 유학 당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다비드·마르타 부부와는 20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에 나왔던 그들의 갓난아이 마리아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는데 나를 ‘한국 이모’라고 부른다. 스페인에 갈 때면 아무리 일정이 바빠도 잠깐이라도 얼굴을 본다. 얼마 전에도 스케줄과 스케줄 사이에 번개처럼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너무 재밌어서 헤어질 땐 서운함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스페인 내 어느 지역에 가나 반겨주는 친구들이 있다. 빌바오에 사는 파트리시아와 이냐키 부부, 그들의 딸 니콜. 파트리시아는 스페인에서 잘 알려진 국민 아나운서다.

바르셀로나에 가면 가끔 로베르토의 집에서 묵는다.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교토의 기요미즈데라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 로베르토의 와이프 아나벨과도 이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는데, 한국에서라면 남사친의 부인과 우정을 쌓아 가는 게 쉽진 않았을 거다. 책에 나왔던 친구들은 스페인, 혹은 고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최선을 다하며 각자에게 맞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나와 함께 피카소의 단골 식당 ‘네 마리의 고양이’에 자주 갔던 베네수엘라 출신의 다비드는 정통 기자의 길을 걸어가며 현재 마드리드에서 독립 매체를 발행하고 있다.

그는 백악관에서 선정한 전 세계 유망한 기자 20명 중 한 명에 뽑히기도 했다. 카탈루냐 광장을 찾은 한국의 농악대를 함께 취재했던 페루의 잡지사 기자 이야는 페루 쿠스코에서 인류학자, 디자이너로 일하며 여성과 원주민의 인권 프로젝트, 영화제 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몇 년 전, 암을 극복한 그녀는 현재 자신이 정한 기준 안에서 일하고 명상하고 텃밭을 가꾸며 살고 있다.

스페인 사랑을 하나로 담는 그릇

얼마 전 스페인에 대한 나의 사랑을 하나의 큰 그릇에 담아내고 한국과 스페인, 한국과 라틴아메리카,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코알라 컴퍼니(코리아앤드 라틴 월드)’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코로나를 겪으며 삶이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까 생각이 많아졌다.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 그래서 탄생한 브랜드가 바로 ‘올라 미나(Hola Mina)’다. 올라 미나의 첫 프로젝트는 바로 스페인의 정말 좋은 올리브오일을 농부 친구들의 농장에서 직접 한국에 가져와 소개하는 일이다.

지난 11월, 스페인 카탈루냐(Cataluña) 중남부 해안에 위치한 타라고 나의 올리브 농장에 다녀왔다. 로마인의 유적을 비롯해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벽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도시. 이 지역은 수백 년에서 1천 년 이상의 나이를 먹으며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린 올리브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10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올리브농장에서 올리브 수확 과정을 보고 ‘햇올리브’로 만든 오일이 얼마나 특별한지 체험하고 왔다. 나만이 알고 있는 스페인을 소개하고, 더 넓게는 건강한 마인드와 건강한 몸으로 재밌게 사는 법을 공유하는 게 ‘올라 미나’의 목표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아름다운 바르셀로나, 언젠가 이곳을 다시 찾게 되면 네가 이 모습 그대로이면 좋겠다. 내 욕심이 과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모습 그대로 나를 반겨준다면 정말 좋겠어. 그래서 다음에 너를 만나러 올 때도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모습을 여기서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도할게. 아디오스 나의 사랑, 아디오스 나의 바르셀로나. 사랑하는 나의 스페인.”
나를 성장시키고, 힘들 때마다 ‘나 괜찮네. 나도 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주고, 내 자신감의 원천이 되어준 스페인. 내 삶의 일부, 스페인과의 사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손미나는 방송인, 여행작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 <태양의 여행자> 등 14권의 책을 썼다. 2023년, 스페인과 한국을 연결하는 플랫폼 컬처 큐레이션 올라 미나를 설립했다.